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머니
"어머이는 아직 안 오셨나?"
나는 현관을 들어서기가 바쁘게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다. 아내는 베란다에 내놓은 화분을 손질하던 중인지 마른걸레를 들고 베란다를 나오며 나를 맞았다.
"올 생각이 없나 봐예."
토요일이라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집으로 온 길이었다.
우리 집은 만덕터널을 건너면 보이는 곳에 있다. 5층짜리 오래된 아파트 건물의 3층이다. 스물네 평에 다섯 식구가 살지만 아내의 살림 솜씨는 호두 껍데기처럼 여물어서 나는 늘 아내의 살림 솜씨에 감탄한다. 집안은 정갈하게 꾸며져 있고 안온했다. 45살에 겨우 관리과장의 직함을 가진 나의 박봉으로 이만 한 집을 가지게 된 것도 아내의 알뜰살뜰한 살림 솜씨 덕분이다. 더구나 홀시어머니 뜻 받들고 두 아이까지 군더더기 없이 키우는 것을 보면 내가 장가 하나는 잘 간 것 같다. 다만 아내의 얼굴에 끼인 먹구름 한 점만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늘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추를 달고 산다. 그 고통은 부부가 당연히 나누어져야 할 것이지만 아내는 자신의 죄인 양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큰 소리 내는 법이 없다.
아내는 걸레를 빨래 통에 담아 놓고 주방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영덕이 데리고 가면서 며칠 있다가 오시겠다더니 꽤 오래 계시네예. 모시러 가려고 전화드렸더니 오지 말라 하시데예. 백일기도가 아직 안 끝났다면서. 영덕이가 우찌 그리 어머이를 따르는지 샘이 날 지경이라예. 지가 그리 모지게 하는 것도 아닌데."
"당신 편하고 좋지 뭘 그래?"
"그렇지도 않아예. 그 애가 지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 말썽꾼이모 오히려 낫겠어예. 어머이도 계시모 지가 편한 걸 예. 영덕이랑 없는 디끼 계시면서 집안일 다 해 주시잖아예."
"별소리 다 듣것다. 시어머니 편하다는 며느리는 거짓말쟁이 라드라."
"참 당신도, 내가 새내긴 줄 아는 가베. 한솥밥 먹은 지가 얼만데."
아내가 곱게 웃으며 눈을 흘겼다.
나는 점심상을 차리고 있는 아내의 등 뒤에 가서 와락 껴안았다. 아내에게서 새콤한 김치 냄새가 났다. 나는 아내의 그 냄새만 맡으면 흥분을 누를 수 없다. 팡파짐한 엉덩이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 왔다. 두 다리 사이의 빳빳해진 것이 아내의 엉덩이를 더듬자
"밥 무야지예."
"하모, 이 밥 먼저 묵자."
아내를 덮쳤다. 아내는 ‘누가 오모 우짭니꺼’ 하면서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가끔 아내에게서 격정을 느낄 때가 있다. 첫정에 눈 뜬 사춘기 소년처럼 더듬거리면서 급하게 아내를 덮치면 짜릿한 쾌감에 온몸이 뜨거워지곤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일까, 아내는 내 살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 엉뚱하다면서 은근히 그런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결혼 전 사주를 보러 갔던 어머니께서
"너거 둘이는 속궁합은 잘 맞는다더라만 평생 한 가지 괴로움은 가지고 산다는구나."
속궁합이란 바로 서로의 살 맞춤이 아닌가. 한 가지 어려움이란 내 아들일 것이다. 내 나이쯤 되면 사주팔자라는 것을 믿고 싶어 질 때가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도 그 베개 가지고 갔나?"
"그라 모예. 영덕이가 그 베개가 아니면 잠을 못 자는 걸 암시롱 말라 묻습니까."
아내는 어지럽게 벗어던진 옷들을 주워 옷장에 걸면서 말했다.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한 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안방 창문가로 갔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들어왔다. 바닷바람은 아무리 시원해도 끈끈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창밖은 시끄러웠다. 늘 먼지와 소음에 두통을 앓으며 살다 보니 만성이 되어 창밖의 소리에 둔해진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오늘은 왠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 바다와 인접해 살다 보면 바다처럼 마음이 넓어진다고도 하는데 나는 갈수록 마음이 더 좁아지는 것 같아 내심 아내에게 미안하다.
