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의 유용함
보다시피 내 그림 실력은 영 별로다. 그냥 낙서일 뿐이다. 난 어릴 때부터 낙서를 참 좋아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공상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낙서만 한 게 없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수업은 안 듣고 낙서를 하다가 혼도 많이 났다. 혼나고 나서도 수업에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집에서도 여가는 주로 영화 감상이나 낙서였다. 글을 쓰는 즐거움을 알기 전에는 만화가를 꿈꾸기도 하였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 중에 나는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의 구상이 떠올랐다. 졸업 준비가 우선이었으나 이미 떠오른 그것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를 쓰기 위해 배경과 대략적인 스토리를 만들면서 배경으로 설정한 시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였다. 기왕이면 고증에 충실하고 싶어서 최대한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낙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복식과 사용한 물건들, 건축물과 선박의 형태 등 조사한 자료를 보고 내 손으로 따라 그려보면서 인물의 외형과 스토리를 더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인물의 외형과 장소 등을 묘사할 때도 그려놓은 그림을 참고하였다. 그 덕에 머리도 덜 아팠다. 생각을 정리하려 그림을 그리고 그림 덕에 글쓰기가 수월하니 선순환인 셈이다.
낙서는 아마 많은 작가들이 활용하고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림 실력에 상관없이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되니까. 내 머릿속에만 살아 움직이던 존재들을 종이와 흑연을 통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니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그들이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줄 다른 길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