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보도연맹의 정확한 이름은 국민 보도연맹이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후 격동기에 좌익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만든 것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자의도 있지만 타의에 의한 것도 많았다.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시국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입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렸다가 억울하게 즉결처분된 사람들도 많았다. 아이, 임신부, 노인, 모두가 대상이었다. 군인과 경찰은 군용 트럭에 그들을 싣고 와서 깊은 골 인적 없는 곳에 구덩이를 파게 해 놓고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이상입니다.”
지윤도 기억난다.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들었던 소문이다. 지리산둘레는 노인들의 입을 통해 안개처럼 무성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모두 쉬쉬하면서 입 열기를 두려워했다. 자칫 빨갱이로 몰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몰살당한다는 소문이었다. 골로 간다거나 물귀신 된다는 말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라는 일설이 있다. 전국 어느 곳이나 아픈 역사의 현장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지리산 둘레는 마지막 빨치산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어느 동네나 아픈 가족사가 있다. 연좌제에 걸려 자식들 앞길이 막힌 집이 한두 집이 아니다. 아버지도 피해자다. 거기에 구월구일은 특별한 날이다.
음력 구월구일은 양수가 겹친 기일이라 하여 중양절이라고 한다. 그날 밤 싸릿골은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산사람을 따라갔거나 실종된 가족이지만 대 놓고 이름도 부를 수 없는, 침통한 기운이 마을의 공기조차 오염시키는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동네 아이들도 조용했다. 타작마당에 함께 모여 자치기도 할 수 없었고, 전쟁놀이도 할 수 없었다. 어른들의 침통한 기운이 아이들에게도 전가되었다. 지윤도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날은 큰아버지 제삿날이다. 싸릿골 뒷산을 아홉산이라 부른다. 아홉산 너머 지리산 천왕봉이 빠끔히 내려다본다. 아홉산에서 흘러내리는 긴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를 싸리골짜기라 했다. 싸릿골은 골짜기가 깊고 물이 넉넉하다. 그 물 덕에 골짝 양 옆으로 손바닥만 한 다랑이가 줄지어 있었다. 골짝은 봄이면 하얀 싸리 꽃과 붉은 명자 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흰빛과 붉은빛이 어찌나 탐스럽던지 황홀했다. 새하얀 꽃무더기가 골짝 양옆으로 무성하게 흘러내려 동네 옆의 논두렁까지 점령했다. 유난히도 탐스럽게 피었던 싸리꽃, 그 틈새에 핀 선홍색 명자꽃은 핏빛 같았다. 할머니는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혼백이 깃든 꽃, 저승꽃이라 했다. 싸릿골의 지명은 죽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싸릿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마도 육이오 전쟁 이후라고 했다.
할머니는 어린 지윤에게 골짝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어쩌다 친구들과 어울려 싸리꽃을 꺾어오거나 가재를 잡아오면 할머니께 혼이 났다. 가재는 도랑에 버리고 회초리 맛만 된통 봤다. 육이오 때 억울하게 죽은 육신을 먹고 자란 가재요. 그 영혼들이 구천을 헤매다 맺혀 피는 꽃이 싸리꽃이요. 저승사자가 깃든 꽃이 명자꽃이라 했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은 어린애를 좋아한다고 했다. 귀신에게 홀려버린 아이는 미쳐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지만 거긴 보물창고였다. 모래를 뒤적이면 탄피나 수류탄이 흔하게 나왔다. 엿을 바꿔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예닐곱 살 때였다. 그날 지윤은 단짝 친구 석구를 따라 골짜기에 들어갔다. 석구와 지윤은 깡통에 녹 쓴 탄피를 주워 담았다. 두 아이는 달달한 엿과 바꿔 먹을 생각에 신바람이 났다. ‘우리 딱지 내기 하자. 이거 캐면 터질까? 안 터질까?’ 석구는 탄피 중 녹이 덜 쓴 것을 꺼내 들어 보였다.
“안 돼. 우리 할매가 터지면 다친다고 했어. 하지 마. 고마 가자.”
말렸는데도 석구는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괜한타. 이건 터진 기다. 암시랑토 않다.”
