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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연들

<단편소설 처음 >

by 박래여

어떤 인연들


녹색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날이다.

자영은 텃밭 가에 섰다. 어제저녁나절에 심은 씨앗이 벌써 돋을 리 없지만 잘 다듬어진 밭두둑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그 옆에 매운 고추 모종 여남 포기 옮긴 것도 싱싱하다. 딸기도 얻어다 심고, 방울토마토도 얻어다 심었다. 치커리, 쑥갓, 양상추, 참나물 등 대 여섯 가지 씨앗도 뿌려 놨다. 텃밭 주위에 지난가을 심어 놓은 상추와 방풍, 치커리가 푸들푸들하다. 실파는 노르스름해지고, 대파는 동이 올라 꽃을 피웠다.

자영은 자신의 성이 참 아름답다고 느낀다. 선들거리는 바람과 날마다 조금씩 짙어지는 연녹색의 산 빛, 그 아래 진한 분홍과 연분홍 철쭉, 하얀 조팝나무 꽃이 마른 억새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누구나 자연처럼 살면 조화로운 삶이 아닐까.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공원이나 정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이 주는 오묘함은 없다. 풀과 나무, 꽃과 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너무 잘 어울린다.

자영은 파밭에 쭈그리고 앉았다. 파보다 풀이 더 많다. 풀을 뽑기 시작했다. 동이 오른 시칭개 대를 뽑아냈다. 진딧물이 새까맣게 붙어 있다. 진딧물을 툭툭 털어냈다. 예전에는 벌레만 봐도 징그러워서 도망가기 바빴는데. 지금은 진딧물조차 예뻐 보인다. 물론 겁 없이 손으로 문질러 털기도 하고, 슬쩍 신발바닥으로 문질러버리기도 하지만.


‘무릇 생명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환경에서든 적응하게 된다더니 그 말이 맞아.’

자영은 혼잣말을 하며 보랏빛 꽃이 너무 고와서 뽑지 못했던 광대나물도 뽑아냈다. 납작하게 퍼져 꽃을 피운 큰 개불알 꽃도 뽑아냈다. 민들레도 뽑아야 하나 키워야 하나. 약인데. 쌈인데. 망설이다 한 주먹 잡고 쑥 뽑아 올렸다. 흙이 따라 올라와 얼굴을 때린다. 눈에 들어간 흙을 털고 민들레 뽑힌 자리를 봤다. 하얀 알갱이가 뽀얗다. 자잘한 밥 티 같은 것을 물고 꼬물거리는 것이 있다. 개미다. 개미 왕궁을 침범한 것이다. 금세 발등으로 개미떼가 새까맣게 기어오른다. 자영은 그만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하면서 발을 통통 털어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개미 떼거리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 없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다. 개미떼에게 물려가던 아이 생각이 났다. 몇 년도인지 기억에 없지만 노벨 문학상을 받은 G. 마르께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이 아니던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는 돼지 꼬리를 달고 있었고 개미 떼가 그 아이를 물고 갔었다. 마지막 대목이 너무 강렬해서 개미 떼만 보면 자영은 그 소설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자영은 그만 텃밭을 나와 수도 가에서 손과 발을 씻고 또 씻었다. 옷도 앞 뒤 뒤적여가며 자꾸 털었다. 온몸에 개미가 슬슬 기어가는 것 같아 자꾸 털었다. 손발을 씻고 들어와 목욕탕으로 직행했다. 옷을 홀딱 벗어버리고 몸을 씻었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허물을 벗듯이 벗어던진 옷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쭈그리고 앉아 바닥을 살폈다. 혹시 꼼지락거리는 진드기나 개미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손바닥으로 목욕탕 바닥을 싹 닦아 눈으로 확인했다. 그가 봤으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유난 떤다고 하겠지. 늙어갈수록 호박처럼 둥글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삼덩굴처럼 모질어진다고 하겠지. 이젠 책이나 좀 읽을까. 자영은 읽다만 소설책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오후였다. 자영은 다시 텃밭 가에 섰다. 파밭을 바라봤다. 개미는 그 새 왕궁을 재건했는지 어쨌는지 사라지고 없다. 하얗게 뒤집혀 있던 개미 알 역시 사라지고 없다. 풀 뽑은 자리가 말끔해서 좋다. 누군가 달개비 꽃을 키우는 꽃밭에 파가 있으면 파가 잡초가 된다고 했든가. 텃밭에서는 키워야 할 것 외엔 모두가 뽑아버려야 할 잡초다. 아무리 곱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 잡초 인생이다. 사람도 잡초처럼 살면 뽑아버려야 할 대상일까.

