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사하기에 좋은 날
작은 창문을 통해 볕살 하나 명주실처럼 뿌려진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은 아내의 갈색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부드럽게 마사지한다. 다시 시작하는 일이 남은 날, 이삿짐을 싼다. 자잘한 가재도구를 뭉치, 뭉치 묶으며 아내는 이사하기 좋은 날이라고 한다.
다시 봄을 맞이했다.
어머니 일 주기가 지났다.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사이 내 볼은 보기가 민망하도록 살이 쏙 빠졌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내 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어머니를 잃은 아픔보다 내 태생의 비밀을 알았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 큰 짐이었고, 외삼촌을 만나고 와서는 어쩌면 영순이가 나로 인해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고, 영덕이를 보면서 저 아이가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고 있구나 싶어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외삼촌이 찬성하고, 어머니가 원했던 대로 이사 갈 준비를 했다.
우선 그 집을 쓰기 좋게 고치는 일이었다. 건물 뼈대는 그대로 두고 바위 솔이 가득 핀 기왓장을 걷어내고 벽을 털었다. 황토벽을 다시 쌓고, 부엌이며 마루를 현대식으로 고쳤다. 기왓장을 다시 얹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생활공간으로 꾸몄다.
허물어진 사랑채를 뜯어내던 날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잔 줄 알았다던 어머니, 그 사랑채에서 아버지가 장가간다는 소리에 시샘하듯 들어선 아이, 옛말에도 본처가 시집온 지 수 삼 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어 첩을 들였더니 첩이 입덧을 하자 얼마나 속을 끓였던지 본처도 아이가 들어서더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으면 내가 생겼더란 말인가. 어머니는 아마 그때 속이 새까맣게 타 버렸을 것이다. 그 새까맣게 탄 씨앗이 나였다니.
그 모든 일을 잿골 할머니의 아들인 창우 형님에게 맡아해 주었다. 창우 형님은 우직하고 근실한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농사꾼이라면 잘못된 표현인지 모르나 그다지 커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검은 살빛을 가진 다부진 인상의 사람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은 더 많았다.
“들어와 살라꼬? 펜대만 굴리던 사람이 농새를 우찌 질라꼬. 내 겉이 애리서부터 들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야 농사를 짓지. 아무나 덤빌 일이 아니지. 뼛속꺼지 상일꾼이 돼야 농사꾼 인기라.”
“형님께 열심히 배움 서 하나 둘, 깨쳐 나가야지예. 많이 가르쳐 주이소.”
“참말로 들어 올 끼가? 니 촌사람 될 자신 있나?”
“예. 작심했십니더.”
“처음에는 다들 촌에 와 살모 편할 끼라꼬 생각하지만 그것은 흥청망청 돈 잘 쓰고 사는 사람들 이약이고 얀다무치고로 맘 잡아 안 묵으모 못 배기는 기 촌 생활이다.”
처음 그분을 찾아가 고향에 들어올 뜻을 비치며 도움을 청하자 했던 말이다.
“자네가 들어온다니 그래야 마땅하지만 살다 보모 이런저런 소리가 나돌 텐데. 심이 안 들것나?”
잿골 할머니 역시 염려스러워했다.
“소문이란 별거 아닙니더. 살다 보면 저절로 묻히겠지예.”
“그렇긴 하다만. 농사짓기가 수월치가 않은데. 손에 흙 안 묻히고 살던 사람이 험한 일을 할 수 있을랑가 싶기도 하고. 자네 안 사람은 좋다 했나?”
“고향을 잃어버렸으면 모르나 안 이상 다시 찾아야지 예. 집 사람도 촌에 들어오는 걸 찬성했습니더.”
나는 사무실을 다니며 주말만 되면 영덕이를 데리고 고향에 가서 집 고치는 일을 도왔다. 그 앞에 있는 논은 창우 형님이 관리하고 있었기에 이사 갈 때까지는 그분에게 농사를 부탁했다.
나는 그 논에다 배나무를 심을 생각이다. 물이 짧아서 천수답이라 할 수 있는 논이니까 다랑이를 반반하게 밀어 과수원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 혼자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 보니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이 없었다면 이 나이에 궁상맞게 술잔이나 기울이며 한숨만 토하고 살았을 것이다. 앞으로 농사짓는 일에는 완전 백치인 내가 배워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았다. 농사꾼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야 했다.