석구는 납작한 돌 위에 탄피를 올리고 주먹만 한 돌을 들었다.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지윤은 덜컥 겁이 났다. 동네 쪽으로 달려갔다. ‘겁쟁이’ 석구의 목소리가 꽝! 폭발음에 묻혔다. 그 사고로 석구는 오른손 엄지와 금지 두 손가락을 잃었다. 석구가 가장 억울해한 것은 현역으로 군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윤이 군대에 가는 날도 제대를 하고 온 날도 석구는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결국 석구는 사십을 못 넘기고 죽었다. 군대 가기 싫어 온갖 방법을 연구하는 요즘 청년들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지. 비관은 왜 하냐. 군대 가는 자식들이 어리석지.’라고 하지 않을까.
“당신은 작은방에서 혼자 자야 할 것 같아. 나는 할머니 옆에서 자고 싶어. 오늘밤만은. 그래도 될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러십시오. 할머님도 아버님도 혼잔데 어쩔 수 없지요. 귀한 당신은 할머니 차지.”
아내를 꼭 안아주었다. 하늘 가운데 북두칠성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저 별들 중에 엄마별도 있겠지. 엄마의 제사 파짓날이 생일인 아내는 늘 엄마를 위해 손수 만든 음식을 생일날 아침에도 먹었다. 지윤이 끓여주는 미역국에 찰밥만 다를 뿐. 그것도 감지덕지하는 아내였다.
지윤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야야, 아침 묵자.’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어 ‘아이, 어쩜 좋아. 아버님 좀 깨워주시지 그러셨어요? 너무 해요.’ 아내의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지윤은 기지개를 켰다. 눈을 뜨자 지윤을 지긋이 바라보고 계신 할머니의 눈과 딱 마주쳤다. 오도카니 앉은 할머니는 언제부터 지윤 옆에 있었을까. 지윤은 싱긋 웃었다. 밤새도록 잠 못 들어 뒤척였는데도 기분이 상쾌했다. 기지개를 쭉 펴고 할머니 손을 덥석 잡았다. 할머님이 웃었다. 소녀 같다. 지윤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셨다.
“밥 묵자. 민이에미가 늦잠 잔 기 아니고 너거 애비가 새복 잠이 없니라. 애기는 집에 두고 너거 애비랑 오데 좀 댕기 온나. 길은 애비가 잘 안다.”
지윤은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아버지와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지윤에게 배낭을 내밀었다. 배낭은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묵직했다. 배낭 밖으로 쑥 나온 것은 두 개의 몽둥이다. 낫자루 같았다. 승용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동네를 벗어나 들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 옆으로 크고 작은 다랑이의 흔적이 묵정이로 남아 있었다. 경지정리도 안 된 곳이었다. 묵정이가 된 다랑이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골짝 주변은 온통 대나무만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예전에는 싸릿대만 무성했던 곳인데 언제부터 대나무가 뿌리를 뻗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대나무 밭을 지나자 고향집이 아슴아슴 보였다. 어려서는 그렇게 넓고 깊게만 보이던 골짜기가 작은 실개천으로 변해 있었고 주변에 쌓였던 돌담도 어찌나 낮은지. 기어오르기도 힘들어 끙끙 대던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물소리가 제법 굵게 들렸다. 다랑이가 끝나고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에는 나무 서너 개를 묶어 걸쳐둔 다리가 나왔다. 낡아서 금세 부서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다리 앞에 서서 능선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지윤도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아버지의 눈길을 따라 골짝 위를 바라봤다. 안개가 살짝 감산 산 중턱에 시커먼 너럭바위가 내려다봤다.
“아하, 저기 기억나요. 폭포가 있었는데. 그 옆에 작은 암자도 있었고. 지금도 절이 있어요? 제가 예닐곱 살 때였든가. 친구들과 저 폭포에 갔었어요. 그날 할머니께 매 타작 엄청 당했지요. 앞으로 또 거기 가면 할머니 얼굴 다시는 못 볼 줄 알라고. 한 주전자나 잡아온 가재를 몽땅 도랑에 갖다 부어버리시고.”
무섭게 화를 내던 할머니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 없어졌지. 불이 났어. 원인도 모르고. 절을 지키던 노인은 불과 함께 탔지.”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희어 보였다. 등도 구부정해졌다. 지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서글픔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울컥 토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아버지 좀 쉬었다 가시죠.”
