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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04. 2024

어떤 사랑

<단편소설.  끝>

3.      


 6월이다. 세상은 온통 푸름으로 휘감았다. 지혜는 이삿짐을 싸다가 창밖을 본다. 아치형 장미넝쿨에 핀 붉은 장미가 새치름하다. 가슴이 헛헛하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 너덧 달 전만 해도 생판 남이던 남자를 위해 이삿짐을 싸고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 이것도 사랑일까. 혼자가 싫어서 둘이 되길 원한 걸까. 혼자도 외롭고 둘도 외롭기는 마찬가지겠지. 남은 나날 말벗이 되어주고 돌봐주고 싶으니까.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어떤 관계든 상관없다. 꼭 이유를 따지라면 그 사람에게 내가 필요하니까.

 『지혜네 곰탕집』은 한 달간 문을 닫았었다. 그동안 새 주인에게 식당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주방기기 사용법이며 곰탕 끓이는 법과 비빔밥, 반찬 종류까지 전수해 줬다. 새 주방장으로 입성한 안주인이 끓인 곰탕과 비빔밥과 반찬을 시식하기도 하며 순조롭게 바통을 넘겼다. 며칠 전 잔금도 받았다. 이제 『지혜네 곰탕집』은 남의 집이 되었다. 괜찮은 사람에게 넘긴 것 같다. 새 주인이 개업을 준비하는 사이 지혜는 이삿날을 받았다.  

 석 달 전이었다. 지혜는 시세보다 헐값에 식당을 내 놨다. 부동산 침체기라는데도 돈 덩어리가 큰 식당이 쉽게 팔릴 것 같지 않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건물이나 땅은 임자가 나타나야 한다. 지혜가 그 땅을 살 때도 지나가다 우연히 땅 판다는 팻말을 봤었다. 그 땅을 보자 ‘여기구나.’ 확신 했었다. 그 땅과 지혜의 운이 다했다고 느낄 때 누군가 새 주인이 들어올 것이라 믿었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땅과 사람은 운 때가 맞아야 사고 팔린다. 

 식당을 내 놨다고 입소문을 냈지만 서둘지 않았다. 의외로 식당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 젊은 부부를 택한 것은 지혜였다. 식당일은 고단하다. 주인이 젊지 않으면 오래 계속하기 힘든 것이 음식장사다. 지혜는 애착이 붙은 식당을 돈 때문에 넘기기 싫었다. 언제든 곰탕 생각이 나면 들릴 수 있는 단골집으로 삼고 싶었다. 비록 남의 집이 되었지만 그 집에는 지혜와 딸의 애정이 배어 있었다. 주방기기 하나, 벽지 한 장, 식탁 하나에도 딸과 나눈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식당 개업을 하고 장사를 할 때였다. 장사가 끝난 저녁 시간에 홀 대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식탁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향아는 빗자루 질을 하고, 지혜는 대걸레질을 했다. 청소를 하다말고 향아는 빗자루를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지혜를 바라봤다.  

 엄마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 왤까?

 누가 나를 좋아해? 뾰족뾰족 모가 났는데.

 아니야, 개업한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단골이 줄을 서잖아. 엄마는 후덕해. 후덕하다는 말이 맞아. 엄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잖아. 그게 나랑 다른 점이야. 난 깍쟁이거든. 

 네가 깍쟁이라고? 착하기만 한데? 욕심 좀 부리면 좋겠다.

 욕심이야 부리지.

 어떻게?

 요롷게.   

 향아는 지혜를 끌어안고 춤을 추었다. 대걸레와 빗자루가 발에 차여 아프다고 툴툴 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녀는 깔깔 대며 껴안고 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정 한 보따리 풀어놓고 딸은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났다. 

『지혜네 곰탕집』도 팔렸다. 지혜는 눈을 꼭 감았다. 쓸쓸한 감회 한 줄조차 털어버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거야.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가 택한 길이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지만 살아내는 것은 내 몫이지. 그 사람이랑 사는 날까지. 인연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인연, 인연이 다하면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거나 끝나겠지 생각했다. 

