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황소 개구리 다 죽었다. <끝>
..... 나도 가볍게 응수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여자가 낯선 외간남자랑 마주쳤다고 무서워할 것도 없다. 남자의 말처럼 그저 바닷가에 놀러 왔다가 밤바다가 좋아서 거닐다가 대화상대를 만났으니 그것도 괜찮다. 인과관계는 별 게 아니다. 이런저런 등굽잇길을 지나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만남은 어떤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만나게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농담 몇 마디 주고받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어쩌면 짧은 만남에서 인생의 진리 한 줄 카피라이터처럼 반짝 켜질 수도 있는 일이다.
“낯선 남자라....... 괜찮네요.”
남자가 웃었다.
“아이러브펜션 106호죠? 저물녘에 오셨죠? 일행이 여남 명 되는 것 같던데. 나는 그 옆 동 103호에 들었어요. 같이 오신 분들이 아주 활기가 넘치데요. 부부 동반인가요?” “예.”
“그렇군요. 남편 분이 질투하겠는데요. 본의 아니게 그쪽이 큰길로 나가는 것을 봤어요. 그렇다고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다더니 그쪽이 그 짝 같은데요?”
“하하, 그러네요. 나도 밤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죠.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겁나는데요.”
나는 큭 소리 내 웃었다. 남자도 웃었다. 그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낯익다.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처럼 아스라한 무언가가 있다. 나는 묻고 싶다. 혹시 ‘박준만 씨 아세요?’라고. 나의 잠재의식 속에 깃든 뭔가를 흔드는 종, 땡땡 땡그랑땡그랑, 초등학교 현관에 달렸던 시커멓게 색이 죽어 육중하던 종,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가 주춤거리는 사이 남자가 나 옆에 와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남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가로수 그림자가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다. 누가 봤으면 꼭 밤마실 나온 부부나 연인인 줄 알게다. 나는 다시 박준만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신 이렇게 물었다.
“황소개구리 봤어요?”
“황소개구리? 실물은 본 적이 없어요. 외래종 황소개구리가 들어오는 바람에 토종개구리 씨가 마른다는 뉴스를 들은 적은 있지요. 사진도 봤고요.”
“저 소리 들리세요?”
그제야 남자는 ‘진짜 황소가 우는 소리 같네.’ 하면서 신기해했다. 참 자연스럽다. 나는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의외로 낯선 남자가 참 자연스럽다. 낯선 곳이라서 그런가. 낯선 남자를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당당함인지 모르겠지만 단 하룻밤 이웃으로 살다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갈 남자, 나는 그의 출현이 괜히 고맙다. 이것도 나이 탓인가. 신선할 것도 없는 한물 간 중년 여자, 여자라기보다 그냥 중성 같아진 이미지의 여자라 그런가. 나는 내 속에 빠져 가만히 어둠 속 갯벌을 응시했다.
남자는 침묵이 부담스러운지 먼저 운을 뗐다.
“여기, 차암 좋네요. 낮에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한 어촌이라 소문과 달리 별 흥미를 못 느꼈는데 갯벌은 바라볼수록 뭔가 차오르는 것이 있더군요. 뭐랄까. 아주 신비한 느낌이 듭니다. 슬로 시티란 말이 절로 떠올라요.”
“시골 동네는 어디나 비슷하죠. 근데 이 섬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저 황소개구리가 울어서 그런지, 저 갯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갯벌이 처음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길고 넓은 갯벌은 처음입니다. 갯벌 곁에서 황소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신기하고요.”
“난 여태 황소개구리가 저리 우는 줄도 몰랐습니다.”
“창문만 열면 계속 들렸는데도 모르셨어요?”
“네, 진짜 못 들었어요. 신기하네요. 황소 우는 소리가 저랬던가? 내 귀에는 꾸와앙 꾸와앙. 꾸아리, 꾸아리, 하는 것 같은데. 엉큼한 남자가 여자 꼬일 때 내는 은근짜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하하.”
“말 되네요. 남자도 은근짜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요.”
“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친구 됐나요?”
