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오시었구나. 현광아, 일주문에 나가 보아라.”
“예, 큰스님.”
참선하던 노승의 말에 마당을 쓸던 젊은 승려가 대답하였다. 젊은 중의 스승이었던 노승은 법력이 높아서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의 제자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현광이 천왕문을 지나자 이미 누군가가 일주문을 통과하여 올라오고 있었다. 장식이 달린 두건을 쓴 화려한 비단옷 차림의 청년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또 뵙습니다, 시주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도선 대사님께서 또 제가 오는 것을 미리 아셨나 봅니다.”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청년은 합장하며 현광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법당으로 향하였다. 고급스러운 옷과 백옥처럼 흰 피부, 빛이 나는 듯한 큰 눈과 오뚝한 코를 가진 수려한 외모의 그는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로 보였다. 남자인 현광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웠다.
“시주님께서는 참으로 고귀한 분이신가 봅니다. 큰스님께선 속세의 사람들과 만나기를 그리 좋아하시지 않는데 시주님만은 매번 이리 환대하시니 말입니다.”
“고귀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그저 이 어린 중생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신 덕이지요.”
“하하, 그렇군요. 하긴 소승도 큰스님의 귀한 가르침을 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둘은 담소를 나누며 천왕문을 통과하였다.
선방에 있던 도선의 낯빛은 어두웠다. 청년이 찾아올 때마다 첫 만남에서 그의 마음을 휘감았던 불안은 점차 연민으로 바뀌었다. 지금 둘 사이의 거리만큼 가까워진 인연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큰스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현광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선방의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도선을 보고 청년은 합장하며 인사하였고, 도선도 인사를 건네었다.
“어서 오시구려.”
“대사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오늘도 어리석은 소생이 대사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뵈었습니다.”
“그래요. 빈도의 처소로 가십시다. 현광아, 차를 내어오너라.”
“예, 큰스님.”
도선은 승방으로 청년을 안내하여 데려갔고 현광은 찻상을 준비하러 공양간으로 향하였다.
승방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도선은 청년과 마주 앉았다.
“앉으시게. 그대는 법당을 싫어하니 이곳이 가장 편하겠지?”
“어이구, 고맙기도 하여라. 언제부터 나에게 그리 마음을 썼나?”
갑자기 청년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조금 전까지 공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날카로운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도선은 익숙한 듯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직도 옛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가?”
“그대라면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조용히 살고 있던 나를 쫓아내고 이 눈까지 앗아가 놓고서 참으로 뻔뻔스럽구나!”
“그대가 자초한 일이었네. 함부로 힘을 휘둘러 죄 없는 중생들을 해치려 들지 않았는가. 빈도는 불제자로서 그를 묵과할 수 없었을 뿐일세.”
“죄가 없어? 나는 그저 내가 살던 땅에 함부로 쳐들어온 그 버러지들에게 겁만 주었을 뿐이다. 이곳에서 아픈 몸을 누이고 자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몰려와서 시끄럽게 하였단 말이다. 네놈이 섬기는 부처란 놈은 모든 목숨이 다 똑같이 값진 것이라 하였거늘 그 가르침을 잊었는가?”
청년은 언성을 높이며 도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들도 그저 살기 위해 그 땅이 필요하였던 것이야. 이 세상에 땅만큼이나 넓고 많은 것이 물이거늘, 그대가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물러났다면 다 함께 잘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도선의 목소리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으나 눈앞의 존재에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시끄럽다. 내 입만 아프게 더 말해서 무엇하랴? 너희 까까머리들은 당최 말이 먹혀들지를 않으니…….”
청년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또 빈도를 찾아왔는가?”
“그건…… 애송이가 오는군.”
삐딱하게 앉아있던 청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큰스님, 차를 대령하였습니다.”
“들여라.”
현광이 찻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상을 내려놓고 막 우려낸 차로 찻잔을 채우니 금세 방 안에 향긋한 차향이 퍼졌다.
“수고했다. 그만 나가 보아라.”
“예, 큰스님.”
현광은 방문을 살며시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들게. 그래도 이 차는 좋아하지 않는가?”
도선은 차의 향을 느끼며 천천히 음미하였다. 반면 청년은 잔을 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도 안색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술인 줄 아는가? 허허허…….”
도선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날 뭐로 보는 거냐? 이까짓 더운물은 나에게 아무 느낌도 없다.”
“허허, 하긴 그럴 테지. 그래도 향을 느끼면서 천천히 들어보게나.”
도선이 찻잔을 다시 채워주자, 청년은 마지못해 숨을 깊게 들이쉬어 차의 향을 맡은 뒤 천천히 마셨다.
“네놈들이 먹는 것 가운데 이 차라는 것은 그래도 쓸 만하단 말이야. 물에 넣기만 하면 냄새도 맛도 좋아지니까.”
“허허, 그렇지. 차란 아주 좋은 것이지. 잡념과 피로가 가시게 하여 정신을 맑게 해 준다네.”
“그래서 너희 까까머리들이 달고 사나 보군. 참, 왜 그대를 찾아오느냐고 물었지?”