“차 마시러 오소.”

사랑에서 남자가 부른다. 자영은 남자의 부름에 대답 없이 사랑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명상 음악을 은은하게 틀어 놓고 다구가 갖추어진 찻상 앞에 앉아 차를 달인다. 불가에서 말하는 처사의 모습이 저럴까. 저 남자 어디가 좋아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일까. 무엇을 바라 온 것도 아니다. 가진 것이 많아 온 것도 아니다. 무엇일까. 자영은 고개를 저었다. 정일까? 사랑과 정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사랑은 기름을 끼얹어 불을 붙인 화톳불처럼 화르르 탔다가 꺼질 수 있는 것이라면 정이란 젖은 나무를 가새지르기로 포개놓고 그 아래 마른 불땀을 넣어 모닥모닥 어렵게 피워 올린 화톳불 같은 게 아닐까.

자영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찻상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남자가 자영 앞에 하얀빛의 앙증맞은 찻잔을 갖다 놓는다.

자영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창밖은 초록의 평원이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진 괭이자루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다. 아무렇게나 쌓인 나무 등걸도, 돌덩이도 제멋대로 자란 풀도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진 것 없이 어우러져 보인다.

‘또르르’

남자의 차 따르는 소리가 맑다. 하얀 찻잔에 담긴 연두 빛으로 우러난 찻물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남자가 먼저 자신의 찻잔을 들고 코부터 벌름거린다. 남자의 행동이 무척이나 진지하다. 자영도 다소곳이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코끝에 댄다.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름거리며 차향을 음미했다. 풀냄새 같기도 한 향긋함이 머리를 맑게 한다.

“아무래도 지난해 차보다 못한 것 같아. 상처 난다고 살살 다루더니 맑은 맛이 영 안 나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내 말은 팥을 팥이라 해도 안 들으면서 그니 말은 콩을 팥이라 해도 알아듣는 걸 보면 당신은 아무래도 그니의 남자야.”

“차나 마시소. 씰데없이 넘 복장 긁을 생각 말고.”

남자의 눈이 세모꼴로 쪽 찢어진다.

“.......”

자영은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남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찻잔이 비면 차를 따랐다.


너덧 번 차를 우려 마시고 일어난 남자는 나갈 준비를 했다. 청바지에 빨간 윗도리를 걸치고 챙이 긴 모자를 썼다. 손에는 솔잎 농축액을 탄 물병과 건빵 한 봉지를 들고 푸른 잔디밭을 걸어간다. 자영은 남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남자로서 중간 정도의 키에 군살 없는 몸매다. 딱 벌어진 어깨와 숱 많은 곱슬머리가 어깨에 닿아 찰랑거린다. 남자도 자연 속에 녹아들어 조화로워진 것인지. 자영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찍는 폼을 하다가 불쑥 목청을 돋우었다.

“나도 같이 가?”

남자가 돌아보지도 않고 거절의 손을 흔들더니 불쑥 목청을 높였다.

“밑에 내려갈 일 있으면 저거나 갖다 주고 오시오.”

남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포터에 담긴 방울토마토 세 포기가 한들거린다. 그니에게 갖다 주고 오라는 뜻이다

자영은 차관에 남은 차를 귀탕기에 따라 놓고 홀짝홀짝 마시며 그대로 앉아 있다. 자영은 남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찻잔을 헹구어 놓고, 찻상을 제 자리에 밀어 놓고 일어났다. 소쿠리와 칼을 챙겨 다시 텃밭으로 갔다. 영양이 모자라서 빌빌대던 부추가 며칠 새 이들이들하다. 부추를 베며 ‘이것도 그니에게 한 주먹 갖다 줘, 말어, 부침개나 구워 먹고 말까. 겉절이를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부추 밭 옆에 매인 개에게 묻는다.