남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친구란 말에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친구란 단어가 참으로 친숙하고 좋다. 친구,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아온 단어를 다시 찾은 그런 느낌이랄까. 박준만,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 그랬다. ‘차암 좋다. 우리 친구 하자. 친구 하다 연애도 하고.’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 사연은 평범하다 못해 별 볼 일 없는 신파다.
“친구 좋네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성명합시다.”
“별로 안 하고 싶은데요.”
“그럼 말고.”
남자는 의외로 쌈박하다. 나는 다시 어두운 갯벌을 바라봤다. 바닷물은 보이지 않는데 물결치는 소리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의자 아래로 두 다리를 건들거리며 눈은 갯벌에 고정시켰다. 남자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침묵이 길어지니까 어색한 모양이다.
“물어봐도 됩니까?”
“그러세요.”
“짱둥어 봤어요?”
“네.”
“뭐 같았어요?”
“우주에서 불시착한 외계인요.”
“예? 발상의 전환이군요.”
나와 남자는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말입니다. 바다에만 오면 아련한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안갯속에 가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고, 뭔가 보일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작은 여자애의 실루엣이 떠올려요. 아주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여자애죠. 분명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알던 여자애가 잊어지지 않는다는 정도죠. 그 여자애랑 외갓집 골목에서 구슬치기도 하고, 사방치기, 깔래도 한 기억이 나는데. 그것조차 이젠 아리송해요. 아주머니를 보니 갑자기 그 여자애가 생각나네요. 단지 그 애가 외계인 이티를 좋아했던 것은 알아요.”
나는 현기증이 왔다. 어느 별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 덩이에 정수리를 사정없이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면 하나를 씌우듯 천천히 남자 쪽을 쳐다봤다. 불빛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낯설었다. 착각일 게야. 나는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어린 기억은 늘 불확실하죠. 블랙홀 같은 거니까.”
“그렇군요. 블랙홀이라....... 빨려 들면 뼈도 못 찾겠지요?”
“저기가 버뮤다 삼각지 일 수도 있어요. 기억을 함몰시킬 수 있는 늪일 수도.”
나는 멀리 아스라한 어둠을 가리켰다. 아련하게 들리는 파도소리는 거기가 바다라고 알려주었다.
“저기까지 걸어볼래요? 짱둥어 다리라는 곳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다시 황소개구리가 성가시게 울기 시작했다. 마치 나더러 거기 서 있으라고 붙드는 것처럼 합창을 해 댔다.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황소개구리 따위 무섭지 않아.
“저 개구리들이 꼭 성난 수소, 경상도 사투리로 부럭데기라고 하던가. 황소 우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성난 부럭데기 요?”
“것도 몰라요? 짝짓기 온 암소를 보고 수소가 뒷다리를 껑충거리며 좋아서 다가갔다가 암소의 뒷발질에 신나게 채여서 벌렁 자빠지며 끼이잉! 내는 소리요. 콧잔등이 벌겋게 피멍이 든 황소가 비비적거리며 일어서면서도 입천장을 뒤집고 침을 질질 흘리며 내는 소리 같지 않아요?”
나는 깔깔 웃었다. 남자는 입천장을 뒤집고 고개를 쭉 빼서 황소 흉내를 내며 더 장난스럽게 움무우 움무우 했다.
“상 난 부럭데기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럼요. 나는 서울 토박인데 외갓집이 지리산 자락에 있었어요. 덕산이라고. 방학만 하면 외갓집에 갔었지요. 외갓집 마구간에는 누렁이라는 황소 한 마리가 있었어요. 그 황소가 그 동네 암소들의 종자 노릇을 했어요. 암소가 짝짓기 철이 되어 울면 암소 주인이 외갓집에 데리고 왔어요. 외갓집 사랑채 뒤에 너른 타작마당이 있었는데 타작마당에는 실한 쇠말뚝이 박혀 있었어요. 암소를 거기 매 놓고 할아버지는 외갓집 누렁이를 몰고 갔어요. 고삐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누렁이는 두 발을 치켜들면서 성화를 댔지요. 아이들은 곁에 오지도 못하게 했지요. 나는 호기심이 많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외갓집 사랑채에는 잡동사니를 챙겨두는 골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 들어가면 타작마당 쪽으로 난 봉창이 하나 있었어요. 봉창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구경했어요.”
