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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14. 2024

읽은 책 더듬기

 읽은 책 더듬기   

     박래여


  

 주룩주룩 굵은 빗방울이 내린다. 맑고 화창하던 어제를 생각한다. 땀을 흘리며 이불을 빨아 널었다. 따끈따끈한 햇살에 뒤집기를 하며 ‘햇볕 차암 좋다.’ 중얼거렸었다. 밤에 날궂이가 심했고, 빗소리에 깼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사람마음도 변덕스럽다. 시원하게 쭉쭉 쏟아지는 빗줄기에 묵은 때를 씻듯이 마음을 씻는다. 


 간밤은 노아고든의<위대한 영혼의 주술사>를 완독하고 멍 때리기를 했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해 인디언 노예제도를 놓고 벌어진 남북전쟁, 전쟁이 끝나고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살해당한 시기를 거쳐 온 롭 제이 이민자 가족의 방대한 서사시였다. 의사 롭 제이와 소크족 주술사 마쿠와이쿠아, 롭제이의 아들 샤먼의 시선에 잡힌 이민자의 삶, 인디언의 삶, 미국의 남북전쟁 참상이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종횡무진하며 나를 사로잡았다. 


 소설의 시작은 귀머거리 의사 샤먼이 시골 의사였던 아버지 롭 제이의 부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향에 돌아온 샤먼은 아버지의 일기를 읽는다. 어머니보다 더 좋아했던 인디언 마쿠와의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을 ‘꼬마 샤먼’이라고 불러주던 그녀가 왜 잔인하게 살해당했는지. 누가 죽였는지. 그의 아버지 역시 범인을 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디언의 땅에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몰려드는 이민자들, 인디언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내거나 죽이고 온갖 방법으로 그 땅을 빼앗아 나눠 먹기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 흑인과 인디언을 노예로 부리게 된 사람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 그들이 터 잡고 살아가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숨 돌릴 틈도 없이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의사를 배출한 롭 제이의 집안 내력은 롭 제이에 이어 아들 샤먼에게 전해진다. 성홍열을 앓고 난 후 귀가 먹어버린 장애아 샤먼이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 롭 제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들이 꼭 그 길을 가고 싶다고 하자 그는 환자를 보러 갈 때면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현장 실습을 시키고, 죽은 환자의 해부를 돕게 하는 등, 의사로서의 마음가짐과 병에 대한 진료를 돕게 한다. 샤먼이 장애를 극복하고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이웃의 사랑과 애정 덕이었다. 아들에게 온전한 삶을 주고자 했던 아버지, 핏속에 전해오는 직감을 가진 샤먼, 손가락으로 맥박만 짚어 봐도 언제 죽을지 아는 능력은 롭 집안에서 선택받은 자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다. 소크족 인디언 주술사 마쿠와이쿠 역시 ‘꼬마 샤먼’이라며 샤먼에게 인디언의 정신을 심어준다.    


 마지막 반전은 놀라웠다. 그들 가족이 평생 믿고 의지했던 목장지기 얼든, 어린 샤먼과 그의 형 알렉스에게 주먹 쓰는 법을 가르쳐주던 사람, 늙고 병든 그를 끝까지 간병했던 샤먼, 그 목장지기 얼든이 바로 마쿠와 살해를 명한 장본인이었을 줄이야. 왜 얼든은 그녀의 살해를 도모했을까. 롭 제이와 마쿠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의사와 간호사, 영혼으로 맺어진 우정이었다. 그렇다면 롭 제이의 아내 사라의 질투 때문에 그녀를 죽여야 했을까.


 기독교 사상에서는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이 벌을 준다고 한다. 무신론자인 롭 제이나 샤먼의 생각은 어떨까. 침례교, 감리교, 모르몬 교, 유대교 등, 여러 종교를 믿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홀랜드 크로싱이란 작은 마을, 죄를 지은 인간은 법의 잣대로 벌을 줘야 하지만 인디언 여자를 살해한 살인자를 추적하지도 않는 백인 경찰, 인디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우월주의자 백인의 사회에서는 살인자를 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롭 제이는 십 년이 넘도록 그 살인자들을 추적한다. 결국 세 사람의 살인자는 롭 제이가 죽이지 않아도 비참하게 죽고 마지막 남은 얼든은 샤먼에게 진실을 말하고 죽는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삶의 터전을 준 의사 롭 제이를 평생 속여 온 얼든, 그 괴로움을 위스키로 풀었던 것이다. 샤먼이 파킨슨병으로 죽은 얼든을 묻어주고 폐허가 되어 있던 쇼크족 여름 막사를 태운다. 죽은 주술사의 길을 막는 세 요정을 쫓아냄으로써 죽은 마쿠와이쿠아도 평안을 찾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결혼도 닮았다. 아버지 롭 제이가 사생아 알렉스를 키우며 요로 결석으로 죽어가던 미망인 사라를 살려 결혼을 하듯이 아들 샤먼도 두 딸의 엄마였던 레이첼과 결혼을 한다. 레이첼의 아버지와 샤먼의 아버지는 오랜 친구지만 종교가 달랐다. 레이첼의 부모는 독실한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었다. 샤먼의 엄마 사라는 침례교도다. 남북 전쟁 당시 샤먼의 아버지 롭 제이는 북군 민간인 의사로 종군했고, 레이첼의 아버지 제이슨은 남군 장교로 복무했던 것이다. 결국 제이슨은 종교보다 자식의 행복을 선택한다. 


 나는 자연친화적 사상을 가졌나 보다. 전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에 빠지고 인디언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든지 빠져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영혼이라 해야 할까. 혼불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정령이라 해야 할까. 인간과 자연, 동물과 식물, 어디에나 깃든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까.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는 무엇. 


 아무튼 『위대한 영혼의 주술사』 상하 두 권의 방대한 소설인데도 전혀 지루함을 모르고 몰입했다. 독자의 영혼까지 흡입시키는 소설,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혼불』을 읽은 후에 잡은 소설인데도 내 혼을 쏙 뺐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다시 책을 잡는다.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잡았다. 『도쿄섬』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소설의 첫 장을 연다.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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