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주말은 용산에서 시작되었다

by 해바라기

서른이 되기 석 달 전, 나는 용산에 처음 발을 들였다.

선인상가 3층 구석에 있는 작은 건프라 전문점. 간판은 낡았고 유리문에는 테이프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알았다. 여기다. 이곳이 앞으로 내 주말의 좌표가 될 것이다.


벽 한 면이 전부 건프라 박스였다.

천장에 걸린 완성품들, 진열장 안의 도색된 MG와 PG, 구석 테이블 위에 놓인 니퍼와 도료와 사포.

나는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둘러봤다.

그때 카운터 안쪽에서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이 나를 빤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처음 오셨네, 뭐 찾으시는 거 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뇨, 그냥 구경 왔어요."

사장님이 웃으셨다. "구경 온 사람이 제일 많이 사더라."


그날 나는 MG 뉴 건담 Ver.Ka를 샀다.

십육만 원이었다. 스트라이크 프리덤보다 비쌌다.

사장님은 포장을 해주시며 "이거 난이도 있어요. 조립하다 막히면 다시 오세요" 하셨다.

그 한 마디가 나는 왜 그렇게 좋았을까.

건프라를 사는 곳이 아니라, 건프라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별 후 반년 동안 말라붙어 있던 마음이, 그날 오후 용산 3층 구석에서 천천히 다시 젖어 들고 있었다.


그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갔다.

또 그다음 주에도.

세 번째 방문 때 사장님이 나를 기억하셨다. "또 오셨네, 젊은 친구."

네 번째 방문 때는 이름을 물으셨고, 다섯 번째 방문 때는 믹스커피를 타 주셨다.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건담 이야기를 했다.

열다섯 살 때 산 첫 건담 이야기를 꺼냈더니 사장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이미 이 가게를 시작했었어요."

나는 그 말에 조금 먹먹해졌다.

이 가게의 나이와 내 건담의 나이가 비슷했다.

서울 어딘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와 같은 궤도를 돌고 있던 작은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혹시 동호회 생각 있어요? 여기 단골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해요."

나는 망설였다. 회사 밖에서 누군가를 새로 만난다는 것이 이별 후로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님이 덧붙이셨다. "그냥 와서 조립만 해도 돼요. 말 안 해도 되고."

그 한 마디에 나는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모임.

그런 모임이 세상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별한 사람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오랜만에 음악을 들었다.

이어폰 너머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렀다.

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예전 같으면 멈추고 다른 곡을 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들었다.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용산 3층의 낡은 가게와 믹스커피 한 잔과 사장님의 다정한 "젊은 친구"라는 호칭이 조금씩 들어차고 있었다.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장소가 채울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지하철에서 처음 알았다.


첫 모임은 서울역 근처 회의실을 빌려 열렸다.

열두 명이 모였다. 이십 대 대학생부터 오십 대 아저씨까지. 각자 자기 도구와 반조립 상태의 건프라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펼쳤다.

처음 한 시간은 정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니퍼 소리, 사포질 소리, 가끔 누군가의 한숨 소리.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건프라를 조립하는 사람들은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그날 배웠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누군가 커피를 사 왔고, 그제야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기체를 구경하고, 도색 기법을 묻고, 신상 정보를 나누고.

나는 십오 년 동안 혼자 지녀 온 세계가 그 테이블 위에서 한꺼번에 공유되는 것을 보았다.

전 여자친구가 "그 장난감"이라 부르던 것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인생 한 챕터였다.

나는 그 테이블에서 처음으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았다.

그 확인이 나는 울 만큼 고마웠다.


그리고 그 테이블 건너편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였다. 그 사람도 자쿠를 조립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이 훗날 내 아내가 될 것이라는 걸.

그날 나는 그저, 건너편에서 자쿠의 모노아이를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 있는 그녀의 손끝을 오래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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