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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T발 C다

MBTI가 쌓은 벽

by 어둠의 극락

요즘은 시들하지만 몇 해 전 MBTI라는 성격 유형 검사가 크게 유행하였다. 유명인들은 물론 가까운 주변에서도 안 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높아서 나도 호기심에 한 번 해보았다. 과연 입소문처럼 꽤 정확도가 높은 편이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여러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가장 나와 일치하는 결과가 나온 검사였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에 한 획을 그은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하였다고 하니 제법 정교하고 체계적인 모양이다. 실제로 가족과 친구들과도 서로의 검사 결과를 공유하였는데 정말 평소 봐온 각자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 한 번 더 검사를 해보니 신기하게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MBTI는 높은 정확도로 널리 알려지며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MBTI의 유행은 의도치 않게 사람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부작용도 일으켰다.


MBTI가 유행한 이후 SNS와 TV 방송 등지에서 관련된 유행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중 하나가 “너 T발 C야?”이다. 성격 유형 중 판단 기능을 나누는 유형인 T와 F의 차이에서 비롯된 말이다. T 유형은 진실과 사실에 중점을 두어 원리와 원칙, 규범과 기준을 중시하며 논리적, 분석적, 객관적 판단을 하는 사고형, F 유형은 사람과 관계에 중점을 두어 의미와 영향, 나에게 주는 의미를 중시하며 상황적, 포괄적, 감정적 판단을 하는 감정형이다. 이는 F가 T에 비해 더 감성적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분석이기도 하다. 위의 유행어는 글자를 뒤바꿔서 순화시킨 욕설이자 F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T 유형의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비하이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는 본인도 T 유형이라서 할 말이 없다. 실제로 F 성향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 차이를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털어놓는 고민이 공감하기 어렵거나 별 감흥이 없었던 적이 종종 있었고, 공감을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상대가 실망하지 않을지 심각하게 고민한 경험도 많다. 어떻게든 맞장구쳐 준 경우가 대부분이나 때로는 머리가 복잡해져서 반응을 포기해 버린 적도 있었다.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던 상대가 내 반응이 너무 매정하다며 불평한 적도 있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나 쉽지 않았다. F형 사람에게는 나 같은 사람이 매정하고 무심하게 보일 만도 하다. 그러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성향과 성장한 환경이 다르고 그로부터 형성된 사고방식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나와 다른 상대에게 맞춰주려 그를 억지로 바꾸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원활한 소통이 어려워져 갈등과 편견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유행어들까지 만들어졌다. 온라인상에서는 점차 성격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상대를 공격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사람의 심리와 성격이라는 게 그렇게 완벽하게 구별되고 분류되는지도 의문이 든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경우 MBTI 검사를 두 번 해보았고 결과가 그대로였으나 나와 달리 두 번째 검사에서 바뀐 사람도 있었고, 세 번 이상 검사를 다시 했다가 매번 결과가 다르게 나온 사람도 있었다. 졸업과 취업 이후 검사 결과가 달라진 경우 또한 있었다. 정확도가 높더라도 검사 결과를 100%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T형이 반드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모든 F형이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며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공감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나도 나름대로 상대에게 공감을 해주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답과 반응을 해주지 않더라도 F형인 상대가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MBTI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실생활 곳곳에 적용하고 타인을 평가하는 잣대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특정 유형에 대한 편견을 형성하여 그들을 향한 비방과 혐오가 난무한다. MBTI를 채용에 활용하는 기업들도 있는데, 그중 일부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조직 문화에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T 유형과 내향형인 I 유형은 아예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공지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하기 전 지원자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 위해 인적성 검사는 필요하나 성격을 이유로 특정 사람에게 기회조차 박탈하는 일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온갖 크고 작은 발단으로 언쟁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MBTI가 거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모두가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만 받아들여도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이론이건 맹신은 금물이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만든 것들은 완벽할 수 없고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MBTI 검사의 토대가 된 카를 융의 이론조차 일각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설령 정확할지라도 사회에서 그것을 오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예의상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표현과 재치에 감탄하며 미소 지을 수도 있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서로 무조건 적대하기보다는 조금씩 배려하며 상대를 한 번 이해해 보려고 한다면 지금보다는 덜 다투지 않을까. 아니면 이마저도 부질없는 희망일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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