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
22. 대나무 밭에 연꽃이 뿌리를 내리면
“영덕아 가자.”
나는 경운기 짐칸에 올라타고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서 아들을 재촉했다. 아들은 익숙하게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탈탈거리는 경운기 소리에 타작마당을 헤집던 닭들이 꼬꼬댁거리며 대밭으로, 길 아래 배 밭으로 달아나고, 경운기는 타작마당에서 샘터를 지나 농노를 따라 털털거리면서 가고, 아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마을 옆 들머리에 있는 배 밭으로 가는 길이다. 퇴직금으로 산 땅이었다. 그 천여 평의 땅에도 배나무를 심었다. 그 배 밭은 집에서 제법 멀다. 덕분에 경운기 운전에 재미를 붙인 아들이랑 산책 겸, 배나무 밑에 풀도 좀 뜯을 겸해서 나선 길이었다.
꿈뜰이 온통 하얀 꽃밭이 되었다. 어머니가 남긴 집 앞의 꿈뜰 서 마지기 논에다 배나무를 심었다. 배꽃이 하얗게 피었다. 아직 띄엄띄엄 서 있는 작은 키의 배나무지만 꽃이 제법 탐스럽다. 1년 생 묘목을 구해다 심은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그 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모습도 경이롭다.
나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등이 널찍하다. 덩치가 커서 스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들은 건장한 청년 티가 난다. 비록 말은 어눌하지만 우직하기가 황소 같은 데다 한 가지 일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면 잊어먹는 법이 없어 신통방통하다. 나무 가꾸는 데는 타고난 기술잔 지 모르지만 배나무가 아들의 입김을 받고 자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할 정도로 활착도 빠른 데다 성장률도 좋았다.
나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처음 이삿짐을 싣고 들어 온 날, 당산나무 그늘 아래서 데면데면한 얼굴로 바라보던 동네 노인네들의 그 무표정했던 얼굴이 이제는 길가에서 마주치면
“어이 박 씨, 요새 일은 우떻노?”
“박 샌도 인자 농사꾼 티가 난다이.”
“보소, 부산 양반 낼 아칙에 우리 집에 생일 밥 한 그릇 하로 오소.”
“농사자금이 나왔는데 자네도 쓸랑가?”
“역시 배운 사람이 다른 기라. 어른, 아 알고, 저리 열심이니 우리 동네는 앞으로 더 살기 좋은 고장이 될 끼라.”
“영덕이 애비야, 술 한 잔 하고 가라모.”
“그 자리가 본래 천석꾼 자리 아닌가. 벼락부자 또 난다는 소리 날끼라고 보제.”
나는 그런 말들을 귀동냥하면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농사꾼 티가 난다는 그 말은 아무리 들어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십 년이 넘게 몸에 익었던 공직자의 티를 벗는다는 것은 나비가 되기 위해 답답한 고치 속에서 번데기 상태로 견뎌야 하는 것과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동네 사람들의 배타성에 진저리를 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한 눈 박이 세상에 두 눈 박이가 들어가면 병신 취급을 받는다는 동화 속의 말이 진실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저 사람이 저라다가 말제.”
“우리들 안심시키고 있다가 땅 팔아 묵고 다시 나갈 사람이제.”
“이 촌구석이 뭐가 좋다꼬 그 좋은 직장 내삐고 와서 참 농사꾼 될라 쿠것노. 정신이 우찌 된 사람 아니모 얼런도 없는 기라.”
“지난 분에 와서 생수 공장 한다꼬 논 값만 띄아 놓고 희다 검다 말없이 꼬리 감춘 그 부동산 투기꾼들 캉 같은 족속일 끼라.”
“잿골 띠가 팍삭 속는 거 아닌지 몰라.”
“창우가 올매나 야무친 사람인데. 허술한 사람보고 그리 도와주지는 못할 끼라.”
“집을 날아갈 듯이 고치고 집 앞에 논에다 배나무를 심는다는데 전원주택 붐이 분께 집 팔아 무울라 쿠는 심뽀 아닌지 몰라.”
“여자가 빤지르르하게 생긴 기 자가용 몰고 댕기는 거 봉께 보통내기는 아니건 같더라.”