“야들아, 어떻게 할까? 그니한테 갖다 줘, 말아?”

하얀 진돗개 두 마리가 눈을 빛내며 꼬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자영은 번갈아 가며 두 마리의 목덜미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두 녀석이 어찌나 시샘이 많은지 한 녀석만 쓰다듬어 주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린다. 모자지간인데도 원수가 따로 없다. 교미기가 와도 절대로 아들에게 곁을 주지 않기 때문일까. 불귀가 되어 버린 늙은 암캐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가끔 보면 두 녀석이 어미와 자식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개는 왜 어른이 되면 부모자식을 몰라볼까. 어미는 자식을 아는데 자식이 어미를 몰라보는 것 같았다. 사람 못된 것을 개에게 비유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영은 부추를 다듬어 냉장고에 넣고 다시 책을 잡았다. 문학 동네 신인상 받은 작품인데 영 진도가 안 나간다. 젊은 작가의 작품은 문장의 질보다 말장난 같다. 비비 돌리고 꼬고, 당기고, 늘이고, 뭉치고, 푼다. 현실을 반영했다는 것까진 좋은데. 자영은 아무래도 현실에 대해 어둡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젊은 사람들과 교우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는 것은 늘 푸름이다. 날마다 똑같은 화면 같지만 겉보기만 정지된 화면이고 속을 보면 한 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변화무쌍한 화면이다. 그녀의 성은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고, 자영은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차다.

자영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아무래도 책 보며 뒹굴 수가 없다. 햇살과 바람이 너무 좋은 탓도 있겠지만 남자가 한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밑에 내려갈 일 있으면 저거나 갖다 주고 오소.’ 꿩이 불러내고, 산새가 불러내고, 까치가 친구 하자 해도 오늘은 별로 신이 안 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망태를 어깨에 걸쳤다. 새끼로 꼬아 짠 망태가 아니라 천막으로 만든 망태다. 망태를 멜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던 앙증맞도록 작고 예뻤던 망태기도 생각난다.


아버지는 솜씨가 좋으셨다. 무엇이든지 잘 만드셨다. 소나무, 감태나무, 낙엽송, 대나무, 싸릿대, 짚, 산죽, 등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지게나 바지게는 기본이었고, 대자리, 대소쿠리, 키, 조리, 삼태기, 나무바가지, 똥장군, 구유, 망태, 가마니, 멍석 등, 특히 짚으로 만든 것은 쓰임새나 크기, 모양이 다양했다. 가을에 타작을 하고 나면 일부러 길이가 긴 짚만 골라내서 한 동을 따로 뭉쳐 두었다. 겨울철 농한기에 시나브로 긴 짚단을 꺼내 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물을 뺀 후 꼽꼽한 짚으로 새끼를 꼬았다. 커다란 새끼줄 뭉치가 몇 개쯤 쌓이면 멍석도 짜고, 거름소쿠리나 꼴망태도 만들었다. 아버지는 키 작은 어린 딸에게 알맞도록 작은 꼴망태도 짜 주셨다. 딸이 꼴망태를 어깨에 걸치고 팔랑팔랑 걸어가는 폼이 잔망스럽다고 웃으셨다.

