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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 위로 꽃잎이 화르르

<단편소설. 세번 째>

by 박래여

할머니는 신당의 문을 열었다. 나부시 절을 하는 도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린애지만 엎드릴 때마다 치마 속에서 갈라지는 봉싯한 궁둥이 두 쪽의 선이 성숙해 보인다. ‘우째야 하꼬. 미륵님이 주시는 벌을 내가 받아야 할 낀데. 미륵님 미련한 이 중생을 살펴 주이소. 벌을 주시려거든 이 몸한테 주이소. 저 어린 거 곱게 자라 일부종사 하게 해 주이소.’

할머니도 도화 옆에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미륵불의 얼굴이 근엄하게 내려다봤다. 할머니와 손녀는 땀이 뚝뚝 떨어지도록 절을 했다. 절을 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도화는 옆에서 할머니가 절을 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절을 했다. 백팔 배를 끝내고 돌아보니 할머니가 절을 하고 계셨다. 도화는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았다.

“할매는 와 절을 하고 있노?”

“니를 곱게 키아 달라고 미륵님께 비는 중이다. 백팔 배 다 했나?”

“응”

“그라마 가서 씻고 와라. 저녁 묵자.”

어느 새 해거름이 오두막을 곱게 감쌌다. 할머니는 미륵불 앞에 놓인 촛대에 불을 붙였다. 도화는 샘터에 가서 세수를 하고 그 사이 할머니는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마루로 나온다. 소박한 밥상이다. 자외 무침, 자작하게 찌진 된장, 보리밥이지만 쌀알이 몇 개 섞여 있다. 늘 미륵불전에 놓이는 쌀이 있어 할머니와 도화는 꽁보리밥을 면하고 산다. 가난한 집에서 풀떼기 죽도 쑤어 먹기 힘들 때도 도화는 쌀알 섞인 밥을 먹었다. 개다리소반에 밥이 세 그릇이다.

“오빠 오라 캐라.”

“쳇 재수 없는 머스마”

도화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울타리 옆에 가서 아랫집을 향해 소리친다.

“수야! 밥 무로 온나. 할매가 밥 무로 오란다. 퍼뜩 안 오모 내가 다 무끼다.”

수야는 아랫집에 사는 남자애다. 도화랑은 앙숙이다. 서로 ‘가시나야 머스마야 ’하며 주먹다짐을 하며 싸우기도 하고 ‘서방님, 임자’하며 소꿉장난도 치는 사이다. 도화보다 두 살이 많지만 도화는 절대로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시나냐 수야가 머꼬? 오라바이 한테 버르장머리 없이.’하면서 도화의 머리댕기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칠 때면 절대로 같이 안 논다고 해 놓고도 또 어울려 엄마아빠 놀이도 하고, 개천에 나가 맥도 감고, 산딸기도 따고, 삐삐 꽃도 따 먹는 사이다.

도화는 개다리소반 앞에 앉았다.

“할매!”

수야는 도화가 재차 부르기도 전에 마당에 성큼 들어선다. 비쩍 말라 검버섯 핀 얼굴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수야는 자기 집처럼 마루에 올라와 개다리소반 앞에 얌전히 앉았다. 할머니는 수야에게 이것저것 젓가락으로 찍어 밥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도화는 시샘이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할머니의 눈이 무서워 부글부글 끓는 속에 된장국만 퍼 넣었다. 수야의 숟가락이 된장뚝배기에서 마주치면 탁 소리 나게 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할머니의 쬐려보는 눈이 무서워서.

수야의 성은 하 씨고 이름은 홍수지만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끝 자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통념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냥 수야라고 부른다. 수야도 도화처럼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도화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지만 수야 어머니는 죽었다. 한 여름 밤에 개천에 다슬기 줍는다고 나갔다가 소에 빠져 죽었다. 할머니의 점괘는 하 씨네 조상 중에 억울하게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귀신이 수야 어머니를 끌고 물속으로 들어갔단다. 할머니는 수야 아버지를 불러 앉혀 놓고 수야가 잘 되길 바란다면 그 귀신을 달래줘야 한다고 했다. 귀신을 달래는 방법은 수야 어머니의 제삿날 그 귀신 밥도 같이 떠 놔야 수야가 탈 없이 자랄 것이라고 했다.

“지 어릴 때 고모가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답니더.”

“미륵님이 참말 영험은 있는 기라요.”

수야 아버지는 착실한 농부였다. 가진 것은 소작농에 미륵골 다랑이를 일궈 만든 논 몇 뙈기가 전부였지만 알부자 소리를 들었다. 그는 부지런했고, 아내 역시 부지런했다. 동네 사람들은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부부는 남의 집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일손이 부족하면 아낌없이 가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거들어줬다.

그러나 신은 질투가 났을까. 졸지에 젊은 아내를 산에 묻고 온 그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를 술독에서 건진 것은 어미 가난이 들어 파리하게 말라가던 수야였다. 그 겨울은 춥고 스산스러웠다. 개울은 꽁꽁 얼어붙었고, 개울가의 잎사귀 하나 없는 키다리 미루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우우 울었다. 미륵골은 눈이 하얗게 덮였다. 양지를 향해 나직나직 앉은 초가지붕도 하얗게 솜이불을 덮은 그런 겨울밤이었다. 수야는 주야장창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비를 기다리다가 급기야 골목에 쓰러졌다.

