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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Feb 14. 2024

듬실에 깃든 혼백

<단편소설. 끝>


4.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하면 좋겠습니까?”

 관광버스에 올라탄 일행을 향해 근수가 묻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병철 생가로 가자. 백산 안희제 생가로 가자. 망우당 곽재우 생가로 가자. 분분한데 역시 소설가선생이 낙점을 찍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로 갑시다. 이병철 생가는 부자 될 욕심 있는 사람만 따로 가시고. 일본 놈에게 아부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독립자금 댄 위대한 의령의 인물이 살던 곳을 봐야 합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에 버금가는 인물이 또 있지요. 이우식 선생이요. 이우식 선생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인물입니다. 조선어학회를 이끌 수 있도록 자금을 댄 인물이거든요.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 여러 분도 알고 있겠지마는.”

 “맞습니다. 이우식 선생도 독립운동가지요. 의령읍이 고향입니다. 이우식 선생과 이극로 선생 이야기는 차차 더 하기로 하고, 일단 백산 선생 생가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곽재우장군 생가도 들리기로 합시다. 현고수 나무를 보는 것으로 문학기행 일정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뒤풀이 있소?”

 “읍내 가서 안 바쁘신 분은 술 한 잔 더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같은 값이면 단란주점이 어떻소? 여성 문인들 노래실력 춤 실력도 보고.”

 “여자들은 집에 가서 큰 애 돌봐야 하는 거 모르세요?”

 최 여사의 한 마디에 좌중은 다시 웃음꽃을 피웠다.

모두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그때 맨 뒷자리 창가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보였다. 참빗으로 곱게 빚은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질끈 묶었다. 오뚝한 콧날, 편안한 눈빛, 꽉 다문 입술, 자그마한 달걀형 얼굴은 미인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한 인상이었다. 옷은 개량한복 비슷했다. 나는 개량한복 바지를 즐겨 입는데 그녀는 발목까지 덮은 긴치마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 옆으로 다가가기 위해 통로에 섰지만 나보다 앞선 남자 회원들이 그녀 옆을 차지해 버렸다. 하는 수없이 나는 앞 좌석 빈자리에 앉았다. 백산 생가에 가면 그녀에게 말을 붙여 봐야지.

 백산 생가는 썰렁했다. 집은 사람의 온기로 산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썰렁한 냉기로 늙어간다. 모두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을 둘러보는데 나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는 듯이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쫓아가서 말을 붙였다.

 “우리 회원이세요?”

 “이극로 선생 생가에 왔다가 합석하게 됐어요. 저분이 그래도 된다고 해서.”

 여자는 근수를 가리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이극로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궁금했다. 여자는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고려 공산당 상해 파의 당수인 이동휘 선생과 동행하며 세계여행을 한 점, 이동휘 선생 덕에 독일유학을 하게 된 점, 독일 프리드리히 빌헤름대학에서 조선어과를 두고 3년 동안 강사를 한 점, <중국 생사공업>이란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점, 세계를 돌고 돌아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어학회에 입회하고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박차를 가한 점 등, 이미 근수로부터 들었고 그 청년으로부터 알게 된 이극로 선생의 인생역정을 소상하게 꿰고 있었다. 재탕이지만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 알아갈수록 이극로 선생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는 일행과 떨어져 백산 생가 뒤뜰을 거닐고 있었다. 

 “이극로 선생은 일본 통치하에서 언어의 멸망이 따라올 것을 알았더랍니다. 언어 문제가 곧 민족 문제의 중심이 되는 까닭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실 구문일치의 한글문법 정리는 주시경 선생이 단초를 열었다면 이극로 선생은 그 사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고통을 당하셨지만 언어운동은 조선독립의 근본 목적이자 민족정신으로 본 것이지요.”

 “아까 이 책을 준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혹 이극로 선생의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신가요? 결혼했다는 말을 못 들어서요. 평생 독신으로 사셨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알기론 결혼을 했어요. 조선어학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여성이었대요. 1929년 겨울에요. 그녀는 이극로 선생을 열렬히 지지하고 사랑했다고 하더군요. 이극로 선생은 나라를 잃은 마당에 독립운동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가정을 가지겠느냐고 했다지요. 독립운동하신 분들 대부분이 가정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던 격동의 시대였으니까요. 그녀는 이극로 선생의 모든 것을 끌어안았어요. 남편이기 이전에 동지였고, 투사였지요. 그녀는 이극로 선생을 위해 평생을 바쳤어요.”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는 <고투 사십 년> 책을 어루만졌다. 이 속에 뭔가 있겠지. 

 “왜 그는 월북했을까요?”

 “아마도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는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이었어요. 그 사건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을 겁니다. 1945년 8월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올 때 초주검이 되어 있었지요. 해방 후 격동기 역시 그를 북으로 내본 거지요. 그는 김구 선생이 이끌던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운동 본부의 위원으로 반탁 운동에도 참여했다더군요. 그가 주도한 것은 말모이, 즉 순수 우리말이지요. 오늘날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는 그의 노력이 일궈 낸 성과라더군요.”