자영은 골동품이 되어 버린 꼴망태와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한 줄 되새김하며 고사리 밭으로 향했다. 고사리 밭에 가는 길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삽짝을 벗어나면 찻길을 건너고, 찻길을 건너 못 둑에 다다르면 온통 풀밭이다. 수십 종의 풀이 제멋대로 어우러져 있는데도 전혀 지저분하거나 보기 싫은 게 아니라 볼수록 조화롭다. 계절에 맞추어 피는 들꽃도 다채롭다. 어린것은 어린것대로, 낮은 것은 낮은 것대로, 키 큰 것은 키 큰 것대로, 덩굴은 덩굴대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잘하면서 산다. 오솔길을 지나고, 묵정이에 난 비탈길을 지나 고사리 밭에 다다르면 고사리가 활활 패서 푸른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녹색 바다였다. 노루가 놀고, 꿩이 놀고 멧돼지가 노는 푸른 바다였다. 자영은 그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한 마리 고기였다. 푸른 수초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엄치다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먹이를 발견하면 제각 잡아채는 날랜 고기였다. 자영의 손에 낚이는 것은 통통하고 부드러운 어린 고사리였다. 수초 속에 숨은 보물 찾기나 다름없었다. 열심히 찾아다녔다. 땅 심 뚫고 올라오다 밟힌 어린것이 ‘아야’하고 고함을 치면 ‘미안해, 조심할 게’라며 쓰다듬어주지만 덜 피고 어린 고사리는 꺾어야 할 대상이다. 어린 고사리 꺾는 일은 재밌다. 넓은 고사리 밭을 맘 내키는 대로 휘저어 다니다 보면 그녀가 노루인지, 노루가 그녀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나는 고기가 되었다가 노루가 되었다가 변신의 귀재야. 자영은 혼자 중얼거리다 허리를 펴고 씩 웃었다. 순간 뭔가 그녀 옆을 휙 지나갔다.

“아이쿠, 깜짝이야!”

자영은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노루였다. 고사리 밭에 숨어 있던 노루가 제풀에 놀라 도망쳤다. 자영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이 참 맑았다.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시원한 바람에 실려 오는 상큼한 풀내음이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살내음 같다. 내 어머닌 어떤 분이셨을까. 딸은 어머니의 팔자를 닮는다는데. 어머니도 나처럼 살다 나를 두고 떠난 것일까. 어머니는 아이를 낳았는데 나는 왜 석녀일까. 씨는 실한데 밭이 돌밭이니 아무리 좋은 종자를 넣어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던 시어머니, 형우를 보면 종자가 좋긴 좋은 것 같은데.


자영은 벌떡 일어나 다시 고사리를 꺾기 시작했다.

자영은 한 솥정도 될 고사리를 꺾어 삶아 햇볕에 내놓고 방울토마토 세 포기를 챙겨 그니가 사는 동네로 내려갔다. 먼저 동네 근처에 있는 마늘밭으로 갔다. 반찬도 하고, 장아찌도 담글 겸 마늘종을 좀 따려고 했지만 딸 것이 별로 없다. ‘마늘종은 내가 딸게 놔둬’ 했지만 그니는 ‘형님 믿다가는 마늘 꽃이 훨훨 피어 마늘뿌리가 메추리알만 할 겁니다.’라며 시나브로 따 냈던 것이다. 그니는 허리가 아파 걸음 걷기도 힘들다 하면서도 밭골에 풀 한 포기 나는 것을 못 본다. 덕분에 마늘종 따서 밑반찬도 만들고, 마늘종 장아찌도 담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자영은 개의치 않는다. 부지런한 그니 덕분에 편하게 됐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편할수록 살맛 나는 게 농촌 살이 아닌가.

마늘종을 온종일 따 봐라. 허리는 끊어질 듯하고, 다리는 뻗정다리가 되니 걸음걸이가 바를 리 없다. 어기적어기적이요. 얼굴은 햇볕 기미로 새까맣게 타지요. 손가락은 마늘 진액이 묻어 화끈화끈 화상 입은 것은 저리 가라지요. 평생 일개미로 사느니 한 철 살다가 말아도 베짱이로 살고 싶어 진다. 농사일이란 잠깐 하면 재미 붙지만 종일 하면 중노동이다. 혼자 하는 것보다 친구가 있어야 일하는 맛이 난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또래의 친구가 없는 곳이 2천 년도 농촌 현실이다.