그날 밤 수야를 발견한 사람은 도화 할머니였다. 어린 도화를 재워놓고 남의 집에 가서 비손을 해 주고 오던 길이었다. 도화 할머니가 수야를 발견하고 업어다 법당에 뉘었다. 수야는 밤새도록 제 아비와 어미를 부르며 진땀을 흘렸다. 할머니는 불덩어리 같은 수야를 밤새 간호하며 자신을 나무랐다. 이웃에 살면서 자기 설움에 취해 있느라 이웃의 처지를 생각조차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수야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할머니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자신의 말뚝이자 생의 의지 처였던 귀하디귀한 아들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울리며 떠나보낸 뒤끝이었다. 날마다 어미를 찾는 어린 손녀를 안고 업고 미륵님만 부르며 마음을 다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수야 아버지가 장터 주막집 술독을 바닥낸다는 소문도 몰랐다. 외상 술값이 한여름 포도 알 달리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수야를 간병한 할머니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다.

“야가 우리 도화의 사주를 바까 줄 수 있으랑가.”

다음 날 할머니는 수야 아버지 만택 씨를 찾아갔다. 엿 장사를 해 보라고 권한 것도 할머니였다. 엿판을 메고 전국을 떠돌면서 세상구경을 하다보면 아내도 잊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어린 아들도 건사 못할 인간이라면 차라리 나가서 죽는 편이 낫다고 삿대질도 했다. 동네 사람들과 두량해서 동네에서 쫓아내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읍내에 있는 엿 만드는 공장을 소개한 것도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쉽게 변할 것 같지 않았다. 농사꾼이 장사꾼 노릇 하기가 어찌 쉽겠나. 장사꾼이 되려면 우선 너스레도 있고, 유들유들한 성격이어야 하는데 만택 씨는 샌님 편이었다. 뚝심과 부지런함은 몸에 배었다 쳐도 거짓말도 못하고, 마음도 여렸다. 어렵사리 구해다 준 엿을 술과 바꾸어 먹고 오기 일쑤였다.

“수야, 아부지! 내 좀 보소.”

할머니가 만택 씨와 멱살다짐을 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의 일이다. 멱살다짐이라 해봤자 할머니의 일방적인 멱살잡이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술 취한 만택 씨의 뺨따귀를 몇 차례 올려붙이고, 멱살을 잡아 질질 끌다시피 해서 할머니 집으로 데려왔다. 할머니는 만택 씨를 우물가에 엎어뜨려 놓고 찬물을 양동이 째 부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만택 씨는 한동안 얼이 빠졌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이기 머꼬? 이 할망구가 보자보자 하니 너무 하네. 니가 내 마누라가? 내가 우찌 살든지 말든지 내 인생이다 이 말이다. 니가 와 지랄이고 지랄은. 에이 더러버서 내 참, 주먹이 운다 주먹이. 이걸 고마 꽉!”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만택 씨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래, 니가 사내 새끼모 오데 한 분 쳐 봐라. 이 배알도 없는 놈아. 안 그라모 니 죽고 내 죽자. 어린 자슥 앞에서 애비가 돼 그라는 꼬라지 인자 나도 못 보것다. 니가 내 아들 겉애서 더는 못 봐 주것다. 이놈아, 죽은 여편네가 그리 좋으모 따라 가모 된다. 죽여주랴?”

할머니도 이판사판이다. 팔을 둥둥 거지더니 옆에 있는 바지작대기를 들어 만택 씨의 등을 연거푸 후려쳤다.

“아이고 이 할마이가 사람 쥑이네.”

만택 씨는 자기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할머니는 그 뒤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

“옷 갈아입고 술 깨거든 미륵님 앞으로 오소. 수야는 우리 집에서 도화랑 있응께. 내 오늘은 사생결단을 낼 참잉께 그리 알고 오는 기 신상에 좋을 기요. 미륵님이 시킨 일이니께.”

그날 밤 할머니와 만택 씨 사이에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도화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후 만택 씨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바뀌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엿판을 메고 전국을 돌았다. 아버지가 엿판을 메고 팔도를 돌아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야는 할머니의 손자처럼 자랐다. 수야와 도화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참 잘 어울리는 까투리 남매였다.

수년이 지나자 그는 건너 편 동네 뒷산 일부를 샀다. 만택 씨는 그 산에 아내의 뫼를 이장하고, 고모님의 신주를 써서 따로 묻었다. 그 덕인지 살림이 불쑥불쑥 불어났다. 큰 길 건너 다랑이와 그에 딸린 산을 샀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는 수야와 도화가 공립 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만택 씨는 전국을 떠돌며 엿장수를 했다.

“인자 지도 엿 장사 접을 랍니더.”

“서로 맘 맞고 살 맞으모 됐제. 인자 그 애도 액땜 다 했으니 합쳐도 될 기요.”

“고맙습니더. 이기 다 아지매 덕입니더.”

“잘 사소. 수야가 효자노릇 할 기요.”

“부산에다 집을 한 채 마련했십니더. 자리가 잡히모 수야도 데리고 갈 생각입니더.”

그 시절 세상은 어수선했다. 일본에게 36년 동안 압박을 받던 나라가 해방이 됐다지만 미륵골은 세상 소식에 어두워 삶의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가끔 세상 소식을 물고 오는 것은 엿장수 만택 씨였다. 나라가 이등분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언제 피비린내가 풍길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미륵불에 치성을 드렸다. 어둠의 기운이 탈 없이 미륵골을 벗어나주길 기도했다. 새벽마다 도화를 깨워 미륵불 앞에 앉히는 것도 도화에게 끼칠 액살을 조금이라도 면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할머니는 멀리 동구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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