“아니다. 이 다리만 건너면 앞이 확 뚫린 곳이 나온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나무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한참 올라갔다. 갑자기 시야가 훤해졌다. 능선에 오른 것이다. 싸릿골 반대편 능선 아래는 펑퍼짐한 언덕이 펼쳐졌고 산비탈 아래 풀이 무성하지만 둥그스름한 둔덕이 보였다. 무덤 같았다. 나직하지만 넓게 펼쳐진 무덤 예닐곱 기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 커다란 상수리나무 몇 그루가 산을 등지고 우뚝 서 있었다. 상수리나무와 나무사이에 플래카드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언덕 아래를 살펴보자 이웃 동네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길이 쭉 뻗어 보였다.
“가자.”
아버지는 능선을 따라 난 길을 버리고 플래카드가 붙은 언덕 쪽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어깨가 더 쳐지고 굽어 보였다. 지윤도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플래카드에는 <이곳은 싸릿골 양민학살 현장입니다.> 적혀 있었다. 그 옆의 표지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원조회 사건 이후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비극의 역사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웃집 외팔이 아저씨는 ‘너희 학교 통시 칸에는 귀신이 나온다. 우리가 핵교 댕길 때는 운동장에서 빨갱이 새끼들 두개골에 새끼줄을 칭칭 감아 공으로 찼다.’며 껄껄 웃으셨다. 빨갱이들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그는 공비 토벌 작전 때 총을 맞아 한쪽 팔을 절단했다고 들었다.
“저기 자리를 펴고 술 한 잔 쳐 놓고 절해라. 배낭 안에 다 있다.”
아버지가 가리키는 곳은 봉문 형태를 겨우 갖춘 무덤 앞이었다. 지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배낭 안에 네모반듯하게 접은 비닐을 꺼내 자리에 깔고 일회용 접시에 막걸리와 육포와 마른오징어, 사과 한 알을 차렸다. 아버지와 같이 절을 했다. 두 번의 절이 끝나도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유 모를 통곡이 아버지의 가슴에서부터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아버지 옆에 멍청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실컷 오열을 쏟아부은 후에 일어나 막걸리를 무덤 여기저기에 부은 후 주섬주섬 자리를 걷었다.
“저기 상수리나무 밑으로 가자.”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몇 개의 납작한 돌이 놓여 있었다. 지윤과 아버지는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봉문 같지도 않은 묏등이 발아래 펼쳐졌다. 아버지는 지윤에게 막걸리를 권했다. 지윤은 막걸리를 쭉 마시고 빈 잔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비우고도 도통 말을 안 했다. 누가 저 봉문에 묻혔는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 앞에 벌 서는 아이처럼 조용히 앞만 바라봤다. 멀리 싸릿골 들입의 느티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볼이 서늘하다.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지윤을 바라보고 계셨는지 불그레한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저기 예닐곱 개의 무덤은 공동 무덤이다. 7백여 명의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의 손에 학살당해 합동으로 묻힌 장소다. 아이와 임신부와 아녀자와 노인들이었다고 한다. 이젠 너도 알아야지. 나의 내력을 들려주마. 이거는 집에 계신 할머님이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다. 할머니는 나를 가슴으로 낳아 키운 어른이다. 나는 저기 골짝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목숨이다. 너거 친할머니가 묻혀 계신다. 친아버지도 묻혀 있을지 모르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떻게 총살당했는지. 68년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비극이다. 너도 알다시피 육이오 사변은 동족 간의 상잔이었다. 그러니까 1951년 3월경이었다지. 어떤 이는 2월이었다고도 하더라. 민간인 인솔 장교는 경남지구대 계엄사령관이었다 하더라.”
“경아 백부님이요?”