자영은 하릴없는 사람처럼 마늘밭 골마다 돌아다니며 이삭 줍기를 했다. 슬그머니 심심해진다. 아랫동네 시집온 월남 새댁은 잘 살까. 월남 댁의 안부가 궁금하다. 어린 그녀를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무슨 생각으로 부모형제 떨어져 먼 타국 촌구석으로 시집을 온 것일까.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그렇게 못 사는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남자 만나 가정 이루고 사는 일 어쩌면 도를 닦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랫동네 월남 댁은 잘 버티고 산다. 이웃 동네 연변 새댁은 임신한 지 2개월 됐다면서 시어머니가 자랑이 늘어지더니 그것도 잠시, 돈벌이하러 가고 싶다기에 버섯 공장, 한과 공장 보냈더니 어느 날 그만 보따리 쌌단다. 뱃속 아이는 지웠을까, 키우고 있을까. 그 이웃에 시집온 어린 새댁도 함께 갔다니 신혼의 꿈이 물거품으로 바뀌어버린 오쟁이 진 두 남자는 동병상련을 앓아 또 얼마나 술독에 빠져 살까.


“아요, 마늘종 딸기 있나? 아침나절에 형우 옴마가 따는 것 같던데.”

회색 몸빼에 빨간 조끼를 입은 나무실 할머니가 호미를 들고 밭두렁에 나타났다.

“그렇잖아도 별로 없습니다. 어찌 나오셨어요?”

“요놈의 달롱개 캐 내삐로 안 왔나. 우째 이리 속을 쎅일꼬. 파내도 파내도 한정이 없다. 뿌레이가 똑 사탕 맹키로 굵다.”

나무실 할머니는 밭가에 즐비한 달래를 캐기 시작한다. 자영은 ‘달롱개’라고 읊조려본다. 달래라는 말보다 달롱개라는 어감이 더 감칠맛 난다. 하얀 달래 뿌리가 정말 통통하고 굵다. 엊그제 남자가 한 뭉텅이 안고 온 것도 저렇게 파 내버린 것을 주워온 것은 아닐까. 달래 캐 왔다고 좋아했었다. 달래 부침개도 굽고, 달래 된장국도 끓여 신나게 밥을 말아먹었었다. 아직 한 봉지나 냉장고에 들어 있다. 저걸 가져다가 다듬어서 도시 친구에게 보내 줄까. 무공해라 도시에서는 귀한 것이니 좋아할까. 논이고 밭이고, 산이고, 들이고 눈여겨보면 약초 아닌 것이 없고, 먹지 못하는 풀이 별로 없다. 흔한 것도 캐내어 씻고 잘 다듬어 근사하게 포장해서 큰 대형 식품점이나 상가에 내놓으면 귀한 것이 되는 세상이다.

“아예 달롱개 밭을 만들지 그러세요? 일부러 심어서 거름 줘가며 키워 내다 파는 세상인데. 무공해 자연산이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습니까. 달롱개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참 통통하고 좋아 보여요. 내버리지 마시고 오일장에 내다 팔아보세요.”

“임자가 가지고 갈라요. 인자 세서 묵것나 마는.”

“저는 집에 많이 있어요. 회관에 가지고 가서 부침개 구워 드시든지. 아직 부드럽잖아요.”

자영은 달래가 욕심났지만 다듬을 일이 귀찮아서 손사래를 쳤다. 누가 대신 다듬어준다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 챙겼을 것이다. 요즘 젊은 여자들이 그렇다. 너도나도 웰빙, 웰빙 하면서도 웰빙이 순우리말로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웰빙을 순우리말로 참살이라 하자 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참살이, 참 예쁜 우리말 아닌가. 웰빙이란 말보다 참살이란 말을 많이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참살이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 여자들 심사가 요상타. 입으로는 참살이니 신토불이니 하면서도,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좋니 어쩌니, 하면서도 막상 살 때는 재래시장 난전에 펴 놓고 파는 구질구질한 찬거리보다 대형 마트 식품점에 한 끼분으로 다듬어져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선호한다. 국산인지 중국산인지 살피는 주부도 드물다. 무조건 눈에 좋아 보이고 깔끔해 보이고 맛나 보이고, 집에 가서 손이 덜 가는 것이 잘 팔린다고 한다.

