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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실에 깃든 혼백

<단편소설. 3>

by 박래여

3.

지정면 성산리 두물머리에 닿았다. 왼쪽은 낙동강이 오른쪽은 남강이 함께 만나 섞여 흐르는 곳에는 소용돌이가 일었다. 둑길을 천천히 걸었다. 나는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반늙은이가 되자 퇴행성관절염에 잡혀버렸다. 일행과 쳐져서 천천히 걸었다. 어딘가 앉아 쉬었으면 싶은데 멀리 의자가 보인다. 나보다 먼저 차지한 청년이 있다. 챙 있는 모자를 썼다. 모자의 선 밑으로 깔끔한 뒤통수가 강직해 보였다. 이런 곳에 혼자 오는 청년이라니 호기심이 일어 다가갔다. 청년의 무릎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지만 청년은 책을 보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다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그제야 옆을 돌아봤다.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스친 눈빛인데 눈빛이 예리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은자리에서 비껴 앉았다.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자리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예사 청년은 아닌 것 같다. 청년과 나란히 앉아 두물머리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다 슬쩍 청년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다. 어디서 봤을까.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코, 심하지 않은 사각형의 얼굴이다. 옛날 학생복 같은 양복을 입고 있다. 특이한 청년이네.

“무슨 책이에요?”

그제야 청년을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청년의 눈빛이 한동안 흔들린다. 중년 아줌마가 말을 붙이니 귀찮기도 하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갯짓으로 청년의 손에 잡힌 책을 가리켰다. 청년은 책을 내민다. 나는 책을 받아 제목을 읽는다.

“고투 사십 년? 아, 이극로 선생의 자서전이군요. 오전에 이극로 생가에 들렀었는데. 나는 잘 모르는 분이지만 한글학자라는 것과 월북했다는 것만 아는데. 청년이 그를 아네요. 신기해라.”

“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여태 관심도 없었지요. 난 의령사람이 아니거든요. 청년은 의령 본토박이예요?”

“여기가 제 고향입니다.”

“이 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청년의 눈빛이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이극로, 그는 1893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와 맏형수의 손에서 자랐다. 20여 명의 대가족과 살았으니 서당공부도 할 수 없었다. 낮에는 들에서 농사일을 했고, 소꼴을 베어 나르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가 일하는 가까운 곳에 서당이 있었다. 서당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훈장과 야외로 나갈 때면 몰래 숨어들어 남의 지필묵을 빌려 글을 썼다. 한문과 언문을 깨치자 동네에 공동으로 오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을 통해 세상 소식을 알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가출을 하지요. 열여섯 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어찌 살 수 있겠어요. 공부를 해서 독립투사가 되겠다고 작정했지요. 1차 가출은 실패하고 3개월 후에 다시 가출을 합니다. 서울로 가지 않고 마산으로 갔지요. 거기서 창신학교에 들어가요. 단발을 합니다. 신문물을 받아들인 거지요. 가족으로부터 내침을 당하고 고학으로 공부를 하지요. 창신학교도 2년 만에 그만둡니다. 서모께서 ‘크고 옳은 일에는 네 목숨까지 바쳐라.’는 말씀을 듣고 청운의 뜻을 품고 혈혈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가지요. 서모의 그 말씀은 그의 평생의 신조가 됩니다. 그는 후에 이런 말도 해요. ‘사람이 뜻을 세우고 힘쓰면 그것을 이룬다는 일종의 미신 같은 자신감을 가졌을 뿐’이라고요.”

“청년은 어떻게 그에 대해 그렇게 잘 아세요? 혹 이극로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가요?”

“그럴지도 요. 그 책에 다 있습니다.”

