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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꽃씨

<단편소설. 1>

by 박래여

<단편소설>

엄마의 꽃씨

박래여


1. 기다림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나. 때로는 잊기도 했고, 잊고도 싶었다. 회오리바람처럼 휘감아 도는 삶을 살 때는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당신을 잊기도 했었다. 삶에 지쳐 이제 그만 살고 싶다고 할 때마다 불쑥 솟구치던 당신의 형상이 나를 살렸느냐. 이제 거두어가렴. 이승에서 못 만난 당신, 저승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오래 살았다. 참말로 오래 살았다. 내 기다림은 기다림으로 끝났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내 가슴 속에 남은 당신의 잔재는 더욱 뚜렷해지고 명료해진다. 당신이 준 꽃씨는 해마다 장독간을 환하게 밝혀주는데 당신은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엄마는 장독간의 화단 앞에 앉아있다. 칠월 복중 따가운 햇살도 엄마를 말릴 수 없다. 나는 엄마의 자리에 도톰하고 큰 소나무 모탕을 놓아두었다. 반반한 모탕 위에 솜을 풍성하게 넣어 만든 둥근 방석을 깔았다. 엄마는 그 모탕에 앉는다. 지팡이 두 개를 양쪽으로 눕혀 놓고 엄마는 허리와 고개를 숙인다. 엄마의 손이 채송화를 어루만진다. 엄마의 허리는 굽었다. 작달막한 키와 꺾인 허리를 둥글게 말면 갓 피려는 채송화 꽃봉오리 같다.

엄마, 덥다. 방에 들어가자.

나는 엄마의 등에 손을 댄다.

인자 내가 가서 만내야제. 일찌거니 날 좀 데불러 오제.

엄마의 중얼거림이 내 귀를 간질인다.

그래, 엄마 방에 들어가자. 녹두죽 끓여놨는데. 우리 먹자.

엄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엄마의 눈은 구부정하게 엎드린 내 등을 타고 넘어가 서쪽 하늘에 닿는다. 동녘에서 출발한 해는 하늘 중간에 떠 있다. 온몸이 끈적끈적 젖는다. 누가 엄마를 저리도 목마르게 할까. 스물다섯 살에 청상과부가 된 엄마, 나보다 세 살 위의 언니와 유복녀인 나를 낳아 기른 엄마다. 우리 자매를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낸 엄마, 남의 집 품앗이부터 시장터 국밥집 허드렛일, 술도가에서 식모살이까지 했던 엄마, 돈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 냈던 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엄마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인근에 참치 공장이 생겼고 엄마는 그 참치공장에서 칠십이 넘도록 일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참치공장에 다니던 언니가 사내 연애로 배부터 불러왔을 때도 엄마는 언니를 탓하지 않았다. ‘인연이다. 월하노인이 매자 준 부부연이라 생각해라.’ 형부 될 사람이 지지리도 가난한 집 맏아들이었다. 결혼식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엄마는 혼인신고부터 하라했다. 엄마는 ‘너거 둘이 좋으모 된다.’며 전셋집을 구해주고 살림살이를 챙겨 주셨다. 통 크고 오지랖 넓은 엄마는 동네에서 여장부로 통했다. 그 시절 청상과부가 딸 둘 데리고 살려면 여성성을 벗어던져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엄마의 눈은 푸른 하늘에 닿는다. 기다림에 짓무른 눈에 물방울이 맺힌다.

엄마, 아버지 따라 가려고? 그래도 가지 마. 나 혼자 두고 갈 생각은 말아. 안 보낼 거야.

나는 엄마를 일으켜 지팡이를 쥐어주고 엄마의 허리를 감쌌다. 엄마는 지팡이와 내게 의지해 한 걸음 두 걸음 현관 쪽으로 간다. 세 살짜리 아이의 아장걸음도 엄마보다 낫겠다. 나는 마당과 축담의 경계에 맞춘 미닫이 유리문을 열었다. 엄마의 궁둥이를 살짝 밀어 문지방을 넘게 한다. 엄마는 지팡이 두 개를 구석에 세우고 마루에 걸터앉아 ‘후’ 숨을 몰아낸다.

문 닫지 마라. 갑갑하다.

방충망은 닫아야 모기가 안 들어오지. 방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 쐬게.

기계바람 싫다. 고마 여 앉자 있자.

나는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나도 엉덩이를 마루에 걸치고 엄마 옆에 앉았다. 낮은 처마가 갑갑증을 일으킨다. 엄마의 집은 초가지붕이 양철지붕으로 바뀌었다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그 위에 두꺼운 철판을 덮은 일자집이다. 동네 집들이 양옥으로, 현대식으로 바뀔 때도 엄마는 옛집을 고집했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 손을 보긴 했다. 솜씨 좋았던 내 남편 덕에 벽과 부엌을 헐어 방을 넓히고 싱크대를 놓았다. 마루는 그대로 두고 축담 앞에 미닫이 유리문만 달았다. 엄마는 그 정도에 만족했다.