 지혜는 다시 이삿짐을 싼다. 이삿짐이래야 간단하다. 붙박이 장롱과 서랍장에 들었던 옷가지를 꺼내 박스에 담고 책 몇 권 추리고, 이불보따리 싸고, 그게 다였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주방기기도 냉장고도 냉방기도 고스란히 새 주인에게 물러주기로 했다. 세상에 나올 때 맨몸으로 왔으니 세상을 떠날 때도 맨몸으로 떠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쓰레기만 남기고 가야 하는 일생이다. 쓰레기를 줄이고 가는 방법도 잘 사는 방법이다. 

 지혜 옆에서 이삿짐 싸기를 돕던 정자언니가 눈물을 훔치며 코맹맹이 소리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다. 아우야, 다시 생각할 수 없어? 팔자를 고치려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야지. 죽어가는 사람 만나서 병수발하다 초상칠 일 밖에 더 있어? 손해 보는 장사 한 번이면 족하지 두 번 씩이나 하려고? 다시 생각해 봐. 나도 아르바이트 자리 잃어서 돈줄 막히는 것도 무섭다. 

 언니, 손님 많을 때 언니 부르라고 새 사장님께 부탁해 놨으니 걱정 마. 이젠 언니도 돈돈 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 노인이 되면 모아둔 돈도 다 못 쓰고 죽을 것 같아. 다닐 수 있고, 돈 쓸 여유 있으면 그렇게 살아. 아등바등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우리 집은 아무 때나 놀러 오면 좋지. 등 하나 넘으면 되잖아. 그 사람이랑 텃밭 가꾸는 낙도 누리려고. 둘만 오붓하게 살아보려고. 장사를 해도 마음은 떠내기였어. 그 사람 덕에 안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람 돈도 없다며? 자네 돈 쓰면서 병수발 하기 십상인데. 자네 노후 생각도 해야지. 이 집 판 돈 그 사람 밑에 다 들어가고 나중에 빈털터리 되면 요양원이나 들어가겠어? 요양원도 돈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단다. 사람이 제 앞가림부터 해야지. 자네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고. 향아에게 말이나 한 겨?

 알면 마음 상하겠지. 모르는 게 약이야. 다음에 어미 찾아오면 알게 될 걸 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그 애 내 딸 아니야. 형님 딸이지. 

 도대체 그 사람 뭐가 좋은 겨? 비리비리 해서 사내구실도 못 하겠던데.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나이에 그런 게 꼭 필요할까? 그냥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어.

 그 사람도 진심이디? 그 사람 아내는 어쩌고? 설마 머리카락 쥐어뜯기는 것은 아니겠지.

 졸혼한 사람이야. 그 사람 아내를 만났었어. 계약서도 썼지. 아무 조건 없다고. 그 사람 옆에 있게만 해 달라고 했어. 무보수 간병인 붙였다고 생각해 달라고 했어. 

 뭐라던? 

 오히려 고맙다고 하더라. 병든 사람 내친 것 같아 불편했다면서.

 바보도 너 정도면 중증이다. 

 정자언니는 한심해 했다. 지혜는 싱긋 웃었다. 어차피 인생은 외길이다. 아무리 돌고 돌아봐도 자신이 택한 길 밖에 갈 수 없다. 그 길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길이 열린다. 지혜는 이삿짐 박스를 현관 앞에 내 놓고 주방에 들어갔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그릇이며 반찬통을 쓰다듬었다. 주방 뒤편에 있는 장독간에도 들렸다. 간장, 된장, 고추장 항아리도 그대로 두었다. 빈 항아리 서너 개만 챙겼다. 새 집에 들어가면 양념꺼리도 새로 만들어 새 그릇에 담아야지. 그 사람 입맛에 맞게. 지혜는 속이 꽉 찬 숲을 바라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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