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쿠, 니가 자쿠 생각나
스물 아홉 가을 쯤,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강남의 어느 카페, 창가 자리, 그녀가 늘 주문하던 카페라테 한 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오빠, 우리 그만하자."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할 자격이 없었다.
2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내 세계의 반쪽만 보여주었고, 그 반쪽조차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했다.
이별은 예고된 것이었고, 나는 그 예고를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떠나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오빠한테는 오빠 장난감이 제일 소중한 거 같아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카페를 나와 혼자 지하철을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원룸 문을 열고 불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책장의 건프라들은 희미하게 형체가 보였다. 그 윤곽들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책장 맨 끝 구석에 먼지 쌓인 MS-06 자쿠가 눈에 들어왔다.
열아홉 살에 조립했던 녀석, 몇 년째 손대지 않았던 녀석.
나는 그 자쿠를 꺼냈다.
먼지가 손끝에 뽀얗게 묻어났다. 모노아이가 빨갛게 나를 바라봤다
스물아홉 살의 남자가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플라스틱 자쿠를 들고 있는 광경. 누가 봤다면 우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이런..
자쿠를 든 채로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열다섯 살 이후 처음으로 그렇게 울었다.
이별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날, 내가 사랑한 사람에게 내 절반을 끝내 보여주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그 반쪽을 끝까지 지키려다 그 사람을 놓친 내가, 어쩌면 아주 조금 미웠다.
왜 하필 자쿠가 눈에 보였을까.
MG 프리덤도 있었고, PG 건담도 있었고, 얼마전 구매한 RG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오래된, 가장 먼지 쌓인, 가장 지고 있는 지온군 기체를 꺼내 들었다.
승자의 기체는 내 슬픔을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
패자의 기체만이, 그 밤의 나를 받아낼 수 있었다. 지온군은 일년전쟁에서 졌고, 나는 내 이 년짜리 연애에서 졌고, 그래서 자쿠와 나는 그 밤 같은 편이었다.
같은 편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 그게 그날 내가 버틴 유일한 이유였다.
휴지로 자쿠를 닦았다.
먼지를 털고, 어깨 관절을 다시 끼워 넣고, 기울어져 있던 모노아이를 똑바로 세웠다.
그 작업은 한 시간도 안 걸렸는데, 그사이 나는 스물아홉 살에서 열다섯 살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얼마전 조립했을 때 느낌과는 다르게 손끝의 감각이 옛날과 똑같았다. 그 감각이 나를 위로했다.
사람은 이별하지만, 손끝의 기억은 이별하지 않는 걸까.
책상 위의 플라스틱은 떠나지 않는다. 그 변치 않음이 그날 밤 나를 구했다.
새벽 세 시, 책상 위에 깨끗하게 다시 선 자쿠를 보며 나는 맥주 한 캔을 땄다.
건배할 상대는 없었지만 혼자 중얼거렸다. "수고했어." 자쿠에게 한 말인지, 헤어진 그녀에게 한 말인지, 나 자신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셋 모두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다음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에게는 내 세계 전부를 보여주겠다고. 숨기지 않겠다고. 책상 위 플라스틱까지 포함해서, 나라는 사람 통째로 사랑받거나 통째로 거절당하겠다고. 반쪽만 사랑받는 것은, 반쪽만 거절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이 년 동안 배웠다.
다음 날 아침, 책상 위 자쿠 옆에서 눈을 떴다.
맥주 캔이 뒹굴고 있었고, 휴지가 구겨져 있었고, 눈은 부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라앉아 있었다.
이별 다음 날 아침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사람들은 이별하면 며칠을 운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담담할까.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그녀와 이별한 것이 아니라, 반쪽짜리 나 자신과 이별한 것이었다. 반쪽만 보여주던 나를, 반쪽만 사랑받던 나를, 어젯밤 자쿠를 닦으며 조용히 묻어버렸다.
그래서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펐지만, 그 슬픔 밑에 이상한 해방감이 흐르고 있었다.
자쿠는 그날부터 다시 책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먼지 쌓인 구석이 아니라, 스탠드 불빛이 가장 잘 닿는 자리에. 이별은 끝이었지만, 그 자쿠가 제자리를 찾은 것은 시작이었다.
무엇의 시작인지는 그때는 몰랐다. 반년 뒤, 용산에서 알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