나는 장독간 화단의 채송화를 바라본다. 엄마를 슬쩍 곁눈질하다 또 채송화를 본다. 엄마는 채송화 같다. 장독간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 핀 앙증맞은 꽃. 한여름 땡볕에 다섯 개의 둥글고 붉은 꽃잎을 열고 수줍게 웃는 꽃. 나는 슬그머니 방충망을 열고나와 채송화 한 송이를 땄다. 채송화의 꽃말이 뭐였지? 가련한 신세였던가. 꽃말을 생각하자 울적해진다. 엄마나 나나 서방 복 없으니 가련한 신세 아닌가. 나는 엄마에게 꽃을 내민다.

아이고 예뿌다. 우째 이리 새칩을꼬. 또옥 니 것다.

나는 이 꽃 근처도 못 가지. 꽃이 엄마 닮았는데.

엄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구나. 너는 해바라기다. 훤칠한 키나 서글서글한 눈매나.

아버지 닮았지?

엄마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나는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다. 방문 위의 벽에 걸린 사진첩을 바라봤다. 흑백 사진 몇 장이 액자 속에 들어있다. 그 속에 빛바랜 사진 한 장, 군복을 입고 팔짱을 낀 남자가 아버지라 했다. 멋진 남자다. 군대에서 찍은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이 유일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워온 딸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 친인척들도 박가네 씨는 아닌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엄마나 아버지나 언니도 닮지 않는 나는 꽤 이국적으로 생겼다. 짙은 눈썹, 쌍꺼풀 진 서글서글한 큰 눈, 엄마보다 모가지 하나는 더 붙은 큰 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사람들은 언니를 아버지랑 빼 박았다면서 나는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니는 외탁을 했다. 외할베랑 빼 꽂았다. 일제 말기 징용 갔다가 돌아가신 우리 아부지랑 똑 같다. 너거 외할매가 그라더라. 외손녀가 외할배 닮아 미인이라꼬.

내가 미인이야? 아무리 봐도 못 생겼는데. 엄마 닮았으면 예쁠 텐데.

내 안 닮아서 더 예뿌다. 니가 해바라기다.

엄마, 올해는 왜 해바라기를 안 심었어? 해마다 돌담 아래 해바라기가 키 재기 했잖아.

니가 까묵고 안 심었다 캤제. 심어봤자 느리도 못 볼 걸. 통일은 인자 물 건너갔다.

통일? 얄궂다. 엄마, 예전에 이산가족 상봉도 하고, 금강산 여행도 했잖아. 진짜 그런 일이 있기나 했는지. 꿈같다. 지금은 다들 전쟁 날까 두려워해. 대통령이 선재 공격 운운 한다니까. 폐지된 국가 보안법이 살아날 거라고도 하더라. 사라진 줄 알았던 빨갱이란 말이 자주 등장해. 꼰대들이 그런다네. 종복 좌파 빨갱이들이 활개 친다고. 삼청 교육대가 부활해야 한다나. 말세다 진짜.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나라가 어떻게 변할지 다들 불안하다네.

내 말은 벌써 엄마의 귓등으로 넘어갔다. 엄마가 웅얼거린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옹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엄마의 노래는 가늘다. 아니, 구슬프다. 나도 엄마랑 같이 흥얼거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옹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엄마, 이 노래 첫 연에는 통일이여 오라가 아니라 통일을 이루자야.

엄마는 들은 척 만 척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노래는 분단의 노래다. 1947년 안석주 선생이 작사하고 그의 아들 안병원 선생이 작곡해서 발표한 동요다. 1989년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해 부른 이후 모두가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다. 또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두 정상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6·15 남북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 수행원들과 손을 잡고 함께 부르기도 했다. 2000년 5월 서울에서 열린 <평양어린이예술단>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이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엄마는 왜 그렇게 통일이 되길 원해?

통일이 되모 온다고 했는데.

누가? 엄마 첫사랑?

야가, 늙은 에미한테 뭔 소린 고? 내 아직 정신 줄 안 놓았다.

맞아. 울 엄마 기억력은 나보다 좋은 걸. 엄마, 백 살까지만 살아. 나랑 사니까 좋지? 이 딸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나도 엄마 없으면 누굴 의지하고 살겠어. 애들은 저거 살기 바빠 얼굴 보기도 힘든데.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자. 그러다 자는 잠에 엄마 손 잡고 아버지도 만나고 이서방도 만나러 갔으면 원도 한도 없겠다.