 “제게는 이희승 선생이 지었다는 오래된 국어사전이 있지요. 북한의 문화어와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북한 말은 남한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순수 우리말이 많다고 해요. 겨레말 사전에 나오는 말들 같더군요.”

 “해방 후 십 년이 넘도록 남한에서는 우리말 표기법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해요.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범인 이희승과 최현배가 입장을 달리하여 대립하는 바람에 어려웠지요. 이희승은 한자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최현배는 순우리말로 한글 표기법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희승이 승리함으로써 북한 말과 우리말이 달라진 것이라 보면 될 겁니다. 최현배는 이극로 선생과 같은 노선이었으니까요.”

 “참으로 박식해요. 어떻게 이극로 선생에 대해 그렇게 잘 아세요?”

 “그분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하다 싶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진짜 대단한 분인데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요. 그분의 삶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요. 덕분에 좋은 작가님들도 만나고 참 유익한 여행이네요.”  

 “이야기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샜네요. 이극로 선생의 부인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주세요.”

 “알려진 게 별로 없어요. 평남 강서 출신이라는 것과 경성여자사범 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교사로 지냈다고 하는 정도지요. 이극로 선생과 슬하에 3남 2녀를 뒀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결혼할 때 여기 백산 안희제 선생이 축사를 했다더군요. 그가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에 조선 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후 돌아오지 않아 남한에서 묻혀버린 것이지요. 그때 김구 선생도 함께 갔다가 돌아왔지요. 그가 가족과 함께 평양에 남게 된 것은 아내와 처가 식구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는 북한 국어학의 토대를 닦았고, 조국 평화통일 위원회 위원장 등도 역임했다고 합니다. 다만 정치 노선을 걷지 않고 순수우리말 한글 연구와 보급에만 힘썼기 때문에 숙청바람을 타지 않았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극로 선생은 진짜 개천에서 난 용 같아요. 대단한 인물인데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럽습니다. 아, 우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이극로 선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뜨게 해 주신 분인데 성함이라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시를 쓰고요. 경남작가회 박 현영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김공순이라고 합니다.”

 그때 멀리서 근수 목소리가 들렸다. 근수는 ‘박 현영 시인, 박 시인’하면서 내 이름을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뒤꼍에서 돌아 나오니 회원 모두 안희제 생가를 빠져나가 관광차에 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자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은 뒤 살짝 빼내며 말했다.   

  “저는 여기 남아야 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반가웠습니다.”

  “김 선생님, 읍내까지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네,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지금 오는 중이랍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끝까지 같이 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그 책 꼭 읽어보세요. 계찬이란 아이도 만나시고요.”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웃었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이극로 생가마을을 다시 찾을 것이다. 계찬이란 아이를 만나 이 책을 전해 주리다. 어쩌면 그 청년이 계찬이의 형일지도 모른다. 청년의 준수한 얼굴이 어룽거린다. 사위 삼았으면 싶지만 딸이 있어야지. 

 안희제 생가의 대청마루 옆 화단에 노란 명자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봄이면 예쁜 처녀의 볼처럼 붉은 꽃을 피웠다가 가을이면 모과처럼 노랗게 열매를 달아 오가는 길손의 마음을 환하게 하는 꽃, 안희제 생가의 명자열매가 그녀를 닮아 보였다.      


5.      

 문학기행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고투 사십 년>을 폈다.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나는 결혼과 함께 의령 인으로 거듭나 삼십 수년을 살면서도 이극로 박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세계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심히 부끄럽다. 이극로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나 성공과 실패를 돌보지 아니하고 다만 뜻을 세우고 그것으로서 분투하는 때에 낙을 가졌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나 먼저 예산을 세우고 시작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먼저 뜻을 세울 뿐이다. 독일의 빌헤름 대학에서 공부하는 5년 동안 정치학과 경제학과 철학과 인류학, 언어학 등을 공부했지만 그때가 고라면 고고, 낙이라면 낙이었던 생활이었다.’

 내가 만났던 아이 계찬은 이극로 선생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안희제 생가에서 만났던 김공순, 그녀는 이극로 선생의 아내였다. 그들의 혼백이 나를 불러 그들의 행적을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모골이 송연하면서도 선택받은 자의 기쁨이 나를 들뜨게 한다. 비록 짧은 소설 속에 그의 일대기를 상세히 묘사할 수도 없고, 그의 큰 뜻을 만방에 알릴 수도 없겠지만 나는 이 글을 빌어 말하고 싶다. 우리말, 한글을 사랑한 이극로 선생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순수 우리말 연구에 대한 그의 업적이 길이 빛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다.      


 *듬실 - 이극로 선생의 생가지 옛 지명 

 *참고문헌 - 고투 사십 년.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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