“그래, 그날 정오를 지날 때였단다.” 아버지는 그날을 걸었다. 빗방울도 굵었고 눈발조차 흩뿌렸다. 좁고 미끄러운 벼랑길을 따라 싸릿골로 들어서는 차량이 있었다. 한 대의 장갑차가 앞장서고 그 뒤로 민간인을 실은 군용 버스와 군용 트럭이 줄을 이었다. 열몇 대였다. 싸릿골 사람들은 삽짝을 걸어 잠갔고, 방문조차 열지 못하고 숨죽였다. 숨어서 그들을 주시했다. 군인과 경찰은 기관단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싸릿골 입구에 차를 세우고 버스에 탄 사람들을 내리게 했다. 담요, 식기, 냄비 등, 세간을 싼 보퉁이를 이고 진 사람들,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들, 임신부,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군인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긴 행렬은 싸릿골로 향했다. 진눈깨비는 더욱 세차게 뿌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다. 그들은 싸릿골을 지나 골짜기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관단총이 거침없이 불을 뿜었다. 총소리가 멎고 군인들이 떠난 후 마을 이장은 동네 장골과 아녀자를 인솔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골짝은 이미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붉디붉은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남자들은 서둘러 등선 아래 구덩이를 팠다. 그 사이 여자들은 뒤죽박죽 된 시체를 꺼냈다.
그때 할머니는 가녀린 숨소리를 들었다. 한 여자의 가슴에 안겨있는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갓난아이는 울지도 못했다. 할머니는 누가 볼세라 잽싸게 치마폭에 쌌다. 할머니는 소피보고 오겠다며 절간으로 뛰어갔다. ‘아가, 절대로 울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부처님이 지켜 주실 거다.’ 할머니는 아이를 방석에 싸서 부처님이 앉아계신 법당 좌대 밑의 공간에 밀어 넣었다. 좌대를 싸고 있던 붉은 휘장이 가만가만 아이를 닦아 주었다. 할머니는 시침 뚝 떼고 참척의 현장으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그 일이 끝났을 때 싸릿골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아이의 생사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그 아이를 부처님이 살려주신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도 혹여 누군가 알고 고자질이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그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어떻게 가나. 온갖 궁리를 하던 차,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사람은 막내아들이었다. 지리산 인근 마을은 어디나 사람 살 곳이 못 됐다. 밤에는 빨치산이 낮에는 경찰과 군인이 사람들을 잡도리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믿지 못하는 불신시대에 좌익운동을 하던 아들, 지리산 빨치산 부대에 들어간다며 사라졌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온 것이다. 산에 간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야밤에 여자 혼자 그 무서운 현장 옆으로 갈 엄두가 안나 발을 동동 구를 때였으니 ‘부처님이 도우신 거라.’ 할머니는 큰아버지를 앞세우고 절간으로 찾아갔다. 스님도 탁발을 가셨는지 절간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피투성이 아이는 곱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아이를 거두었다. 갓난쟁이를 숨겨 키우다가 업둥이를 얻었다고 소문을 냈다. 아침에 삽짝에 나가니 누가 강보에 싸서 버렸더라고. 할머니는 그 아이를 할아버지의 호적에 올렸다. 그날 밤 아버지를 구한 큰아버지는 육이오 사변이 일어나자 빨치산 부대를 따라 떠난 후 실종 처리 되었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금지옥엽이었다. 그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어난 나 역시 외동아들로 그쳤지만 내 핏줄의 윗대는 영원히 그 공동무덤 속 누군가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후손들, 멸족된 집안도 있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내게 핏줄 이상이다. 할머니는 내게 생명과 새 족보를 주신 어른이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주었고 너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어른이다. 다음 대에서도 네 자식에게 이것만은 알려줄 수 있길 바란다. 내게 살과 피를 주신 친부모님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살아있다. 그들은 모두 민족상잔의 비극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나도 그중 하나다. 내 아들인 너에게 알려주는 것도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 생각한다. 굳이 이런 사실을 알려 너를 힘들게 할 필요 있겠나 싶었지만 할머니의 말씀은 달랐다. 핏줄의 내력은 바꿀 수 없다고 하시더라. 경아 역시 무슨 죄가 있겠냐 하시며 손부로 맞아들이신 어른이다.”
지윤은 말없이 아버지를 꼭 안아드렸다.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지윤과 경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하셨다. 할머니는 당신이 할 일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떠나셨다. 참 고운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한 손에는 지윤의 손을 한 손에는 경아의 손을 잡아 할머니의 가슴에 얹었다. 핏줄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를 완성한다고 하던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