“그래도 우쨌든 살라꼬 들어온 사람인께 인정상 도와주는 기 옳은 거 아니까.”
“그 집 머스마가 좀 모지래는 상 싶제?”
“쯧쯧.”
구구한 억척들이 넘나들었지만 나는 귀를 막았다. 잿골 할머니나 창우 형님에게도 나와 어머니에 대한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체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어쩌다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본 노인네 중에는
“그 낯이 익는데. 아버님 고향이 어디신가?”
또는
“그 집하고 인척간인가?”
하고 묻기도 했지만 나는 ‘닮은 사람이겠지 예.’하면서 얼버무렸다.
소문이란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귀에만 안 들어오지 나의 태생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지고 갈 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대로 동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누구 집에 혼사가 있다면 아내도 나도 달려가 거들었고, 초상이 나거나 궂은일이 있을 때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내 몫을 해 냈다. 마을 잔치가 있을 때는 막걸리 한 말쯤은 내놓았고, 그분들과 어울려 신명도 내고 술도 마셨다.
아내 역시 마을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설거지를 도맡았고, 우스갯소리도 하면 그분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고향에 돌아와서 고향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웃 간의 유대였다. 그것은 말로 오가는 것이 아니었다. 느낌으로 알았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있는 초상 날 상여꾼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모두들 외지에 나가 살다가도 저승만 가면 그 시신이 고향 산천에 묻히길 바랐다. 묏자리를 만들고, 꽃상여를 메고 가는 것은 동네 남정네들이기 일쑤였다. 친인척이 있으면 그들이 그 뒷바라지를 하면서 마을 장정들의 어깨를 빌렸다. 장정이라 해 봤자 오륙십 대다. 사십 대는 서너 사람이 될까 말까 한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 그 자리를 나도 기를 쓰고 메워 나갔다. 고된 일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어깨에 지게 한번 걸쳐 보지도 못한 내가 해 보겠다고 나서자.
“고맙기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지.”
“어깨가 퍼렇게 멍이 들어 여러 날 고생해야 할 낀데.”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산길을 오르기가 쉬운데 자네가 그리 하것는가.”
물론 처음엔 오히려 내가 거치적거리는 존재였다. 힘이 덜 드는 상두꾼 자리에 세워 주었는데도 다른 상두꾼들과 장단을 맞추어 가며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 비지땀만 흘렸었다.
“해 보니 심이 보통 드는 것이 아니제?”
“그렁께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우리 겉이 지게 등태가 썩도록 지게 짐을 진 사람이라야 되제.”
“그래도 이리 험한 일을 하겠다는 기 가상 하이.”
나는 농민 신문을 구독해 열심히 읽어 나가고, 농사 정보나, 과수 등에 관한 것을 알려고 농촌지도소를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담당자와 면담도 하고 얼굴도 익혔다. 배나무에 관해서 나온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사거나 빌려서 읽었고, 이웃 마을에 배나무 과수원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품종 선택에서부터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거름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조달하고 주어야 하는지 등, 조언을 구했다.
내 고향에는 단감 재배 농가가 많았다. 웃담 단감은 품질 보증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을 만큼 당도가 뛰어나고 육질이 부드럽고 사각거린다고 했다. 단감 작목반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과수 품종을 단감나무로 할까 하다가 단감 재배 농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는다는 소식을 듣고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배나무를 입식했다. 배나무도 이 고장 토질에 맞는다는 것을 이웃 배 재배 농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배 맛이 좋다는 것을 맛을 보고 알았다.
요즘은 배도 시설 재배 농가가 많이 느는 추세지만 나는 노지에다 심었다. 창우 형님의 도움을 끝없이 받는 입장에서 그분에게 여러 가지로 고마움을 느낀다. 만약 그분들이 없었다면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타향과 진배없었을 것이다. 가까운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는 고장에서 잿골 할머니와 창우 형님은 타인이지만 친 동기간이나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부지, 다 왔어예.”
