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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요, 아빠

<양들의 침묵> 감상평

by 어둠의 극락

이 명작은 내가 원작과 영화를 모두 감상한 몇 안 되는 작품이다. 너무도 감명 깊어서 여러 번 다시 감상하였고 원작 소설까지 읽어보게 되었다. 마침 집에 영화가 개봉한 1991년에 출간된 번역본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부모님도 언제 어디서 난 책인지 기억 못 하실 정도였고, 표지와 책장이 모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종이에서 묵은내까지 풍겼으나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함께 수록되어 무척 맘에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며 서로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각각 문자와 배우들의 연기로 표현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 및 갈등이 서로 오버랩되며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재미있었다. 각색된 부분은 있었으나 영화가 원작에 제법 충실했던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토록 뛰어난 작품을 창조한 작가와 감독에게 경의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 결말 포함



영화에서 감독의 천재성이 돋보인 장면은 FBI 연수생인 주인공 클라리스 스탈링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한니발 렉터에게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체구가 큰 여성을 납치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드는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을 잡기 위해 범인과 면식이 있는 한니발과 공조하는 과정에서 클라리스는 자신의 개인사를 들려주는 조건으로 버팔로 빌의 정보를 제공받는다. 클라리스는 어릴 적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순직한 뒤 친척의 목장으로 보내졌다. 어느 날 밤 클라리스는 양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었고 친척이 양들을 도축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은 클라리스는 새끼 양 하나를 빼돌려 달아나려 하나 양의 무게와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금방 붙잡힌다. 이 일로 화가 난 친척은 클라리스를 보육원으로 보내버리고 새끼 양마저 죽인다.(영화 기준. 원작에서는 "한나"라는 이름의 말이며 클라리스와 함께 육원으로 보내져 살아남는다.)

카메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클라리스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니발의 얼굴만을 번갈아 비춘다. 클라리스의 트라우마가 된 일을 글로 읽을 때처럼 관객이 직접 경을 떠올리도록 의도한 연출이었다. 두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는 경이로웠다. 떨쳐내고 싶은 악몽을 스스로 되살리는 클라리스는 여전히 죽어가는 양들의 비명에 몸서리치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클라리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이었던 한니발의 얼굴은 어느덧 클라리스의 과거와 트라우마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눈에 눈물까지 맺히면서.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미묘하였으나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람의 혀를 뜯어먹으면서도 심박 수가 85를 넘지 않을 만큼 냉혹한 살인마의 눈물이라니. 독의 연출은 물론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니발은 탈출해 버리지만 그의 도움으로 클라리스는 마침내 버팔로 빌을 찾아내어 사살하고 납치당한 피해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공로로 FBI 정식 요원이 된다. 축하 파티에서 한니발의 공조를 이끌어내는 임무를 맡겼던 상관 잭 크로포드의 축하를 받은 뒤 클라리스는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한니발. 한니발은 이제는 양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느냐며 나름의 축하를 전한다. 그러고는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랜 친구와 저녁을 함께해야 한다며(오랜 친구를 저녁으로 먹겠다는 재치 있는 중의적 표현) 빠르게 통화를 끝낸다. 클라리스는 연결이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계속해서 한니발을 부른다. 나는 클라리스의 그 모습에서 탈주한 범인을 놓쳐서 분노하는 법의 수호자가 아닌 자신을 두고 떠나는 아빠를 붙잡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그는 홀로 마음 깊숙이 감추고 있던 아픔에 관한 얘기를 차분히 들어주었고, 그 대가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도움을 주었다. 그것도 그냥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닌 스스로 생각하여 헤쳐나가게끔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자상하게 축하와 격려까지 해주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위험할 수 있는 임무를 맡길 만큼 신뢰를 준 크로포드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부정(父情)에 목마른 클라리스에게 한니발은 또 다른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렇기에 클라리스는 멀어지는 한니발에게 아이처럼 애처롭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클라리스는 한니발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되었고, 결국 후속작 <한니발>에서는 완전히 한니발에게 지배당하고 만다. 자신을 괴롭히던 상사의 뇌를 함께 요리해 먹기까지 하며.(소설 기준. <한니발>은 원작과 영화의 전개가 다르다.)

FBI 연수생과 연쇄살인마. 완전히 상반된 입장의 두 인물은 서로의 눈에서 닮은 점을 보았다. 막 성형을 끝낸 연약한 유리 공예품과 다름없는 아이였을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는 너무도 쉽게 그 유리를 박살 내었다. 어린 한니발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뒤 굶주린 독일 병사들에게 여동생마저 잡아먹혔고(한니발에게도 먹였다.), 어린 클라리스는 아버지를 잃고 짐승들이 저항도 못하고 도축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뒤 친척에게도 버림받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조각을 모아 어찌어찌 다시 이어 붙였으나 겉으로만 붙은 것처럼 보일 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어설프게 복원되어 언제 또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유리는 의지할 곳이 없어 끝내 광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래서 클라리스는 그토록 잔혹한 살인마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고 와 함께 괴로운 현실로부터 도피한 것이었다. 버팔로 빌을 잡고 FBI 요원이 되고 나면 앞으로 달라질 거란 희망을 비웃듯 여전히 밤마다 그녀를 할퀴어대는 양들의 비명소리로부터. 인류는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우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괴물로 만든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분투하던 양은 끝내 잡아먹힌다. 한니발과 함께 떠난 클라리스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났을까? 한니발의 차가운 품속에서는 비로소 양들이 침묵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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