집수리가 끝나는 날,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꿈뜰에 갔었다.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도 아담하게 가꾸었다. 산수유나무와 자두나무는 그 자리에 살리고 담장은 낮게 둘렀다. 밖에서도 훤히 마당이 보일 정도로 허물어진 곳만 다시 돌을 쌓아 정리를 하고 나니 집의 때깔이 났다. 남향으로 난 대문을 없애고 동쪽의 담을 헐고 대문을 만들었다. 타작마당에 있는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 해 주었다. 동쪽으로 대문을 내면 맑은 기가 집안으로 들어와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렇게 했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 샘터 앞에는 작은 연못을 팠다. 가뭄이 기승을 부린 탓에 동네 공동으로 쓰는 지하수도 모자라 절수를 한다는데도 그 샘터에는 물이 흘렀다. 비가 오면 물은 철철 흘러 꿈뜰을 적신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 샘의 물만으로 농사를 지었다니. 그냥 흘려버리기 아까워서 못을 팠다. 연꽃 몇 포기 심고 논고동도 키우고, 민물고기 몇 마리 넣어 키울 것이다.
영진이와 영덕이는 무척 좋아했다. 영진이는 우리가 전원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여름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농활 활동을 하려 와야겠다고 별렀다. 영덕이는 논두렁을 겁도 없이 뛰어다니며 비단개구리를 잡아 오고 개미집을 파다가 마당가에 옮겨 놓기도 했다.
사랑채 옆에 서쪽으로 있던 텃밭은 밭이었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가시덩굴과 산딸기, 자잘한 대나무가 풀과 함께 뒤엉켜 무성했다. 그 텃밭을 굴착기로 반반하게 다졌더니 푸성귀를 가꾸어 먹기엔 충분했다. 아내는 창우 형님께 부탁을 해서 거름을 내고 고추며, 가지, 들깨 등 씨앗을 얻어다 심었다. 텃밭 주위에는 호박도 심고, 물외도 심었다.
“우리가 이사 올 때쯤이면 저 텃밭이 제법 어울리겠지예?”
“땅이 기름져야 곡식이 잘 된다는데 거름발이 작아서 알 수가 없지마는. 무공해로 먹을 수 있으니 좋기만 하네.”
“신기해예. 내 손으로 남새밭을 가꾼다는 기.”
“재밌소?”
“장난 삼아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재밌네예.”
“인자 내가 명예퇴직을 하고 나모 돈 씀씀이도 줄이야 할 끼요. 영진이 등록금이나 댈 수 있을 랑가.”
“영진이 걱정은 안 해도 될 낍니더. 그동안 교육보험 들어 놓은 것도 있고, 지가 장학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한다니께.”
그랬다. 산 입에 거미줄 칠 정도야 아니니까. 나는 조기 퇴직을 신청했다. 어차피 농촌에 들어가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둘러 터전을 옮겨 다지 고도 싶었고, 한시라도 빨리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직장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십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고도 진급이 안 되어 애를 태우던 몇 년 세월도 있었다. 기천만원의 뇌물을 받쳐야 한다는 소문을 들으며 그것이 통과 의례라는 데는 학을 뗄 일이었다. 결국 나는 돈을 안 쓰기로 아내와 합의를 했고, 몇 년이 걸리든지 정식으로 내 차례가 되어 과장으로 승진하는 길을 택했다. 3년을 기다린 끝에 정식으로 과장이 되었고 부산시 외곽에 위치한 중학교 서무실로 발령이 났었다. 시골 향기가 듬뿍 나는 곳이었다.
나는 관내에서 가장 젊은 서른여섯에 사무관 시험에 합격했었다. 내 공부 방식은 특이해서 아내와 영진이의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어떻게 공부를 했냐 하면 천정에다 책을 매달아 놓고 방바닥에 누워서 달달 외우고는 한 장씩 찢는 것이었다. 만약 잠이 들면 아내는 핀으로 사정없이 내 허벅지를 찔러야 했다. 안 그랬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니 아내는 감시자 역할을 야무지게 했었다. 허리가 부실해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정 주사보 시절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었다.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를 피하려다가 장골 서너 길은 됨직한 언덕으로 추락을 했는데 헬멧을 쓴 탓에 죽음은 면했지만 머리에 금이 가서 대 수술을 했고 근 6개월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척추에도 무리가 갔었는지 병원을 나오고도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해도 어렵다는 사무관 시험을 나는 첫 도전에서 따냈고, 관내에서 이름이 났었다.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 빈틈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진급에는 지장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상관을 만나면 ‘사람 참됐다.’ 소리를 들었고, 나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상관을 만나면 ‘일처리는 빈틈없이 하지만 늘품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빽이란 것이 없는 사람이니 나는 내 실력 것 살아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장인어른이 초등학교 교장 직에 있는 것이 힘이 되긴 했었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시고 집안에서 소일하시지만 시간 보내기가 힘드신 모양이시다.