문득, 내 귀에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들렸다. ‘사그랑, 사그랑.’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두리번거리다가 지난번 산행에서 본 그 대밭에서 나던 소리였단 걸 깨달았다. 아니, 아들이 가지고 노는 대침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대침이란 대나무를 자잘하게 쪼개 만든 약간 타원형의 네모반듯한 대나무 베개다. 아들이 신줏단지처럼 안고, 베고 노는 것인데 크기는 인삼주 한 병 담은 포장 통만 하다. 큰 대를 자잘하게 잘라 납작하게 다려서 엮은 모양새가 이름난 죽세공의 솜씨가 아니면 만들기 힘들 만큼 단아하고 섬세한데 전체적으로 불로 지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연꽃 모양의 문양이 수 놓여 있었다. 베개에 새겨진 연꽃 문양은 무척 정교했다. 영덕이의 손때가 묻어서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 베개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내가 예닐곱 살 적일 게다. 옷장 안에 들어가 놀다가 그 베개를 발견하고 꺼내서 가지고 놀았었다. 그날 저녁에 시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열화 같이 화를 냈었다. 좀체 큰 소리 내는 법도 없고, 회초리 드는 법도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보물단지처럼 감싸고돌던 당신의 아들에게 처음 매를 든 날이기도 했고, 두 번 다시 그 대침에 손을 대면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을 때 어머니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활활 탔었다. 차갑고 섬뜩한 어머니의 눈빛은 어린 내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여러 날 밤을 요 위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게 했었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장수를 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드나들기 시작한 남포동 거리는 내 유년의 텃밭 같은 곳이다.
어머니는 그날 팔 생선을 경매받기 위해 꼭두새벽에 나를 둘러업고 어시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치열하고 이기적인 군상들을 바라보며 자랐고, 또한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는 인정을 체험하며 자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만큼 마음이 넓었고 여유와 인정이 있고 웃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나는 울적해지면 자갈치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돌아오곤 한다.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악다구니 소리를 듣다 보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배인 그 비릿한 냄새가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것 같아서다.
나는 어머니가 좌판에 갈치, 고등어, 오징어 등을 그날 그날의 생선 시세에 따라 바꾸어 차리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어느 때는 아나구(붕장어)라는 횟감을 한 다라이 받아 놓고 팔기도 했다. 물뱀처럼 생긴 그 고기들이 서로 뒤엉켜 뒹구는 것도 징그럽고 흉측스러운데 어머니는 그 고기를 떡 주무르듯 했다. 시멘트 바닥에 목판을 놓고 그 위에 뱀처럼 꿈틀거리는 아나구의 대가리를 불끈 잡아 얹고 송곳으로 정확하게 정수리를 꽉 꽂아 놓고는 칼로 목 주위를 살짝 도려 껍질을 쭉 벗겨 내는 모습은 차라리 신기에 가까웠다. 하얗게 드러난 살덩이가 이리 구불 텅 저리 구불 텅 요동을 칠 때는 내 입에서 쉴 새 없이 헛구역질이 솟아나곤 했다. 지금도 나는 회만 보면 그 생각이 먼저나 입맛을 잃곤 한다.
대 여섯 살이 되면서 나는 자갈치 시장 안의 명물이 되었다. 모두들 나를 귀공자라 불렀다. 해끄무레한 얼굴은 귀티가 나 보였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꾸며 주셨다. 귀공자의 품위를 한껏 갖추고 어머니의 옆에서 말장난을 하다가도 그 아나구를 파는 날이면 줄행랑을 쳤었다. 그 허연 살덩이는 자잘하게 토막 내어 봉지에 담아도 하나 같이 살아 꿈틀거렸다. 내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바닷가로 도망을 치면
"멀리 가지 마라."
어머니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배어 있었다. 나는 어시장 앞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색시 집 앞의 의자에 가서 앉아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시장가의 바다는 지천에 널린 쓰레기며, 생선 비린내로 늘 내 비위를 긁곤 했다.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그 부류의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그 냄새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울컥 치미는 토사물을 바다에 뱉으며 웩웩거릴 때, 속옷이 보일랑 말랑 하는 짧은 치마에 단추가 툭 터져버리면 수박만 한 젖통이 바다에 풍덩 빠져 버릴 것 같은 여자가 내 등을 정답게 다독거려 주곤 했다.