아들이 배 밭 들머리에 경운기를 세우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듬직한 아들의 손을 잡고 배 밭을 바라봤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들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배나무 가지를 잡아 줄 때도 아들과 함께 하고, 배나무 사이에 호밀을 뿌리고 벨 때도 아들과 함께 한다. 분사기로 꽃가루 수정을 할 때도 아들이 호스를 잡아 주고, 그물망을 씌울 때도 아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부자지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다가 농촌 살이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것이구나. 아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 아들도 늘 아버지와 같이 있으니 좋다고 했다.
배나무는 초기 병해충 방제를 제대로 못하면 활착이 느리고 자람이 약하다는 것을 안 것도 요 근래의 일이다.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지력을 높여 주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거름을 많이 내고, 땅을 갈아엎어 주는 것, 배나무 밑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호밀이나 볏짚을 깔아주거나 비닐을 깔아 보온을 해 주는 것 등, 배우면 배울수록 배워야 할 게 끝도 없었다.
이제 나뭇가지를 제대로 잡아 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여태까지는 수직으로 키웠지마는 3년 생쯤 되면 가지를 잡아 늘어뜨리고 말뚝을 실하게 박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단 하루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낼 짬이 없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녁 해거름이 내려야 허리를 펼 수 있는 꽉 찬 시간이었다. 어떤 때는 하루가 36시간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비록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안했다. 상관의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아랫사람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 홀가분한 기분이라 할까. 땅은 노력한 만큼의 보람이 나타났다. 한 시간을 일하면 그만큼의 효과가 나타났고, 열 시간을 일하면 또 그만큼의 효과가 나타났다.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환경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영덕아, 우떻노? 배꽃이 참 예뿌제?”
“응, 아부지예. 에 뻐, 우리 누야처럼.”
그때였다.
“여보!”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아내의 은색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길옆에 섰다. 아내의 반대편 차 문이 열리면서 한 처녀가 살포시 내렸다. 뒤이어서 아내도 내렸다.
“새아가, 어서 오이라. 당신은 장에 간다더마 연화는 오데서 만냈노?”
“삼거리 주차장에서 만냈지 예. 조금 전에 차에서 내렸답니더.”
“누 우 야!”
영덕이가 연화를 향해 뛰어가고, 나는 아내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연화는 영덕이를 향해 다가오고 아내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내와 나란히 서서 두 젊은이를 바라봤다.
아들은 연화의 손을 잡고 흔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들이 벙긋벙긋 배꽃같이 웃었다.
나는 두 젊은이를 그윽이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불러 본다. 어머니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연화는 바로 그 꽃 보살이었다. 선암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그 소녀 보살이다. 아니 비구니계를 받은 스님이다. 법명이 <蓮花>, 새삼스럽게 그녀의 긴 머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내가 알던 어린 여승은 어디에도 없다. 한창 멋 부리고, 사랑놀이 할 이십 대의 생기발랄한 처녀다. 저 아름다운 처녀가 어째서 환속을 하고 우리 영덕이에게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의 인도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연화를 볼 때마다 부처님의 가피를, 아니 어머니의 염원을 생각하게 된다.
“참 어울리는 한 쌍이지 예?”
아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내 년쯤에는 혼인을 시키면 어떨까?”
“내 년은 안 됩니더. 시킬라모 올 가실에 하모 어떨까 싶기는 한데. 연화네 부모님 하고도 의논을 해 봐야 하고 예. 저 아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믿읍시다. 우리 아이에게 저리 지극 정성인 아이가 변할 리가 있겠소.”
연화가 환속을 하고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 구월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단발머리의 가발을 씌고, 승복 대신 자주색 개량 한복을 곱게 입고 찾아온 연화는 우리가 알던 꽃 보살도, 비구니 연화 스님도 아니었다.
“속명으로 그냥 연화라고 불러 주셔요. 그리고 절 딸처럼 생각하시고 있게 해 주셔요. 스승님께 허락받고 온 길입니다. 저를 돌려보내도 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영덕 동자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고향에 돌아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들의 병이었다. 이사 한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집안 정리하느라 어수선한 나날 속에서 아이에게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을 때다. 기운 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나돌아 다니던 아이가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아이를 싣고 진주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식 불명의 아이는 좀체 깨어나지 않았다. 링거 병을 달고 누웠던 아이는 몇 시간 만에 다행히 깨어났지만 아예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멍하니 천정만 보고 누워 있었다. 입원을 시키고 종합 검사를 했다. 일주일 만에 나온 검사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신체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라는 말만 들었다. 아이는 손끝 하나 까딱 하지 않았고,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도 초점이 없었다.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냐면 일어났다.