달래처럼 시골에서는 누구나 손발만 부지런하면 흔해 빠진 것도 도시 사람에겐 돈이 없으면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이 된다. 또한 식품점이나 대형 마트에 깔끔하게 포장해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생이기보다 거름 내고 비료 내 재배한 것들이기 십상이다. 재배한 것과 야생은 영양가나 맛과 향에서 단연 차이가 나는데도 우선은 먹기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하게 되는 게 여자의 심리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나무실 할머니는 밭두둑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호미질을 하는데 자영은 마늘종 뽑은 것을 옆구리에 끼고 방울토마토 세 포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마늘밭을 벗어났다. 어쩐지 뒤통수가 가렵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마음이 온통 나무실 할머니에게 몰려간다. 나무실 할머니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좀 도와주고 가지’하면서. 또한 달래는 욕심났지만 다듬기 귀찮아서 손사래 친 것이 자꾸 걸린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되는데. 눈은 게을러도 손이 부지런하니 산다는 게 사람인데. 눈도 손도 모두 게으른 여자 같아서 양심에 찔린다. 또한 밭두둑에 그대로 버려져 시들어 갈 달래 뭉치도 걸린다.


우스개겠지만 도시 젊은 여자 중에 이런 여자도 있단다. 시골 시어머니가 열심히 나물거리며, 반찬거리를 뜯어 봉지, 봉지 싸서 보내면 구질구질하고 더럽다고 받아서 다용도실이나 베란다에 던져 놨다가 시들어지면 쓰레기통에 넣어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어머니, 보내주신 반찬거리 참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인사라도 하면 싹수 있는 며느리라지 않는가.

자영은 자신이 준 것도 그렇게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점검해 본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텃밭의 푸성귀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면 ‘좀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하면서 서슴지 않고 한 봉지 뽑아 주기 잘하고, 반찬 맛있다면 듬뿍 퍼 담아 주기 잘하질 않는가. 돈으로 치면 별것도 아닌데도 퍼 주는 맛에 산다고나 할까. 그런 그녀를 보고 한심해 죽겠다는 사람이 남자다.

“당신이란 여자 참 단순 무식해서 좋겠소. 꼭 똥인지 된장인지 맛을 봐야 아남. 그딴 것 주고 욕먹는다고 억지로 줄 생각 말라니까.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 세 살짜리 어린애도 당신보다는 나을 거요.”

남자가 꾸지람을 바가지로 하건 말건 자영은 별 생각이 없다. 스스로 ‘그래, 나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유치해서 상대할 사람이 없는 그런 여자야. 뭐 어때. 그게 난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게 짐이 되어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법을 터득해 버린 탓인지 모르겠다.

왜 자신을 그렇게까지 비하하냐 하면 단순 무식 하다는 것이 결코 나쁜 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단순할수록 행복 지수가 높다지 않는가. 자영은 자신이 단순 무식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사실을 안다. 영리하고 싶지 않다. 세상은 재능 있고 영특한 사람들로 넘쳐 나기 때문에 자신은 자연처럼 그러려니 하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자연처럼, 자연에 길들어 사는 법을 배우면 생각 자체가 없어진다.

자영은 동구 밖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느티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아랫동네 월남 새댁이 아닌가. 가만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랫동네에서 울 곳을 찾아 윗동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로 나온 것일까. 그녀에게 다가가 볼까 말까 망설이다 에라 어깨라도 두드려주자 싶어 새댁이 웅크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월남 새댁이 음식도 만들 줄 모르고, 무척이나 게으른 데다 무뚝뚝하기도 해서 시어머니 되는 상골 할머니가 날마다 속 터져 죽겠다고 한다지 아마.

“저거 건사하다가는 내 복장이 먼저 터져 죽것다. 말이라도 통해야지. 언성이라도 높이면 질질 짜는 거는 선수 제. 눈치코치도 없으니 이건 며누리가 아니고 상전이다. 상전도 저런 애물단지 상전은 없는 기라. 아이고, 죽을 날이 가찹은 내가 이 무신 팔자고 말이다. 저걸 우찌 사람 맹글어 살꼬. 아무리 생각해도 명답이 없는 기라. 저 너메 처니는 사근사근하고 영리해서 금세 말을 배운다 쿠더이. 우리 집 저거는 말 배울 생각도 않는 기라.”