“올됐네요.”
“그런 셈이죠. 그 여자애도 이웃에 살았어요. 이름이 무슨 청이라 했는데. 늘 갈래머리를 쫑쫑 땋아 늘어뜨린 애, 성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외할머니가 그랬어요. ‘청이’ 고 가시나가 참 맹랑하다고. 사내 여럿 잡을 애라고. 그날도 그 애는 슬그머니 거기 숨어들었어요. 우리는 서로 못 본 척하며 각자 봉창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황소와 암소가 흘레붙는 것을 지켜봤어요. 침을 꼴깍꼴깍 넘기면서. 부럭데기의 거시기가 얼마나 큰지 당신은 본 적 있어요?”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갯벌로 눈길을 주었다.
“듣고 있어요? 내 이야기가 재미없죠?”
“재밌어요. 계속하세요.”
“누렁이가 헐떡거리며 암소의 등에 올라타기를 거듭했어요. 길고 커다란 붉은 살덩이가 빳빳하게 서서 암소의 엉덩이를 자꾸 찔렀지요. 동네 아저씨는 암소의 고삐를 쇠말뚝에 묶어놓고 코뚜레를 야무지게 잡고, 할아버지는 황소의 고삐를 잡고 암소의 엉덩이에 올라타기 좋도록 끌어당기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했어요. 암소의 꼬리도 잡아 들어주기도 하고요. 암소는 뒷발질도 하고, 고함도 지르면서 궁둥이를 요리조리 피해요. 쉽게 곁을 안 주려고 실랑이를 해요. 그냥 대 주면 될 텐데. 암튼 여자나 짐승이나 암 컷들이란.”
“뒷말은 안 들은 걸로 하죠.”
“아이쿠, 본성이 나왔네요. 뭐. 근데요. 절정은 여기부텁니다. 황소가 암소의 샅에 거시기를 푹 꽂고 좋아서 입천장을 뒤집으며 침을 질질 흘리자 여자애가 슬쩍 내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기데요. 나는 얼결에 그 애를 껴안았지요. 그 애는 나에게 쪽 입을 맞추데요. 아, 그 순간이라니. 다리에 힘이 쫙 풀리데요. 나는 그 애를 고소할 수도 있어요. 내 순결을 뺏었다고. 요즘 같으면 울 엄니께 일러 성추행 범으로 몰았을 텐데. 알죠? 요즘은 여자도 남자에게 강간범으로 고소당하는 세상이란 걸요. 남자들이 자꾸 쪼다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때 나처럼. 완전 쪼다였죠. 흐흐.”
남자는 괴상하게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기분 어땠어요?”
“기분이 어땠냐고요? 아주 기막혔죠. 짜릿하고 촉촉했던 입술 감촉에 몇 날 며칠 잠을 설쳤으니까. 그 사건 후 골목에서 마주쳐도 그 애는 나를 못 본 척하데요. 집에 가야 하는데도 방학 내내 외갓집에 죽친 이유가 그 애 때문인 줄 어찌 알겠어요. 참 바보 같죠? 요즘 애들 같으면 안 그랬을 텐데. 이렇게 말문이라도 틔어봤을 텐데. 늘 짠해요. 그 애가.”
“그것으로 끝이에요?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가끔요. 이루지 못한 사랑이 오래간다 하잖아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울 때 있어요. 지금은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모를 게 빤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요. 근데 세월 탓인지 이제 그 애 얼굴이 생각 안 나요.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그 뒤 한 번도 그녀 소식을 못 들었어요?”
“그런 셈이죠.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그해 겨울방학 때는 외갓집을 못 갔어요. 우리 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시험을 쳐서 갔거든요. 우리 엄마가 열성파라 나도 입시준비를 했어요.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 애도 중학생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전체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참 예뻤던 것 같아요. 중학생이 되어 방학을 하자마자 혼자 기차를 탔어요. 진주 역에 내려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갓집에 갔어요. 그렇지만 실망했지요.”
“왜요?”