"어머 귀공자님 또 오셨네. 껌 하나 드릴까요? 귀엽기도 해라."
홍등가라는 그곳의 색시들은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짙은 화장에 걸쭉한 쌍소리를 입에 달고 있었지만 맘씨만은 고운 여자들이었다. 거친 뱃사람들을 상대하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겠지만. 나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벗어나 그들 곁에 가서 노는 날이 많아졌다. 그네들의 담배 심부름도 곧잘 해 주고 용돈도 벌었다. 그 아가씨들 중에 사천이 고향이라던 금이 이모가 있었다. 금이 이모는 어머니와 무척 친했다. 돈만 모으면 고향에 가서 미장원을 하겠다고 했다. 금이 이모에게는 기다리는 월남 파병군인으로 나가 있는 애인이 있었다.
어머니의 장사 솜씨는 어수룩한데도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과묵하셨고, 젊은 데다 얼굴이 그다지 밉지 않았다. 화장이라도 하면 꽤 미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는데 머리도, 옷도, 그저 수수하게 하고 다니셨지만, 물건만큼은 확실한 것만 취급했다. 싱싱하고 물 좋은 것이 아니면 좌판에 올리지도 않았고, 오후가 되어 약간 생선의 색이 가도 미련 없이 좌판을 거두어 버렸다.
"옴마, 그래 갖고 우리 돈 벌어?"
어린 내 마음에도 어머니의 상술은 형편없어 보였던지 그렇게 물은 기억이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 돈맛을 알았냐? 괘 한 타. 우리 둘이 묵을 낀데 쪼맨만 벌어도 남는다."
그랬다. 어머니와 나, 단 둘만의 살림이었다.
어머니의 생선장수 시절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끝났다. 맹모삼천지교를 실행하신 건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학교 근처로 셋방을 옮기셨고, 이번에는 채소 장사를 했다. 여전히 학교 가까운 시장에서 좌판을 벌렸지만 싱싱한 채소를 떼어다 팔기 위해 구포다리를 건너 김해 바닥의 농가를 찾아다녔다.
나는 어머니가 절대로 늙지 않을 줄만 알았다. 언제나 세파에 물들지 않는 사람 같았다. 시장에서 만나는 장사치 아주머니들과 닮지 않았다. 늘 조금 손해 보고, 양보하고, 이웃을 자신의 친인척처럼 돌봤고 싱싱하고 알찬 것만 골라 팔았다. 그래서일까. 이웃 간에 인심을 얻고 있었고 단골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 줄은 알았지만 돈 아쉬운 줄은 모르고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학교에 잘 오시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자모회에 참석하면 나는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집에서 보던 모습도 아니었고, 시장에서 보던 모습도 아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 참 고와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다. 친구들과 시장 안을 지나게 되면 어머니를 멀찍이 피해 다녔고 어머니가 학교에 와서 채소장수란 것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한 적도 있었다. 생활 기록부에 '식료품 가게 운영'이라고 적어 낸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것을 아신 어머니가 하루는 나를 불러 앉히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 에미 채소장사하는 것이 부끄럽냐? 그 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내 아들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신을 속이고 싶어 하는 것이구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란 것을 생각해 보거라. 너의 본분이 공부하는 것이라면 이 에미는 스스로 노력하여 내 아들을 훌륭한 인격자로 키우는 것이다. 홀 에미 밑에서 반듯하게 자라는 것이 또한 니 스스로 해 내야 하는 일이다. 에미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한다면 너는 내 아들 될 자격이 없다. 세상에는 진실로 부끄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를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어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넘을 속이지 않고, 넘한테 구걸하지 않고, 지 몸 뎅이 하나로 노력해서 사는 것은 떳떳한 일이다. 에미가 그리 벌어서 니를 키우기 땜새 니는 부족함을 모르지 않느냐."
그랬다. 나는 돈에 궁하지는 않았다.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없이 만들어 주셨고 나를 그만큼 믿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잘 입었고 잘 먹었다. 아마 내 친구 중에 나를 아주 부잣집 아들이라 믿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한다고 해도 믿지 않았으니까.
"나는 니를 믿는다."