동네 회관에만 나오면 속 풀이를 시원하게 하는 상골 할머니 덕에 삼이웃 할머니 모두 모여 심심치는 않았다.

“아요, 아들캉 그거는 하는 기가? 떡뚜꺼비 겉은 손자나 쑥 내질러 주모 니가 금세 우리 며누리 함서 좋아할 낀데. 안 그렇나? 그 아는 니가 받아 키우모 한국 말 할 거 아니가 말이다.”

“그라네도 아만 맹글라 하는데. 아가 안 되는 기라. 너무 얼라라서 그런가 잘 안 되는 갑더라. 밤 되모 우습다 안 하다. 우리 아는 할라쿠고, 저거는 무섭다고 징징 움서 도망 댕기고, 난중에는 죽는다고 소리를 내지르고 그라니마. 참 살다 살다 별 넘세스런 꼴 다 본다 카이.”

그러다가 문리 트이고, 살 궁합 맞추는 법 배우면서 정드는 게 부부 아닐까. 집집마다 사연 없는 집 없듯이 사람살이 자체가 소설이니 말이다.

“힘들죠? 그래도 울지 마요.”

자영은 새댁에게 다가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늘종을 땅바닥에 놓고 새댁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자영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눈매도 웃음도 참 선했다. 어쩌다가 부모 형제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멀고 먼 나라 한갓진 곳으로 시집이라고 와서 울고 있는지. 가슴이 싸하니 아팠다.

자영은 새댁의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울지 말고 씩씩하게 살라고 손짓 발짓으로 힘을 보태주자 새댁도 배시시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댁이 자신의 집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영은 그니의 집을 향해 걸었다.

골목길은 온통 시멘트 포장이다. 벽도 바닥도, 예전에는 예쁜 돌담이었다. 돌꽃과 이끼가 곱게 핀 묵은 돌담을 헐어내고 시멘트 벽돌을 쌓고, 시멘트 포장을 할 때 자영은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의 능력이 서글펐다. 저 예쁜 돌담을 왜 허무냐고, 구렁이도 살고, 쥐와 지네, 다람쥐도 사는 참 인간적인 돌담인데, 살아있는 골동품인데 왜 허물어버리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시골 노인들이 국가에서 내주는 돈으로 새 길 낸다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지 않는가.


자영은 손에 든 토마토 세 포기가 자꾸 무거워진다. 그니의 집으로 가는 골목을 들어서며 왜 자신이 이래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자영을 자꾸 그니와 엮으려 드는 것일까. 둘이 잘 지내라는 뜻이겠지만 못 지내지도 않는데 말이다. 형우! 자영은 가만히 택호 대신 쓰는 아이 이름을 떠올려 보며 생각한다.

‘그니와 나, 조강지처와 첩실이다. 누가 조강지처고, 누가 첩실일까. 그니의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었으니 내가 첩실일까. 그니는 내 남자의 여자였지만 내 남자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갔다 다시 왔으니 그니가 첩실일까. 남의 입질에 오르내리는 관곈데도 어느새 동네 사람으로부터 그러려니 인정받고 사니 참 이상해. 그렇게 길들어 산지 벌써 십 년 아닌가.’

자영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골목을 돌고 돌아 시댁으로 갔다. 솔직히 시댁이 아니라 그니의 집이다. 더 솔직히 그니의 집이 아니라 남자의 집이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남자에게 물려준 남자의 안태본이다. 자영이 남자 따라 들어가 산 집도 그 집인데 이제 남자의 집이지만 자영의 집은 아니다. 당연히 자영의 집도 되겠지만 이제 그니의 집이다. 그니의 말처럼 처음부터 그 집은 남자와 그니의 집이었다. 맞는 것일까. 자영은 가끔 자신이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변의 모든 정황이 연극 같다. 연극의 결말은 희극 내지는 비극인데 그니와 자영은 어떤 결말이 날까.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어우러져 사는 인생, 통속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녀, 자영은 자신이 어쩌다 통속 소설 속 주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소설은 아직 진행 중이다.

자영은 소설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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