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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15. 2024

새미골 아이

<단편소설. 4>

4.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해 여름 그 애가 죽었다. 도화 강에 빠져 죽었다. 푸른 도화 강은 우리 고장을 풍요롭게 하는 큰 강이었다. 지리산 이골 저 골에서 흘러온 물이 도화 강에 모여 진주 남강에 닿았다. 강가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으로 들어가는 물막이 보 앞은 빨래터였고 보 건너는 하천부지였고 자갈밭에 이어 소나무 숲과 과수원이 있는 들이 펼쳐졌다. 황토와 모래가 섞인 하천부지는 농사가 잘 됐다. 저자거리 사람도 새미골 사람들도 하천부지에 농사를 지었다. 


 여름날에는 그 도화 강이 삼이웃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남자애, 여자애, 할 것 없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자맥질의 달인이었고 고기잡이 천재였다. 고기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얕은 강 가장자리의 수풀 밑에는 민물새우가 살았다. 뜰채를 수초 밑에 대 놓고 발로 휘저어 새우를 소쿠리 쪽으로 몰면 된다. 깊은 물에는 버들치와 피라미, 꺽지, 동사리, 모래무지, 쉬리 등, 잡고기가 산다. 고기 잡는 방법도 간단하다. 뚜껑 없는 주전자나 속이 깊은 양푼, 면 보자기, 고무줄만 있으면 된다. 보자기 가운데는 중간 크기의 알밤만한 작은 구멍을 뚫는다. 헝겊에 된장 한 숟가락 싸매 그릇에 담고 보자기를 씌운 후 그릇과 분리되지 않도록 고무줄로 테두리를 꽁꽁 묶는다. 그것을 잠수질을 강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가라앉혀 놓는다. 그래야 물살에 떠내려갈 염려가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즐겁다. 우리는 자맥질도 하고, 돌성도 쌓고 모래성도 쌓으며 한식경을 논다. 놀다가 허기가 지면 강바닥에 가라앉혀 둔 그릇을 찾으러 간다. 그릇 안에는 제법 굵은 송사리나 버들치 같은 물고기가 오글오글 들어가 있다. 물이 맑고 깊었던 지리산 자락의 도화 강은 산천어들의 서식지였다. 가끔은 민물장어가 들어가 꿈틀거리는 통에 물뱀인 줄 알고 기겁을 하기도 했다. 고기들은 바보다. 된장 냄새를 맡고 들어갔다가 나오질 못한다. 잡은 물고기를 들고 각자 집으로 향한다. 할머니는 ‘물귀신이 끌어댕기모 우짤라꼬 물에 가 노노? 집에서 자수나 놓을 것이지.’하면서도 고기를 다듬어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자작하게 졸여주곤 했다.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어디 민물고기 만이랴. 도화강의 다슬기는 거짓말 좀 보태서 작은 소라만 했다. 다슬기를 우리는 고동이라 불렀다. 여름밤이면 어른들도 관솔불을 켜 들고 고기와 다슬기를 건지러 다녔다. 어른들이 강변 아랫녘 물 얕은 곳으로 밤마을을 가면 우리는 어른들 눈을 피해 돌다리를 건넜다. 하천부지는 온통 먹을 것 천지였다. 복숭아와 자두 과수원도 있었고 수박, 참외, 옥수수, 고구마, 땅콩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삼이웃 동네 조무래기들은 과수원과 옥수수 밭에서 서리를 했다. 그런 날이면 강변 자갈밭에서 밤새도록 모닥불이 타고 아이들 노랫소리와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아이들은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작은 솥, 장작, 갈비, 삭정이, 성냥을 챙겨왔다. 자갈밭에 돌로 아궁이를 만들고 솥을 걸었다. 그 솥에 옥수수도 삶고 다슬기도 삶았다. 


 문제는 그 다음 날이었다. 동네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진다. 건너편 과수원집과 밭주인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일장 연설을 했다. 서리를 맞은 집 주인들이었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있는 집을 찾아 일부러 마실(마을의 사투리)을 왔다. 지나가다 들린 것처럼 ‘쥔 있소? 이 서방 있나. 강 샌 있소, 조 영감님 계십니까.’ 이런 식이었다. 주인도 손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간밤에 일을 쳤다는 것을. 평범한 수인사가 오가고 입가심할 막걸리가 오가거나 곰방대나 궐련을 권커니 잣거니 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랑께 어지 밤에 아그들이 우리 밭에 들어 간기라. 발자국 봉께 뉘 집 손인지 알지만 내가 말은 안 하제. 손모가지를 못 잡았싱게. 하지만서도 잡히기만 하모 납작꼬치든 볼록꼬치든 불알을 까삐기요.”

 “아이고 미안시럽어서 우짜노. 밭을 지근지근 밟고 댕기지나 안했는지. 낭구를 죽지째 뿔라묵거나 하지는 안 했디요? 뉘 집 손들인지 경을 쳐야겠구먼. 우리 아그들은 일찌감치 잤거마요. 그래도 내 단디 일러 두것소. 너머 농사를 망치모 안 됭께.”

 “물에서 놀모 금세 배가 고푼디 오죽 출출했시모 그랬시까 마는. 혹시 모링께네 아그들 단속 좀 부탁합니데이. 담에 걸리모 순사한테 끌고 갈랍니더. 우리도 묵고 살아야제요.” 

 “하모요. 하모요.”

 그렇게 흐지부지 되고 말지만 할머니는 두 언니를 앉혀놓고 일장연설을 시작한다. 