나는 어머니의 그 믿음을 배반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겐 오직 내가 전부라는 것을 아니까. 또한 어머니의 그 말은 내가 옆길로 새는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믿어 주셨기 때문인지 모른다. 믿음, 피붙이라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어머니 앞에선 정직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중 3일 때다. 어머니는 나의 진학 문제로 담임선생님을 만나려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권섭아, 너의 어머니 정말 멋진 분이시구나. 아주 해박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더라."
담임선생님이 홀딱 반하셨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이 다르다 하시며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것은 집안의 내력이라며, 그래서 양반의 자식은 상거지 차림이라도 표가 나기 마련이라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며? 생활은 어렵지 않니?"
그날 밤에 나는 어머니께 따졌었다.
"옴마, 선생님이 우리 아부지 이야기하시데. 온제 돌아가셨십니꺼? 우떤 분인데예."
어머니는 희미한 전등 밑에서 양말 짝을 깁다가 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 눈이 어찌나 슬퍼 보이 던 지 내가 먼저 울먹일 뻔했다. 내게서 눈길을 거두신 어머니는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언젠가 이 에미가 소상히 이약 해 줄 때가 있을 게다. 그때까지는 두 번 다시 묻지 말거라. 니 아부지는 깊은 속병으로 돌아가셨니라. 더 짚이 알려고 들지 마라. 때가 되모 알 거다."
언제나 내가 듣는 아버지 이야기는 거기서 단호하게 끝났다.
담임선생님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어머니를 찾아 옹색한 셋방을 들락거렸고 나는 후줄근한 그 선생님이 홀아비란 사실을 알고 속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 덕분에 참고서며 공책 등을 공짜로 얻은 적이 많았고, 짬짬이 수학 과외지도도 받을 수 있어 공부하는 데는 무척 도움이 되었지만, 무턱대고 집에 찾아와 죽치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가려는 심보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가끔 하교 길에
"엄마 갖다 드려라."
슬그머니 건네는 연애편지였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도 전혀 감동하는 기색이 없었다.
"옴마, 뭐라고 썼어?"
"니가 착하고 공부를 잘해 기특하다는구나."
"치이, 우리 선생님이 옴마 사랑한다던데!"
"씰데없는 소리. 걱정 말거라. 니 에미 단단하니라. 니는 니 공부나 착실히 하모 되는 기다."
어머니와 담임선생님의 연애는 현진건 작가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란 단편에서 나오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의 짝사랑으로 끝을 맺은 모양인지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선생님이 어떤 노처녀랑 재혼을 한다는 설이 나돌았다. 어쩌면 선생님은 실연의 아픔을 그리 달래려고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옴마, 우리 선생님 애인 있대요."
"그래, 아주 잘 됐네."
나는 어머니의 심드렁한 반응에 실망하고 말았다.
내 기억에는 어머니에게 애인은 없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온 어린 날 중에도 어머니가 도망갈 것이라는 걱정을 해 본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면 어머니는 남자라는 존재를 아예 울 밖에 세워 둔 적이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 담임 선생님만은 나 때문에 많이 참고 대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내가 지금의 아내 순정이와 열애를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점도 그 점이었다. 어머니는 아직 젊었고, 조금만 다듬으면 어딘가 남의 눈에 띄는 분위기를 가진 분인데 왜 아무도 어머니 곁에 없느냐는 거였다. 바람을 피운다고 누가 나무라기를 할 처지도 아닌데. 나는 어머니에게 좋은 남자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머니는 석녀가 아닐까, 어쩌면 레즈비언 인지도 몰라 이런 생각도 했다. 순정이가 준 제뉴어리란 책에서 나는 처음 레즈비언이란 말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누군가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금이 이모도 있었고, 춘이란 과부 아줌마도 있었으니까. 그 과부 아줌마는 내가 아주 싫어하는 여자였다. 그 과부 아줌마는 어려서부터 내 고치만 만지려 들어서 기겁을 했다. 어머니의 오랜 친구들이었지만 어머니와 그들은 영 딴판이었다.
어머니에겐 특이한 구석이 있긴 했다.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는 절에 다녔다. 내 손을 잡고 절 나들이를 하는 날에는 어머니가 선녀 같은 날이기도 했다. 절에 가기 전날 밤에는 목욕탕을 찾았고, 집에 오면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던 그 대침을 꺼내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곤 원앙이 수 놓인 무명 보자기에다 고이 쌌다. 어머니는 그것을 품에 안고 절 나들이를 했다. 절에 가면 그 보자기를 꼭 명부전 앞에다 놓았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연유를 물었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알 필요 없다.’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그 대침이 장롱 깊숙이에서 나온 것은 내 아들 영덕이가 서너 살 때다. 아들은 그 베개를 제 어미 젖통처럼 끼고 살려고 했다. 장난감이 필요 없었고 베개가 필요 없어졌다.