처갓집은 딸부자다. 아내가 셋째 딸이고 그 밑으로 처제가 두 명에 막내 처남이 있었다.
나에게는 복에 겨운 혼처 자리였다. 혼인할 적에는 장모 되는 분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학력도 기우는 데다가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이니 부모 된 입장에서는 당연히 딸을 고생길에 넣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리란 것은 당연지사지만 아직도 나는 장모님에게 서운해한다. 지금은 우리 셋째 사위가 젤이라고 치켜세우지만 다 자신의 딸이 시집살이를 덜하게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아직 그 응어리가 남아서 어쩌다 처가에 들리면 장모님께 한 마디씩 한다.
“장모님 아직도 변호사 사위 볼랍니꺼? 그 사람 보내까예?”
우리 딸은 어른들끼리 정한 혼처 자리가 있다는 둥, 셋째 사위 될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한 법대생이라는 둥, 자네는 그 사람 발바닥에도 못 미치면서 감히 내 딸을 넘보느냐는 둥 하면서 내 자존심에 상처를 냈었다.
“여보게 사위, 인자 그 꽁한 맘 좀 풀 수 없것나? 내 딸이 지 에미 잘못으로 서방 시집은 엔간히 사는 모양이네 마는 자식까지 딸린 사람이 꼭 그렇게 내 가슴에 옹이를 박아도 되는가.”
“아직도 마음에 안차 하시잖습니꺼.”
“아니네. 인자 우리 셋째 사위가 젤이란 걸 아니 그 말 좀 고마 하게.”
아내와 맞벌이할 때 아내는 친정을 많이 도왔다. 선생 봉급이야 뻔하고 자식들은 줄줄이니 내리 공부를 시킨 셈이었다. 언니가 동생 학비를 대고, 그 동생이 직장인이 되면 또 그 아래 동생의 학비를 댔다. 막내 처남 공부는 내가 많이 도왔다. 지금 과학 기술원에서 박사 코스를 밟고 있다. 그러니 장모가 내게 기를 펼 수 없는 처지이지만 내가 사표를 내고 농촌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면 또 난리를 피울 것이다. 장인어른은 찬성을 하실지 모르지만. 그래서 처가댁에는 당분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내가 성깔 더 센 장모님을 닮지 않은 것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 가족이 농촌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적어도 오륙 년은 걸릴 것 같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한다는 각오가 없으면 농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창우 형님이 누누이 말했다.
직장에 사표 내는 것을 몇 년 보류하면서 농사를 나 스스로 지어 볼까도 생각했다. 과수나무를 심어 놓고 시간 나는 대로 와서 가꾸면서 별장처럼 그 집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농촌으로 옮길 결심이면 각단 지게 일처리를 하고 싶었다. 영덕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흙과 친해지도록 하고, 그 아이에게 분재며, 과일나무 재배 기술을 스스로 배우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내게 이 땅과 집을 마련해 남기신 뜻이 아닐까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이 집과 논을 사게 되었는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평생 시장 안에서, 행상을 해서 번 돈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물론 영덕이를 위해서였다. 아니다. 그 깊은 속내는 그 집과 그 마을과 그 땅을 사랑한 것이었다. 집 앞에 있는 서마지기 논은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여남 도가니였다 했다. 그것을 외할아버지께서 괭이와 곡괭이로 파고 바지게로 돌과 흙을 져내서 제법 큰 세 도가니로 만들었다 했다. 잿골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나는 영덕이를 시골에 데리고 가서 키우고 싶다는 말을 가끔 했었다. 그 아이가 식물과 동물들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도 했고, 공해가 그 아이에게 나쁠 것 같다는 말도 했었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피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아들이 대대로 땅을 목숨같이 여기며 살아온 농민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과장님 짐 다 쌌습니꺼?”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은 김 주사와 이 주사 강 주사다. 사무실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다. 이 주사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고, 강 주사는 아직 총각이다.
“다들 와 주어서 고맙기는 한데, 근무할 시간에 우짠 일이고? 근무 태만은 징계 위원회 회부 감인데. 외근부에 머라꼬 달아놓고 온기고?”
“학교 부지 선정 관계로 업무 차 출장입니더. 출장비나 많이 챙겨 주이소.”
김 주사가 고개를 외로 꼬며 어깨를 움츠리며 손을 싹싹 비비는 시늉을 했다. 아내는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공문서 허위 신고로 경고 감이군.”
“과장님 너무 한 거 아닙니꺼. 송별회도 안 하고 이사를 가다니예.”
“집들이할 때 부를라 캤는데, 너무 섭섭해할 것 없지 않은가.”