 “말만한 가시나들이 밤이슬 맞으모 클 난다. 머스마들캉 어울리 댕기다가 무슨 사단 나모 동네 우사만 하는 기 아이다. 혼삿길 맥힌다. 세상이 좋아져서 가시나가 핵교를 댕긴다마는. 너거는 안 갔시끼라 내 믿는다.”


  그렇게 여운을 남길 때 할머니는 마을 어귀에 버티고 선 천하여장군 같다. 언니에게 꾸지람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나를 염두에 두셨다. 말썽부리는 언니들 따라 다니다 매 맞는다는 뜻이지만 말썽은 언니들이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나였다. 고집불통에 제멋대로라 언니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남자애들과 피를 튀기며 쌈질하기 다반사에 아버지가 다듬어준 나무칼을 휘둘렀다. 특히 그 애는 내 봉이었다. 나는 지고는 못 살았다. 욕심도 많고, 암팡졌다. 큰언니도 내 봉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할머니는 나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큰언니를 닦달했다. 할머니의 회초리 세례를 받는 것도 큰언니였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큰언니에게 미안하다.


 “가시나야, 니 땜에 맨날 내만 매 타작이다. 인자 니 안 델꼬 댕긴다.”

 그랬지만 큰언니는 번번이 밤마을을 갈 때면 나를 앞세웠다. 나를 데리고 가야 할머니가 허락을 했다. 나는 언니의 보호자겸 감시꾼이었다. 이미 열대여섯 살인 큰언니는 가슴이 볼록해지고 궁둥이가 팡팡해지기 시작했다. 큰언니는 복사꽃 같았다. 남자들은 침을 흘렸다. 작은언니는 새침데기였다. 작은언니는 공부를 잘했다. 

 “박샌 둘째딸이 그리도 영특하다며? 판검사는 따 논 당상일세 그랴.”


 아버지는 흐뭇해했지만 할머니는 기겁을 했다. 여자가 똑똑하면 박복하다는 것이었다. 작은언니는 달랐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은 후면 늘 두 언니에게 부엌 설거지를 시켰다. 큰 언니는 그릇을 씻고 작은 언니는 밥솥을 씻어 놓고 학교에 가야했다. 큰언니는 빨리 설거지를 하려고 부지런을 떠는데 작은언니는 수세미로 밥솥을 씻는 시늉만 했다. 큰언니가 설거지를 끝내고 개숫물을 구정물통에 비울 때 작은 언니는 잽싸게 부엌문을 박차고 나갔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큰언니는 설거지통을 들고 기가 막혔다. ‘가시나가 또 솥도 안 씻고 갔다.’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때는 퐁퐁 같은 설거지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구정물도 요긴하게 쓰였다. 음식물 찌꺼기가 든 물은 통에 모았다가 쇠죽을 끓일 때 부어 썼다. 큰언니는 밥솥까지 씻어놓고 학교에 가야 했고, 지각을 자주 하다 보니 학교 공부에 재미를 못 붙였다. 큰언니는 공부보다 십자수나 뜨개질에 능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은데다 눈썰미도 있었다. 할머니는 늘 ‘우리 명자 데리고 가는 넘은 복을 덩굴째 받아가는 기라. 손끝이 조리 매우니 살림도 포실하게 잘 할기라. 아암, 그래야 하고말고. 어미 없이 자란 티가 나모 안 되지.’하면서 측은지심을 보이곤 했다. 덕분인가. 큰언니는 잘 산다.


 어쨌든 한여름 밤의 강변은 축제장이었다. 도화 강은 그리움이다. 차가운 강물도 따뜻했다. 물에 들어가 놀다가 입술이 새파래져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갈밭에 배를 깔고 엎드리거나 등을 대고 누웠다. 낮 동안 달구어졌던 돌은 밤이 이슥하도록 따뜻했다. 시원한 강바람, 따뜻한 돌, 반짝거리는 하늘의 별무리. 여름에는 남녀불문하고 삼베 쇠코잠방이를 입었다. 여자애는 치마 밑에 속곳이라도 입었지만 남자애는 겉옷만 입었다. 강물에 들어갈 때 남자애는 보통 홀딱 벗지만 여자애는 치마만 풀었다. 가운데가 쭉 찢어진 속곳은 입으나 마나지만.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나는 봤지요. 나는 봤지요.”

 뭘 봤어. 남자 거시기? 여자 거시기? 천진해서 그런지, 이성에 눈 뜰 나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놀리는 것도 여자애들이 남자애들 놀리는 것도 노래였고 놀이였던 순수 시대였다.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하는 것을 모를 때 행복은 배가 되는 것일까. 


 그렇게 젖었던 쇠코잠방이는 금세 말랐다. 물장구치는 일에도 지치고 배가 출출해지면 돌밭에서 장작불을 피웠다. 잡은 고기를 꼬챙이에 끼어 불에 구워 먹는 맛이라니.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도 행복했던 여름밤, 별똥별이 직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것을 보면 너나없이 소원 빌기에 바빴다. 유성은 우리가 미처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산 너머로 사라지곤 했지만. 보석처럼 반짝이던 별무리, 카랑카랑 노래하는 물소리, 천국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어린 시절은 천국이었다.


 그 애가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쥐어 준 구슬처럼 반짝이는 여름밤이었다.

 “명도야 니를 후제 내 색시 삼을 기다.”

 그 애는 저자거리 삭주 할아버지의 손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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