어머니는 또 책 읽기를 좋아하셨다. 세간이라곤 없는 콧구멍만 한 셋방에 앉은뱅이책상은 내 것이었고, 방바닥에서 벽을 따라 아무렇게나 재인 것은 어머니가 읽은 책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을 섭렵하며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그 책들 중에 내가 좋아한 소설책은'개선문''사랑할 때와 죽을 때''데미안'등이었고, 어머니가 아끼는 책은'생의 한가운데''부활''테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등이었다. 어머니는 프르스트와 윤동주 시인의 시집도 애송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비추지 않으셨고 친척이라고 찾아온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는 책 읽기와 염불 암송하기, 절에 다니는 것뿐이라 믿었다. 꼭 한 번 어머니가 내게 던진 의미심장한 말이 있었다.
"우찌 저리 똑같을꼬..."
책상 앞에 앉아 독서삼매에 빠져 있던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께서 내 등 뒤에 앉아 계셨다. 내 작아진 교복을 뜯어 만들어 입은 군청색 통바지(몸빼)에, 내 낡은 체육복 윗도리를 입은 어머니가 두 손을 얌전하게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포갠 채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옴마, 온제 왔십니꺼?"
내가 당황해 허둥대자 어머니는 황급히 눈을 딴 곳으로 돌리면서 머쓱해져서 말했다.
"쪼깬 전에 왔다. 무슨 책이 그리 재밌노?"
"한국 고전 소설입니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었다.
"니보고 나도 보자."
나는 어머니의 그 눈빛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나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면서 싸한 아픔이 온몸을 감쌌었다.
"머하고 있십니꺼? 국 다 식거 마."
아내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다 보며 말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내일은 어머니가 계신 선암사에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그 절은 내 어린 발자국에서 어른이 된 발자국까지 무수히 찍힌 곳이다.
"여보, 그런데 어머이가 전하고 좀 달라진 거 같아예."
"뭐가?"
"지난번 당신이 등산 다녀오시고 나선데 예 이리 묻데 예 '애비가 다른 말 없더나?' 하시기에 '아무 소리도 없었어 예'했더니 '알았다.' 하시면서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더니 그냥 방으로 들어가시데 예."
"거기 머가 이상하노. 사람도 실없기는."
"아니라 예. 그날 저녁에 술 한 잔 하시고 와서 당신은 기억이 없는지 모르지만, 어머님이 어느 산에 갔더냐고 물었지 예. 당신이 '예, 의령에 있는 장함산에 갔다 왔습니다.' 하니까. 어머님이 획 돌아서시며 '쉬거라.' 하고 방으로 들어 가삐 데 예. 지가 오히려 더 놀랬어 예. 당신이 뭔 말을 잘 못 했는가 싶어서. 어머님이 어찌나 쌀쌀하시든지. 그 담날부터 며칠을 문밖출입도 안 하시고 밥맛도 없다 하시 더마 영덕이 데리고 절에 가신 담서 나섰어 예."
"거기 머가 이상하노. 참 사람도, 어머이야 한 달에 태반은 절에 가 사시는 분인데."
"따지고 보모 그렇네 예."
아내는 금세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그것이 아내의 미금이고 매력이다. 가끔은 자기주장을 확실히 해서 내 속을 긁기도 하지만 아내에게선 푹 익어 곰삭은 멸치젓 맛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또한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아내는 아들 영덕이 때문에 농익어 터질 삼십 대를 마음고생으로 푹 삭아 버린 탓에 나이답지 않게 더 사려 깊어지고 현명해진 것 같아서다.
나는 아내의 예리한 직감을 타박하면서도 내심은 아내의 말도 일리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어쩐지 나와 마주치는 것을 거북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도 받았다. 절에 다녀오겠다. 하시던 그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던진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서 새끼를 치고 있었다.
"니, 그 산 밑 동네가 우찌 생깃데? 자세히 보들 안 하고."
"어머이, 무슨 말입니꺼."
어머니, 어머니는 진정 알 수 없는 분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