정신과 의사는 실어증이라고 했다. 원래 저능아에다 말을 잘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표현을 할 줄 몰랐을 뿐 두뇌 활동은 왕성한 편이라는데 할 말이 없었다.
“요 근래에 아이가 충격받을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담당 의사는 신중하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다만 환경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도시에 살다가 농촌으로 들 어 온 지 일주일쯤 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는
“이 아이는 정신 연령은 낮지만 몸은 다 자란 청년이고 예민한 편입니다. 아마 아이에게 새로운 환경이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병원에 보름을 있으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병원 측에서 퇴원 통고를 했다. 아이의 퇴원 수속을 밟는 날, 무슨 우연이 그런 우연이 있을까. 외래 환자 접수창구 앞에 줄을 서 있는 꽃 보살을 보았다.
내가 ‘어!’ 하기도 전에 꽃 보살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고, 꽃 보살은 ‘처사님’하면서 얼굴에 환해지더니 서슴없이 다가와 내게 합장을 했다. 꽃 보살은 이미 예전의 그 소녀 보살이 아니었다.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에 회색 바랑을 짊어지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와 꽃 보살은 동시에 똑 같이 묻고는 서로 겸연쩍어하며 웃었다.
“같이 수행하는 도반 스님이 몸이 불편하다기에 모시고 같이 왔습니다. 다들 잘 계시지 예? 이리 뵈니 너무 반가워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이사했다는 소식은 선암사 스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영덕 동자님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기 있습니다. 퇴원수속 밟는 중입니다.”
“왜요? 어디가 아파서예?”
말은 조용조용했지만 표정은 아주 안타깝고 다급하게 내 말을 재촉했다.
“모르겠습니다. 별 이상은 없는데. 충격에서 온 실어증이라는데 충격받을 일이 있어야지 예. 병원에서 퇴원을 하라기에.”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면서 휴게실로 갔다. 같이 온 스님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것 같았다.
꽃 보살과 내가 나란히 병실에 들어서니 아내가 깜짝 놀랐다.
“스님!”
“보살님!”
그 순간 천장을 향해 있던 아들의 눈동자가 깜박이는 것 같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누 우 우 야! 누 우우 야아.”
손을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서더니 꽃 보살을 얼싸안았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꽃 보살도 얼굴에 홍조를 띠며 아들을 마주 안았다. 아들이 엉엉 울면서 누야 소리를 반복하자 아내도 울고, 꽃 보살도 울고, 나도 돌아서서 눈꼬리를 찍어냈다.
아들의 병의 원인은 그리움이었다.
꽃 보살은 그 길로 우리랑 같이 왔다가 영덕이를 달래 놓고 다시 떠났다.
“내 이름은 연화, 알았지요? 다음에 만날 때는 연화라고 불러 주셔요. 그리고 아프지 마세요. 밥 많이 드시고, 운동 많이 하셔서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야 이 연화 영덕 동자님 만나러 옵니다. 알았지요? 이렇게 아파 누워 있으면 연화, 안 옵니다. 알았지요?”
영덕이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상 꽃 보살이 떠나자 영덕이는 ‘싫어, 가지 마, 가지 마’ 하면서 매달렸다. 꽃 보살은 영덕이의 손을 잡고
“꼭 다시 올게요. 꼭. 약속. 이젠 아프지 말아요. 알았지요?”
하면서 떠났었다.
그리고 지난해 구월에 연화는 우리 앞에 속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연화는 지금 자기 집에 가 있다. 죽세공 학원에 다니기 위해서다. 3개월만 배우면 자격증을 딴단다. 죽세공 자격증을 따면 다음에 우리 마을에다 조그만 인테리어 점을 내겠단다. 우리 집을 둘러싼 대나무를 솎아 영덕이와 같이 대나무와 나무로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들어 등산객들에게 팔겠단다. 특히 영덕이가 가지고 놀던 그 대침을 만들어 멋지게 연꽃 문양을 그려 넣겠단다. 실용적이면서 비싸지 않고 귀한 물건을 만들어 여행객에게 선물용으로 팔겠단다. 그리고 배 밭을 가꾸며 살겠단다.