“과장님 김 주사가 처갓집에 가고 싶어서 그랍니더. 깨가 쏟아질 때에 떨어져 살라쿠니 불알이 시큰거려서 밤잠을 설친기라예.”
“강 주사가 시샘하는 거 보니 장개 갈 나가 된 것 같으네.”
“지도 마 빨랑 장개나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고 살랍니더. 거기 등 따시고 속 편하것지예.”
“농사짓는 기 누 아 이름인 줄 아나? 참말로 고생길로 들어서는 기라.”
이 주사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고향이 양산의 오지 마을이라는 이 주사는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단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집에서 남의 소작을 부치고, 한우 비육을 하면서 어렵게 검정고시를 거쳐 중, 고등학교 학력을 따고 공무원이 된 사람이다. 방송통신대학 축산과에 다닌다고 했다.
이 주사는 가난이 뼈에 사무치고, 농사짓는 것이 노동 중에서도 상 노동이라서 좀 편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 공부하는 것을 택했단다. 주경야독을 해서 공무원이 되었지만 겨우 7급 공무원 봉급으로는 세 동생들의 뒷바라지도 힘에 부친다고 하는 노력파다. 농사짓는 일이 넌덜머리가 나서 공무원이 되었지만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살아야 하는 공무원 생활도 한심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축이다.
나는 이 주사를 보면서 머지않아 저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란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농사철이 되면 연가를 내고 고향에 가서 모내기를 하고 가을걷이를 하는 친구다. 막내 동생이 농고를 나와서 농촌에 남았단다. 후계자 자금을 받아 젖소를 키우며 부모님을 모신다고 했다. 이 주사는 자기 몫의 젖소가 두 마리라면서 돈 생기는 대로 투자를 할 계획이라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농촌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단다.
모두들 전원생활을 꿈꾸면서 왜 한 발이라도 일찍 들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돈벌이가 확실치 않아서? 아이들 교육 문제로? 문화 혜택을 못 받아서? 육체노동하는 것이 겁나서?
그런 것들이 다 문제가 되는 것이 지금의 농촌 현실이다.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택하고 싶은 곳을 여론 조사한 결과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두들 고향에 돌아가 노후를 의탁하고 싶다고 했다. 농촌은 정년퇴직이 없는 곳이니까 노인들이 소일하기엔 안성맞춤 인지도 모른다. 힘닿는 데까지 들일 하면서 맑은 공기와 텃밭에서 가꾼 무공해 푸성귀와 맑은 생수 마시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소박한 꿈인지 모른다.
그러나 창우 형님의 말을 들으면 농촌이 살아남는 방법은 많이 배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과학영농으로 농촌을 가꾸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이러다가는 쌀도 수입에 의존하는 시대가 올지 모르겠다는 염려를 했었다. 농지가 자꾸만 줄어드는 경향인 데다 젊은 사람들은 힘든 벼농사짓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소출도 적은 데다 국가에서 수매도 제값을 안쳐주니 벼나 보리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하우스나 특수작물로 대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축산을 하기도 하는데. 목돈 투자해 푼돈 벌어 써는 격이니 수지 타산이 안 맞아 다시 공장으로, 하루살이 노동판으로, 장삿길로 나선다는 것이었다.
“자네도 짐을 거의 벗었으니 촌에 들어올 생각을 굳힐 수 있었지 않은가. 만약에 아이들이 어릴 때 같으면 꿈도 못 꾸었겠지. 또한 논도 있고, 집도 있으니 단언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이야.”
맞는 말이었다. 막연하게 전원생활의 낭만만을 그리워했지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것으로 어떻게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대안은 없었다.
“올부터는 휴 농지 벼농사짓기 운동을 전개하라면서 면서기들이 농민들을 독려하고 다니더군. 부동산 투기업자들에게 넘어가 묵정이가 되어 썩고 있는 논들이 많은 데다 노인네들이 힘에 부쳐서 포기한 다랑이나 천수답 같은 논들이 산으로 환원되는 사례가 빈번하거든. 나도 몇 년 전에 답이었던 골짝 논을 다시 임야로 등록을 했제. 어머이는 한 사백 여 평 되는 것을 묵카 삐는 것이 어찌나 아깝다 야단이신지 어머이 달래느라고 애 묵었었네. 그 논은 어머이와 아부지의 피땀으로 맹글어진 논이었거든.”
“엔간하모 형님이 농사를 짓지예.”