“외할머니 말에 의하면 그 애 네가 도시로 이사를 갔다고 해요. 마산인가 부산으로. 그 애는 중학교도 못 가고 부잣집 식모살이로 들어갔다고도 하고. 그다음 해 외갓집이 서울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덕산은 그냥 꿈의 고향이 되었죠. 그 여자애와 함께 추억으로 묻힌 거죠. 산다는 것은 추억을 줍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늘 그 애가 그리워요. 잘 살겠지. 한 번만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낮에 펜션 앞에서 일행과 지나가는 님을 봤을 때 희한하게 그 여자애가 떠올랐어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냥 떠올랐어요.”
“그래서 저를 따라왔어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남자는 다리를 흔들흔들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추억이겠지요.”
“그러게요. 이번에는 님의 첫사랑 이야기 해 봐요. 들을 준비 됐으니.”
나는 피식 웃었다.
“없어요. 저는 그냥 평범한 촌부죠. 황소개구리 따라 집 나간 사내를 기다리며 사는 여자죠. 이렇게 말하면 뭔가 흥미진진하죠? 어두워도 번쩍거리는 눈빛 보여요. 호기심 갖지 마세요. 별 것 아니니까. 증도라는 작은 섬이 이상하게 사람을 느긋하게 하네요. 벌써 짱둥어 다리네요. 저 다리만 건너갔다가 돌아가죠. 각자 일행들이 기다릴 테니까요.”
“듣고 싶습니다.”
“뭘요?”
“황소개구리를 따라 집 나간 남자의 사연을요.”
나는 대답을 않고 짱둥어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남자도 나를 따라 걸었다. 짱뚱어 다리 중간에 젊은 남녀가 껴안고 있었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달콤하고 황홀했던 첫 키스의 짜릿함, 그래, 부잣집 귀한 도련님을 가슴에 품은 죄가 뜨거워 황소개구리에게 끌려 골방에 갇혔던가. 초등학교를 졸업도 못하고 우리 가족은 도시의 빈민이 되었었다. 부산의 달동네 무허가 판자촌에 자리를 틀었다. 아버지는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엄마는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나는 운 좋게 버스운송 회사 사장 집에서 식모살이를 할 수 있었다. 아니, 팔려갔다.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그나마 부잣집 식모살이는 할만했다. 대학생 언니 덕에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전기든, 뭐든지 잡히는 대로 읽어냈다. 기생오라비 같았던 서울 소년에게 걸맞은 상대가 되고 싶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채를 썼다는 것이다. 엄마는 잠적했다. 두 동생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사채업자 황소개구리에게 잡혀 골방에 갇혔다. 성 노리개가 되었지만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정식으로 면사포도 씌워 주겠다고 했다. 그런대로 신혼 재미에 빠져들 즈음이다. 어깨가 떡 벌어진 두 남자와 골방에 들어선 여자는 두 남자에게 나를 따끔하게 벌주라 했다. 나는 임신 중이었다. 벌거벗겼다. 여자는 두 남자가 나를 유린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절대로 애를 낳지 못해. 어린것이 벌써부터 남의 남자 꼬여내 첩 살림을 차려.’ 나는 까무러쳤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황소개구리는 사색이 되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자궁은 난도질당했다. 그날부터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소개구리에게 잡혀 골방에 갇히면 북어가 되었다.
“너는 내 손에서 못 벗어나. 도망쳤다 잡히면 너는 죽은 목숨이야.”
그래도 나는 도망을 쳐야 했다. 끝없이 불안과 싸우며 도망치고 또 도망치면서 나는 아팠다. 너무 아파서 손목을 긋기도 하고, 삭발을 하기도 했다. 내 안에 고여 있던 서울 소년은 시나브로 잊어졌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살아야 했고, 사랑받아야 마땅했다. 사랑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 잡혀 진짜 사랑의 실체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내게 얼마나 그가 소중한 존잰지 알게 되고, 내게 소중한 것은 지나가버린 세월이 아니라 현재 내가 차지하고 앉은 이 자리, 그가 참 사랑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요?”
남자가 살며시 다가와 나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고생 모르고 자란 남자의 손, 여자 손처럼 부드러운 손에 나는 자신의 거칠고 억센 손을 잡힌 채 걸었다. 그 여자애, 식모살이하다 골방에 갇혔던 그 여자 애,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쳐야 했던 여자, 아련한 첫사랑,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고 싶다고 소망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던 여자애, 그 여자 애가 훔쳤던 기생오라비 같이 잘 생겼던 서울 남자애의 입술, 그 입술의 감촉에 목말라하며 살던 여자애가 생각났다.