엄마는 가만히 내 손을 잡는다.

우리 딸, 니가 올해 몇 살이고?

세에 살!

나는 애교를 부리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엄마는 내 손가락을 잡고 내 눈을 본다.

그때 너거 엉가 젖믹일 때였제. 도원이가 세 살이었을 기다. 전쟁이 났을 때.

전쟁? 육이오동란을 말하는 거야? 그때 지리산 일대까지 북한군이 쳐들어왔었다고 했지? 맞다. 그때 그 북한군 분대가 우리 집 공터에 텐트를 쳤다고 했잖아. 며칠이나 있었어?

몰라. 오래는 안 있었제. 금이네 쇠 한 마리를 끌고 와 잡았제.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삶아서 잔치를 했다 아이가. 그 쇠괴기 국을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멕있다. 젊은 군인들이 참 친절하고 싹싹했어. 펴양 말을 우리가 몬 알아 듣고 자꾸 뭔 소리냐고 물으모 저거도 웃었제. 그런데 말이다. 하리는 자고 일어났더이 군인들이 아무도 없더라. 진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더라.

금이네 소를 그냥 끌어다 잡아먹었어?

아니야, 그때 시세로 후하게 쳐주더란다. 그 사램이 참 반듯했제.

누구? 엄마를 좋아했다는 인민군 소좌?

엄마는 눈을 지그시 감고 백일몽을 꾼다. 꿈속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활짝 핀 채송화처럼 입맵시가 예쁘다. 볼은 발그레 홍조가 든다. 예쁘다. 젊을 때 엄마는 채송화처럼 예뻤다. 나는 엄마를 닮지 않아서 속상했었다. 나는 백일몽에 빠진 엄마를 흔든다.

엄마, 그 사람, 김 소좌라는 사람이지? 엄마가 가끔 말해주던 이 동생이라는. 맞지?

엄마는 미동도 없다. 검버섯 핀 파리한 얼굴이 움찔거린다.

엄마, 그 사람 이야기 해 줘.

쪼깨 전에 내가 무슨 이약을 했는지도 몰 것는데 그 사람 이약을 우찌 하노? 다 이자무따. 인자 얼굴도 기억 안 난다. 너거 아부지 얼굴도 이자뭇는데.

엄마가 좀 전에 그랬잖아. 참 반듯한 사람이었다고.

통일이 되 먼 온다고 했제. 통일이 되 먼........

통일이라.

나는 한숨을 쉰다. 통일은 물 건너갔다. 이산가족 상봉도, 금강산 구경도 할 수 있을 때만 해도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1998년 남북분단 이후 50여 년간 단절 됐던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게 되었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의 노력 덕이었다. 그 뒤 2000년부터 개성공단을 설립하여 가동됐을 때만 해도, 남북을 잇는 끊어진 철로를 다시 놓겠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은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꿈처럼 금강산 뱃길 여행이 이루어졌을 때 남편과 나는 엄마를 모시고 금강산 여행을 갔었다. 엄마의 칠순 잔치 대신 꿈에 그리던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렸었다.

금강산 여행은 부산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속초 동해항으로, 동해항에서 금강 호를 타고 장전 항으로, 장전 항에서 작은 배를 타고 고성 항에 내렸다. 밤바다를 환히 밝히던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은 은하수 같았다. 고성 항에서 관광버스를 이용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온정리에 닿자 만물상 코스와 구룡폭포 코스가 갈라졌다. 첫날은 만물상 코스로 접어들었다. 입구의 길 양쪽에 나무기둥이 열녀문처럼 세워져 있었다. 두 개의 나무 기둥을 잇는 현판에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자> 글씨가 박혀 있었다. 우리를 인솔했던 가이드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북한에 도착하면 북한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둘째 날은 구룡폭포 코스를 밟았다.

엄마는 금강산을 보며 행복해하다가도 땡볕에 총을 든 채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북한군을 보면 손수건에 눈물을 찍었다. 나는 엄마 귀에 대고 수시로 속삭였다. ‘저 군인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큰일 나. 엄마, 선물도 먹을 것도 주면 안 돼. 저 숲속 어딘가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 말도 붙이지 마. 그랬다간 북한으로 끌려간다고 했어.’ 엄마의 눈은 새까맣게 탄 북한군과 관광객을 인도하는 여자 안내인을 보며 ‘남남북녀라더니 여자들이 동글동글 인물이 좋네. 그 사람 고향이 평양 어디라 했는데.’ 말끝을 흐렸었다.

엄마, 그 사람이 누군데?

내 이동상이다. 김 소좌라고

가만 김 소좌? 북한군이었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럼 육이오 때 만났겠네.

엄마는 또 고개만 끄덕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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