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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가 흘러들어온 삶

by 어둠의 극락

분노와 증오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인류의 오랜 갈등 요인인 인종과 종교, 정치 성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에서 사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경쟁과 경제 불황, 코로나19와 양극화 등 여러 원인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간이 줄어들고 웃음과 너그러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예전에는 웃고 넘기던 개그나 유머에 분노를 표출하고, 말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단어 하나에 매몰되어 언쟁을 벌이기 일쑤다. 서로 간의 작은 차이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비난부터 퍼붓는다. 집에서도 가족 간에 의견 차이가 생기면 쉽게 좁혀지지 않아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다못해 탕수육 같은 특정 음식을 먹는 방식으로조차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다툰다. 그야말로 “나와 다르다”를 “네가 틀렸다”로 간주하는 세상이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다른 목소리를 들어 보려 하지는 않고 적대하기만 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듯하여 착잡한 마음이 든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것이 이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보면 똑같은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아 잠시라도 이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진다. 그러자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일 만한 게 없는 듯하다.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클래식부터 최신가요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돌이나 발라드 같은 대중가요의 인기가 높지만, 나는 선호하는 장르가 따로 있어 딱히 흥미가 없다.

나는 재즈를 좋아한다. “재즈”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어둠이 내린 미국의 번화가에서 근사하게 차려입고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클럽이 떠오를 것이다. 아니면 음악과 고소한 커피 향이 어우러져 오감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카페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재즈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재즈라는 음악에 나만큼 심취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내 주변 사람들만 해도 친구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분위기 좋은 술집이나 카페에서 주로 틀어놓는 음악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다. 흥미가 있는 친구들마저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고루 즐기는 것이지 나처럼 파고드는 수준은 아니다. 공연장에 가면 공연 감상보다는 술과 데이트에 목적을 두었는지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거의 매번 있다. 심지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는 관객이 나 하나뿐이었던 적도 있다. 이처럼 재즈는 대중에게 각인시킨 이미지는 뚜렷하나 정작 대중성은 다소 부족한 음악이다.

내가 처음 재즈를 들었던 때는 아주 어릴 적이었다. 당시에는 재즈는 물론 음악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다. 온 가족이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 방문하였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들떠 매장에 들어서는 나를 직원과 함께 맞이한 것이 재즈였다. 요란한 전자음으로 정신을 사납게 하지 않으면서 클래식보다 흥겹고 매력적인 전혀 새로운 음악이었다. 그 신선함이 음식의 맛을 돋워주었고 레스토랑에서의 시간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주었다. 성장하면서 레스토랑 외에도 여러 장소에서 재즈를 접하면서 재즈라는 음악에 대해 점차 알게 되었다. 재즈는 일상 속 여러 고충을 잠시 잊게 해주는 도피처도 되어주었다. 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방송의 시작과 끝, 코너의 종료를 알리던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재즈였다. 프로그램의 내용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생긴 나는 인터넷에 그 밴드에 대해 검색하여 곡들을 들어 보았고, 내친김에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도 찾아 들으면서 재즈의 매력에 더욱 매료되었다. 그렇게 재즈는 학교에서 보내는 답답하고 긴 시간을 달래주는 또 하나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나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재즈를 현장에서 감상하고 싶은 욕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공연장을 찾아서 곧장 달려갔다. 주류를 함께 판매하며 바처럼 운영되는 곳이었으나 그 무렵 나는 이미 성인이 되고 대학에 진학한 뒤였기에 이용할 수 있었다. 무대 위에는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드럼, 기타가 내리쬐는 밝은 조명을 받고 있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악기들을 보는 순간 기대감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칵테일을 주문하고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뮤지션들이 입장하며 공연이 시작되자 한껏 부풀어 있던 내 가슴은 그야말로 터져버렸다. 각자 자신을 뽐내면서 서로의 소리를 침범하지 않는 네 악기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특히 클래식을 연주할 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가 인상 깊었다. 드러머가 드럼과 함께 내 심장까지 두드리는 듯한 격동적인 리듬에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모두 황홀한 음악에 취해 나처럼 들썩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재즈가 하나로 만들었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만큼은 인종, 종교, 정치 성향, 음식 취향 어느 것도 없었다. 싸움도 증오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재즈뿐이었다. “다름”도 “틀림”도 없는 재즈만이 존재하는 시공간.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학업의 부담은 물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과거의 악몽도 재즈는 잠시나마 모두 잊게 해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마치 마법에 사로잡힌 듯 여운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주문했던 칵테일의 맛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뒤로 친구에게도 권유하여 함께 다시 방문하였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리듬을 타며 즐기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신기하면서도 무척 뿌듯하였다.

https://youtu.be/UXKeDgpjJVU?si=Xl1naCgVmT3zxIhE

자연은 끊임없는 경쟁과 사투의 연속이고 인간은 그 일부이다. 인간 사회의 각종 싸움을 완전히 멈출 방법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재즈라면 적어도 그를 줄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해 주리라 믿는다. 과거 극심한 혐오와 차별에 시달리던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백인의 악기로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된 재즈는 점차 백인들도 함께 즐기게 되었다. 대중교통과 공중화장실조차 함께 쓸 수 없었던 시기에 전설적인 흑인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이 백인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페기 리, 빙 크로스비와 함께 방송에서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처럼 인종을 초월한 재즈는 각 지역의 정서와 특색이 섞여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며 전 세계로 퍼졌다. 재즈는 화합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즈가 현시대에도 같은 마법을 선사해 주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공연장으로 향한다. 더 많은 이들이 재즈의 매력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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