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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브 Syb Feb 07. 2022

내가 파리 신드롬이라니

별 기대 없었는데 생각보다 더 별로인 파리

'파리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방문한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접하던 아름다운 풍경과는 괴리가 있는 도시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 등을 호소하는 증상이다. 연말, 새해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파리로 향한 나는 내가 파리 증후군을 느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일단 파리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파리에 실망하는 이유로 꼽는 요인들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낡고 더러운 지하철은 오히려 지하 갱도 같은 독특하고 전현대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고, 쓰레기와 노숙자로 가득 차 오줌 냄새 풍기는 유럽의 골목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파리 신드롬을 느낀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에게 파리의 첫인상은 '단조로운 도시'였다. 파리에서 에펠탑, 개선문 등의 랜드마크를 제외하고 도시의 모습을 관찰하면 쭉쭉 뻗은 대로와 그 교차점에 생성된 광장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미색(米色) 외벽과 청회색 지붕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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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소위 오스만(Haussmann) 양식이라고 불리는 파리의 대표적인 건물 형태이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 나폴레옹 3세 시대 조르주 오스만 남작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대규모 도시 정비 사업 때 갖추어졌다.


분명 우아하고, 파리 만의 고유한 거리 풍경을 형성하는 아름다운 양식이지만 도시의 다양성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다채로움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리에 대한 내 두 번째 생각은 '불편한 아름다움'이었다.


파리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다. 몇 주를 투자해도 다 둘러보기 어려울 만큼 도시 곳곳은 역사적이고 저명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역사 속 위대한 정복자들을 기리는 수많은 동상과 기념비, 크고 고상한 건물들은 제국주의의 유산으로 느껴졌다. 그 시절의 광영을 뽐내기라도 하듯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면서도 고상한 파리 특유의 도시 스타일은 타 유럽 대도시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불편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파리는 군주들이 자신의 권력과 업적을 과시하고자 세운 기념비적 대형 건축물, 에디피스 콤플렉스로 가득 찬 도시이다. 에디피스 콤플렉스, 혹은 거대 건축 콤플렉스라고도 하는 이것은 지배자들이 거대 건축물에 집착하는 심리를 설명하는 말이다.


카루젤 개선문의 규모에 만족하지 못한 나폴레옹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에투왈 개선문을 지었다. 또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파리 오페라극장, 라데팡스 지역의 신 개선문 그헝다쉬(그랑드아르슈, Grande Arch) 등은 이 콤플렉스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랑드 아르슈, Grande Arch

그가 추진한 그헝트하부(그랑트라보, Grands Travaux) 사업을 통해 파리 곳곳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지어졌는데, 이 결과물들은 그대로 오늘날 파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와 관광지로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던 결과 나는 파리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는 온종일 숙소 앞 공원에서만 시간을 보낸 날도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파리 신드롬, 여행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필수적인 관광지가 아닌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건물, 아름다운 도시 그 자체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고 표현의 제약을 두지 않는 파리의 현대 건축물들을 보면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예술에 진심이고 예술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또 그들이 인류의 찬란한 문화와 심미적 욕구를 대하는 자세는 마땅히 본받고 싶게끔 만든다.


나로 하여금 파리 신드롬을 극복하고 파리의 열정적인 예술정신이라는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도와준 현대 건축물 몇 군데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하나 간단한 글로 담아내기에는 다 소개하기 어려운 거장들의 작품이니만큼 이 글에서는 방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도록 하겠다.


그 첫 번째 장소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한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 라빌레뜨 공원에 위치한 복합 콘서트홀로, 공연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전시도 열고 있어 전시회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다.

필하모니 드 파리는 빛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 누벨 스타일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독특한 패턴을 가진 작은 모듈의 반복으로 형성되는 커튼월을 곧잘 사용하는 장 누벨의 건물답게 비둘기를 연상시키는 패턴이 건물 영역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프로써 둘러싸고 있다. 비정형적 매스가 뒤엉켜있는 모습과 내부 공간의 용도에 맞게 제작된 외부 패널의 디테일, 다양한 자재들을 채택한 커튼월 외벽 등을 가까이서 살펴보고 기회가 된다면 내부까지 방문해봐도 좋을 것이다.

라빌레뜨 공원 역시 미테랑 시기 그헝트하부 사업의 일환으로 대표적인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서 조성된 곳이다. 세계적인 거장 피터 아이젠만이 초청한 베르나르 추미의 작품 세계가 녹아있는 그의 대표작으로, 추미의 작품관과 철학가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의 적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부를 하고 둘러보는 것도 아주 인상적인 시간이 될 것이다. 다소 난해하고 어려울 수 있으나 라빌레뜨 공원은 일반인도 흥미롭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산책로, 건물, 예술 작품으로도 가득한 곳이니 꼭 필하모니 드 파리가 아니더라도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가 낳은 또 다른 거장, 프랭크 게리의 퐁다시옹 루이비통(Fondation Louis Vuitton)을 소개하려고 한다. 파리 16구의 서쪽 외곽에 붙어있는 거대한 녹지공간인 불로뉴 산림공원 가장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으로 산책하기 좋은 철길 공원, 놀이공원, 호수 등이 밀집되어 있어 함께 묶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루이비통 재단에서 설립한 퐁다시옹 루이비통은 역시 미술관으로, 몇 점의 현대 미술 소장품을 포함한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내부를 방문하기 위해선 반드시 전시티켓이 필요하므로 방문 전 전시 정보를 확인하고 가는 것을 권한다.


소위 루이비통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프랭크 게리가 즉흥적으로 그린 스케치를 그대로 복잡한 구조의 건축물로 구현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설에는 프랭크 게리가 종이를 구긴 뒤 그걸 모티프로 사용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썰도 존재한다. 그만큼 퐁다시옹 루이비통의 외관은 특이하다.

무엇보다 이 건물의 가장 큰 매력은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그 모습이 무척 다채롭다는 것에 있다. 트러스로 연결된 각 패널은 꽃잎 같기도 하고, 계단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수공간 쪽에서 바라보면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창세기>에서 홍수가 날 것에 대비해 모든 종류의 동물을 각각 암수 몇 쌍씩 싣게 했다는 노아의 방주는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후세로 전해지게 하는 역할로 해석된다.

('바벨탑'부터 계속해서 창세기의 전설을 인용하고 있지만 본인은 불가지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와 무관하다. 어디까지나 철학적 인용일 뿐이다!)

어쩌면 노아가 그러했듯 프랭크 게리는 퐁다시옹 루이비통을 통해 인류의 문화, 예술을 최대한 여러 사람이 만끽하고 보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21세기 판 예술의 방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는 익히 알려진 퐁피두 센터이다. 1970년대 하이테크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대표작으로, 이 건물이 현대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에 미친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

이 건물의 특별함은 파리에서 눈으로 마주한 순간 극대화된다. 천편일률적인 오스만 양식 빌딩의 물결 사이로 떠오른 독특한 외관은 스치듯이 보아도 순식간에 시선을 잡아챈다. 가까이에서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파이프의 각기 다른 가중치와 배색 등을 낱낱히 관찰하면서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 그리고 탁월한 감각을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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