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 건담을 "그 장난감"이라 불렀다

아닌건 아닌건가

by 해바라기

스물일곱 여름, 회사 워크숍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마케팅팀 신입이었다. 단정한 단발머리, 웃을 때 왼쪽 볼에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컵을 두손으로 감싸 쥐는 습관.

나는 첫날 저녁 레크리에이션 자리에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일부러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 그 정도로 나는 오랜만에 뛰었다.


두달을 메신저로 주고받다가 첫 데이트를 했다.

영화 한 편, 파스타 한 접시, 그리고 한강.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빠, 우리 사귈래요?" 스물일곱 살 남자가 고백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밤, 원룸에 돌아와 책상 위의 스트라이크 프리덤에게 괜히 한 마디 했다. "나 이제 연애한다." 프리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반응이 기묘하게 든든했다.


그녀가 내 원룸에 처음 온 날은 그로부터 한달 뒤였다.

그녀는 책장 두칸을 가득 채운 건프라를 보더니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심장이 떨렸다. 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와, 이게 다 장난감이에요? 귀엽다." 귀엽다. 그 단어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혐오감은 아니었다. 나는 그날 내 세계의 반쪽이 무사히 통과 심사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귀엽다'가 '장난감'으로 고착되어 갔다는 것이다.

사귄 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내가 신상 MG를 샀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또 그 장난감 샀어?" 그날의 '또'와 '장난감'이 내 가슴에 콕 박혔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연애라는 것은, 사소한 단어 하나에 상처를 받아도 그 자리에서 따지지 않는 기술이다. 웃고 넘기는 기술이다.

나는 웃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간 뒤 책상 앞에 혼자 앉았을 때,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힘든 날이면 내 손을 잡아주었고, 어머니 생신에는 선물까지 챙겨주었고, 내가 감기에 걸리면 죽을 사서 원룸까지 와주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은 충분했다.

다만 그녀는 내 세계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세계의 절반을 숨기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게 가장 큰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의 비극은 서로를 미워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조금씩 지우는 데서 온다.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럽던 달, 그달에 나온 MG 신상이 탐났다. 나는 그녀에게 "이번 주는 집에서 영화 볼까" 하고 말했고, 우리는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 주에 건프라를 샀다.

그녀는 며칠 뒤 그 사실을 알고 물었다. "오빠, 나랑 김밥 먹은 날에 장난감 산 거야?"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녀는 그날 울지 않았다. 화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집으로 갔다.

그게 더 무섭게 느껴졋다.


그녀의 생일에 나는 대형 건프라 전시회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가 말했다. "오빠, 오늘 내 생일이야." 나는 바보처럼 그 전시회가 생일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정말로 생각했고, 그녀는 내 생각을 일 초 만에 부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꽃다발, 케이크, 목걸이. 그녀는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옅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연애라는 것은, 상대방의 웃음이 옅어지는 순간을 감지하는 감각이다. 나는 그 감각을 그날 처음으로 작동시켰다.


얼마 후 두번째 크리스마스, 그녀는 선물 박스를 하나 건넸다.

포장이 서툴렀고 테이프가 조금 삐뚤었다. 열어보니 니퍼와 사포세트였다.

그녀가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받아들여 보려고." 나는 그 선물을 받고 한동안 말을 못 했다.

고마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받아들여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사랑은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함께 가는 것이다.

그녀도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평소보다 더 오래 웃었고, 그래서 더 슬펐다.


우리는 이 년을 만났다. 그 이 년 동안 나는 건프라를 줄이지 못했고, 그녀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의 세계 경계에서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별의 징조는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그녀는 모른 척하다가 결국 먼저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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