“두메산골에서 가출한 청년이 성공했네요. 한글학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는 한글학자이기 이전에 경제학자였어요. 독일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중국생사공업>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글학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가 서간도로 가는 도중에 압록강 강변의 한 농촌에서 아침을 사 먹게 됐지요. 밥상에 고추장이 빠져서 주인에게 고추장을 달라고 했지만 주인은 못 알아들었다지요. 몸짓으로 고추장을 말하자 그제야 주인은 ‘아, 댕가지장’하면서 고추장을 주더래요. 그때 우리말 표준어사정을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지요. 또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그가 만주에 도착하여 동창학교라는 곳에 들어갔는데 영남 사투리 꾼이라고 놀림을 엄청 받았어요. 그때 뜻을 확고하게 세웠지요. 조선어 정리와 한글맞춤법 통인안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과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해야겠다고요. 그에게 언어문제가 곧 민족문제의 중심이 되었던 까닭이지요. 그의 독립운동은 한글운동부터 시작한 셈이지요.”

“그런 그가 왜 그랬을까요? 광복 이후에 월북했잖아요? 여기 살던 친인척들은 연좌제에 걸려 고생 꽤나 했겠어요. 내 고향이 지리산 밑인데 거기 사람들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을 터부시 하거든요. 사실 평범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가족까지 몰살시킨 장본인은 군경이나 반공청년단이 더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나도 어려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이런 구호를 외치는 시대를 살았답니다. 이런 분을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지요. 청년은 학생입니까?”

청년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청년의 눈은 다시 두물머리로 향했다.

그때 우리 일행은 두물머리를 돌아 곽재우 장군의 보덕비각을 둘러본 후에 돌아오고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짓기도 하고, 한두 명 흩어져서 느릿느릿 걷는 그들은 한가한 산책객 같았다. 일행 중에서 최 여사와 소설가선생은 여전히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최 여사를 끌어안으려는 소설가선생의 몸짓에 최 여사는 싫다는 몸짓으로 다른 사람 옆으로 종종걸음 치기 바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갈지. 그 덕에 일행은 웃음꽃을 어떻게 피울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분명 소설가선생은 보덕각시 보러 갔더니 보덕각시는 없고 시커먼 비석만 서 있더라고 할 것이다. 마랑청년이 없으니 보덕각시도 없지 않으냐고 맞받아칠 최 여사, 비록 짓궂긴 해도 소설가선생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

각설하고, 소설가선생이 보덕각시 운운한 것은 강원도 금강산 보덕굴에 얽혀 내려오는 설화다. 보덕각시와 회정대사에 얽힌 인연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분도 궁금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내용을 읽으시기 바란다.

“박 선생 여기 계셨구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불러도 대답도 없고. 다리가 많이 불편한가 봐요. 저긴 안 가길 잘했어요. 볼 게 없어요. 비각이란 것이 그게 그거지 뭐. 다리품만 팔았어요. 아이고 힘들다.”

어느새 최 여사가 의자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는다. 하필이면 청년이 앉았던 자리다. 내가 한눈파는 사이 청년은 떠나버리고 없다. 어디로 갔지? 가까이 온 일행 뒤로 멀리 둑을 바라봤지만 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둑 밑에 소로가 나 있는지. 그 소로로 사라졌는지.

“최 여사, 여기 앉았던 청년 못 봤어요?”

“아무도 없던데? 박 여사만 앉아 있었잖우.”

“이 책 주인인데.”

내 무릎에는 <고투 사십 년> 책이 있었다. 청년의 실체도 분명 있었다는 뜻이다. 책을 돌려줘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책을 의자에 놓아두고 올 수도 없고.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청년의 흔적을 찾자 최 여사가 수상쩍은 표정으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챘다. 최 여사는 책장을 뒤적거리더니

“여기 사인이 있네. 박 여사에게 주는 선물인가 봐.”

“어디 봐.”

최 여사가 펴 준 책장에는 단지 ‘계찬“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계찬? 계찬? 계찬? 머릿속을 굴리는 순간 그 아이가 생각났다. 몸짓 언어로 대화를 나눴던 그 아이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의 형님일까. 잘 됐다. 일단 이 책은 내가 읽은 다음에 그 아이에게 전해주면 되겠다. 이극로 선생의 생가 마을에 사는 줄 아니까. 그 동네 가서 알아보면 되겠지. 나는 숙제 하나 푼 상쾌한 기분으로 책을 챙겨서 일행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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