다시 황소개구리가 운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십 대는 미적지근한 그리움이 교차하는 시기라면 이십 대는 화끈한 불꽃같은 시기여야 한다는 것을, 청춘, 간담을 서늘해지거나 전율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이십 대의 나를 생각했다. 황소개구리, 그 남자와 동거하면서 사흘들이 피멍이 들어야 했던 나, 석녀가 되어버린 나, 겨우 황소개구리 남자를 피해 나왔지만 여전히 방직공장에서 가발을 짜고, 길바닥에서 채소를 팔고, 술집 아가씨로, 노래방 도우미로 밑바닥 생활을 하며 떠돌아야 했던 나, 나를 건져 올려 준 그의 곁에서도 불안하기만 했던 나, 언젠가는 깨어져버릴 것 같은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것 같았던 나, 갑자기 나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걷혔다. 황소개구리를 잡다가 황소개구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 남자, 박준만, 그가 애타게 보고 싶다.
나는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돌아섰다. 남자는 여전히 내손을 꼭 잡고 진짜 젊은 연인처럼 천천히 걸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처럼 긴 다리를 천천히 건너왔다. 멀리서 파도가 갯벌을 철썩철썩 때리고 갔다. 우웡우웡, 움무우 움무우, 황소개구리가 다시 울기 시작했지만 이제 그 소리는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나는 남자의 손을 놓았다. 남자는 나의 손을 놓치기 싫다는 듯이 다시 붙잡고 나를 남자의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나는 남자의 너른 가슴에 안겼다. 남자의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 남자애 가슴도 이렇게 뛰었었지. 용광로처럼. 남자는 천천히 나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술을 댔다. 미적지근한 그리움이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했던 그 남자애의 입술은 아니었다. 순간 황소개구리울음이 사라졌다. 거기 족대를 든 남자가 주먹을 흔들고 있다. 너 죽을래?
그렇다. 과거는 흘러가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현재만이 있다. 현재 나는 증도에 있고, 낯선 남자랑 과거 속을 걸었지만 현재 나는 박준만 그 남자의 손안에 있다. 그래,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빛나는 법이다. 나는 천천히 남자의 가슴을 밀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증도란 섬이 사람의 혼을 후리네요.”
“어쩐지 이 밤을 그냥 보내기 싫습니다.”
“그 여자애도 그때 당신이 손을 꼭 잡고 끌어당겨주길 간절히 바랐겠지요.”
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마침 손전화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언니 어디야? 방에 있는 줄 알고 모시러 갔더니 없잖아. 도대체 이 밤에 혼자 청성 떨며 어디 간 거야? 모두 언니 찾아 난리야. 술 취한 남정네들이 더 난리네. 빨리 와라.”
민경의 목소리가 대포를 쏘는 소리 같다. 남자도 나도 빙긋 웃었다.
“응, 지금 가는 중이야. 황소개구리가 날 유혹하데. 그래서 따라 나왔더니 별 볼일 없네.”
“황소개구리? 언니, 간도 크다. 누가 보쌈하면 어쩌려고 그래?”
“보쌈, 좋지. 증도에서 보쌈당하면 네가 우리 박준만 씨에게 알려줘. 나 찾으러 오라고.”
“아참, 언니 준만이 아저씨가 전화했었어. 폰으로 해도 안 받는다고. 폰 전화 바꿨다고 새 번호 알려 줬는데 전화 안 했어? 여기로 오는 중이라던데.”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남자의 손을 잡았다. ‘즐거웠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앞서 갔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안개를 봤다. 내 고향 지리산 자락, 덕산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안갯속에 사라졌다. 안개는 소리 소문 없이 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어 아름다운 것이고 그리운 것인지. 찰나, 귓가를 스치는 우렁찬 목소리 ‘니는 마, 부처님 손아귀에 잡힌 손오공이야. 지달려라. 내가 간다.’ 증도, 황소개구리 다 죽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