“외삼촌은 언제 오신다고 했소?”
“저녁에 오신다고 했습니더. 아마 성구 데름도 같이 올낍니더.”
요즘 외삼촌은 보촌댁 아주머니와 부부 연을 맺어 깨가 쏟아진다. 그 다리 역할은 물론 잿골 할머니가 했다. 외삼촌과 보촌 아주머니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사주한 사람은 나다. 김 주사 부부의 공도 컸다. 김 주사 부인이 된 진숙 씨가 중간에서 보촌댁을 구슬리고, 나와 성구가 외삼촌을 구슬렸다.
처음엔 펄쩍 뛰던 외삼촌도 더 늙기 전에 밥 한 끼라도 며느리 눈치 안 보고 따뜻하게 얻어먹고, 서로 가려운 곳 긁어 줄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며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종용하자 못 이기는 척 맞선을 보더니
“아니, 오빠 아니야?”
“니, 맞제? 동수 동생, 그 코흘리개 딸내미?”
하면서 찰떡궁합이 되었다. 만나고 보니 외삼촌의 친구 동생이었다.
외삼촌의 양아들 정호도 외삼촌이 새장가를 들자 집을 구해 나갔다. 사천 읍에서 과일 상회를 열었다. 외삼촌이 뒷손을 봐주었다는 것이다. 조만간 장가도 갈지 모른단다. 잘 된 일이다. 우리 집에서 나오는 배는 모두 책임지고 팔아주겠다고 장담했다.
외숙모가 된 보촌 아주머니는 나만 보면 아귀찜을 푸짐하게 만들어 주시면서 중신 채라고 한다. 평생 중신 채 받아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돈다. 외숙모님의 아귀찜 솜씨는 아내가 물려받기로 했지만 아내는 아직 한참 멀었다. 연수중이다.
다만 늘 가슴 안에 아릿한 그리움으로 자리 잡은 사람은 금이 이모와 월남 아저씨다. 농촌에 들어와 살면서, 농촌에 정이 들면서 나는 가끔 금이 이모를 생각했다. 왜 금이 이모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사천 어디가 고향인지도 모르니 찾을 수가 없었다. 외삼촌과 성구에게 사천 재향 군인회가 있는지. 월남 파병 나갔다 온 상이군인들의 쉼터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하반신 마비에다 부인이 미용실을 한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해 보라고 부탁을 했었다. 사천 읍에 비슷한 부부가 살았지만 오래전에 두 사람 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분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금이 이모와 월남 아저씨를 따뜻한 환상 속의 사람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여보, 오늘 일은 틀린 것 같으니 그냥 집으로 가입시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늘 일은 접어야 할 것 같소. 저 녀석 하는 걸 보니. 영덕아, 경운기 끌고 먼저 집에 가거라. 새 애기도 같이 가지.”
“네, 아버님, 영덕 씨, 우리 집에 가요.”
탈 탈 탈 짐칸에 연화를 태우고 영덕이는 신이 나서 경운기의 속도를 올려 들길을 달리고 아내는 제 차를 타고 가고, 나는 경운기를 타고 돌아가는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주문처럼 외우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겨우 알 것 같다.
<대나무 밭에 연꽃이 뿌리를 내리면 발복 한다.>
나는 오래전 장함 산을 내려와 그 고가를 바라보며 섰던 둔덕에 올라 내 집을 바라봤다. 연꽃 봉오리처럼 보였던 바위 솔이 있던 기와지붕에는 대나무 가지가 사르륵사르륵 신비로운 소리를 내며 빗질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 푸르른 대나무가 포옥 감싸고 있는 집, 나지막한 돌담이며, 활짝 열린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 그 안에 온갖 봄꽃이 피어 있는 마당이며, 푸성귀가 자라는 텃밭이며, 하얀 나비 떼가 앉아 춤추는 것 같은 꿈뜰, 샘터 아래 작은 연못에는 연잎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때 저 집을 바라보면서 <어셔가>의 음침한 전경을 떠올렸던 것일까.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선조 할아버지의 트릭이 아니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