“나도 나가 육십 줄에 앉으니 심든 일은 못 하것어. 경운기가 들락거리기라도 하는 논이모 우짜든지 가까 볼라 캤는데. 너무 먼데다 골짝 물 끌어 대기도 힘들고, 길도 좁아서 할 수 없더구마. 팔라꼬 내놓았네. 묏자리는 될랑가.”
“형님이 일궈 놓은 논은 인자 누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까 예?”
“글쎄. 아이들에게 농사 지라는 소리는 하기가 싫은 기 부모 심정이 아니것나. 저것들은 공부를 했싱께 봉급쟁이 노릇이나 함시로 살았시모 싶으네. 그래도 참 희한한 기 큰 머스마가 촌에 들어오고 싶어 해서 걱정이거마.”
“도시 생활이 생리에 안 맞는 모양이지예.”
“공장에서 기름때 묻히고 사는데 하도 경기가 안 좋으니 촌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기지만 그런 심뽀로는 촌 생활을 못 견디지. 그러니 우찌 들어오라 쿠것노.”
어려서부터 농촌에서 잔뼈가 굵은 창우 형님의 말에는 고달픈 농촌 살이 비애가 깔려 있었다.
“과장님 머하고 있습니꺼? 빨리 나서지 않고 예. 대충 짐 다 쌌습니더.”
창문 밖을 내다보고 서 있던 나는 김 주사의 말에 현실로 돌아와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알았으니 먼저 내려가게.”
짐은 이미 아파트 마당으로 다 날라졌고, 이삿짐센터에서 온 트럭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이웃이었던 아파트 아낙네들이 여기저기 서성이며 구경도 하고 잔손도 도우며 이사 가는 것을 서운해하는 축도 있었다. 아내는 그 아낙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같았다. 영덕이의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내가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자신도 원했던 농촌 살이지만 막상 이사를 결심하고 나니 두렵다는 말을 먼저 했었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데 시골에 가서 생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쥐꼬리만 한 퇴직금 다 날리기 전에 살림에 보탤 수 있는 수입이 있는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당신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예.”
“해 봐야지. 첫 술에 배부르리라 생각은 말아야 것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하모 안 되것나. 당신이 힘들지 모르는 데 참아낼 수 있것나?”
“저야 당신 따라서 사는 건 데 당신만 보낼 수는 없지예.”
아내는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 내러 오고 머합니꺼.’ 하는 표정으로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둘러보았다. 이 집을 장만하여 이사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팔 년 세월이 흘렀다. 영진이가 태어난 그 해 집을 장만해서 이사를 한 날 밤에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집안을 돌아다녔었다. ‘저 아이가 복덩이라 예. 이리 빨리 내 집을 지니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아예. 진짜 우리 집 맞습니꺼. 어머이 고맙습니더. 어머이 덕이라예. 당신이 총각 때부터 청약 부금 부은 기 어머이 덕이 아니고 머겠습니꺼. 전세금 안 나가는 것만도 우리는 부자라 예.’하면서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쓰시던 장롱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저 장롱을 이참에 내삐고 가까예? 영덕이 옷이랑 잡동사니가 가득한데. 당신이 버리지 못하게 해서 그대로 있었지만 이번 참에 고물상에 주고 가입시더.”
“다른 것은 다 버리고라도 저 농짝은 가지고 갑시다.”
그 농은 내가 예닐곱 살 적에 산 것이었으니 사십여 년을 바라본 것이었다. 두 칸짜리에다 문양도 없는 단순한 나뭇결이었는데 아직도 튼튼했다. 원호 청 재활 센터에서 월남 아저씨가 주문해서 맞추어다 준 것이었다. 상이군인 아저씨가 만든 것이라서 노련한 목수가 한 것처럼 매끄럽지는 못해도 그분들의 정성으로 빚은 것이어서 그런지 볼수록 정이 갔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한 짝은 어머니의 소지품을 보관했고. 한 짝은 영덕이의 소지품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방을 휘 둘러보고 나오려던 나는 무엇에 감전된 것처럼 그 자리에 딱 멈추어 섰다. 내 눈에 그것이 보였다. 추레하고 볼품없는 대침이었다. 방문 옆 구석자리에 던져져 있는 대침은 아들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베개였다. 어째서 영덕이가 저것을 버리고 간 것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대침을 주워 들었다. 대침의 연꽃 문양은 군데군데 댓살이 떨어져 너덜거렸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애지중지 할 적에는 금세 대나무의 숨결이 들릴 듯 살아있는 것 같았는데. 아들 손에서 다 낡아 못 쓰게 되어 있었다. 나는 대침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았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내 몸을 감쌌다. 아니, 아버지의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 당신은 어떤 누구십니까.
나는 어머니의 방문을 닫고, 현관문을 닫았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