“그래, 어째서인가?”
청년은 천천히 차를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차나 얻어 마시고 더는 이 땅에 마음이 없다는 말을 하러 왔다.”
“오, 그런가? 잘 생각하였네. 집착과 미련은 결국 자신을 괴롭힐 뿐일세.”
“또 있다. 그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러 왔다. 머지않아 시들어 사라질 것 아니던가? 그 짧은 삶의 끝을 똑똑히 지켜봐 주마. 그대가 죽고 나서도 나는 내리 살아갈 터이니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바로 나다.”
독설을 들은 도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년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도선의 반응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도선은 이내 웃으며 답하였다.
“허허허, 뜻대로 하시게나. 이승을 떠나기 전에 좋은 벗이 하나 생긴 듯하여 좋구먼. 자, 차 한 잔 더 드시게.”
도선은 다관을 들어 빈 찻잔들을 다시 채웠다. 능글맞게 받아치는 도선의 말에 청년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싱겁기는…….”
청년은 잔을 들고 또 단숨에 마셔버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 되어 청년은 승방에서 나왔다. 공양간에서 밥을 짓던 현광이 떠나는 그를 보고 뛰쳐나왔다.
“시주님, 이제 가십니까? 곧 공양 시간인데 들고 가시지요.”
“하하, 아닙니다. 스님들 식량을 어찌 빼앗아 먹겠습니까. 아직 시장하지 않으니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예.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청년은 정중히 사양하고는 절을 떠났다. 현광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참으로 귀공자로다. 저 용모와 기백이 보통이 아니구나.”
청년의 정체를 상상조차 못 하고 하는 말이었다.
해가 지고 땅과 하늘이 모두 어둠에 잠겼다. 대낮에도 나무가 우거져 어두운 산속이 더욱 어두워졌으나 청년은 더 깊이 들어갔다. 불빛 하나 없이 그 어둠 속을 거리낌 없이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곧 길이 끊기고 깊은 협곡이 나왔다. 까마득한 협곡 아래에는 하늘보다 더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려는 입처럼 깊은 그 어둠으로 청년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어둠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떨어지던 그는 얼마 뒤 한 마리의 백로처럼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고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작은 암자 같은 집이 나왔다. 집 밖에는 젊은 여인과 소년이 나와 있었다.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래, 잘들 있었느냐?”
“예, 어르신.”
“들어가자.”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작은 외관과는 달리 청년과 여인, 소년은 안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는 어둠을 뚫고 그들은 어느샌가 나타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반딧불이 같은 작고 노란 불빛들이 켜지며 문 앞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청년은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졌다. 소년은 익숙하게 두건을 챙겨 잘 개어 곁에 있는 함에 넣었다.
“아직도 그것이 많이 거슬리십니까?”
여인이 물었다.
“머리에 무얼 뒤집어쓰고 다닐 일이 없었으니까. 좀처럼 익지를 않는구나.”
“허면 무엇 때문에 인간 흉내를 내시며 도선을 찾아가십니까?”
“거슬리더라도 이렇게 하여야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느니라.”
청년은 상투까지 풀어버리고 머리를 묶었던 끈도 내던졌다. 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머리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오늘은 무언가 좀 찾았느냐?”
그는 머리를 정리하며 여인에게 물었다.
“도깨비들이 인간의 무덤을 파헤쳐 썩은 고기를 먹은 여우를 찾았습니다. 곧 녀석들을 데리고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그래, 나쁘지 않구나.”
“그리고 서원경에서 도깨비 하나가 어르신을 찾아뵙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어르신의 이름을 듣고 우러렀다며 거두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서원경? 상당 말이냐? 이미 부리는 것들이 많은데……. 뭐, 그래도 한 번 만나볼 터이니 이리로 오라고 하여라.”
“예, 어르신.”
“담철이는 사냥이 잘 되느냐?”
청년은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부지런히 갈고 닦아라. 곧 말도 하고 모습도 스스로 바꿀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이 트이게 되면 온 누리를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해 주마. 그때까지는 송아의 힘이 닿는 곳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담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데 어르신, 도선을 그리 살려두시렵니까?”
“그래.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사라질 놈이니 괜찮다.”
“허나 놈이 가진 힘은 아주 셉니다. 그 힘으로 이곳을 찾아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찾아내더라도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 이 아래로 내려올 길이 없지 않느냐? 아무리 인간들이 떠받든다지만 날지도 못하는데 제 놈이 무슨 수로 여기를 오겠느냐? 시름할 것 없느니라.”
“예, 어르신.”
“어차피 도선은 죽이기 쉽지 않은 놈이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 성가시더라도 그저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예, 어르신.”
“그래, 그만 물러가거라. 쉬어야겠다.”
송아와 담철은 청년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청년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는 왼쪽 눈을 어루만졌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고 있을 때는 멀쩡해 보였으나 사실 그 눈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도선에게 빼앗긴 눈이었다. 그는 그것을 되찾으려 여러 요괴들을 부려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의 이름으로 통합된 삼한 땅은 다시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조정은 끊임없는 권력 싸움과 귀족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권위와 힘을 잃었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족과 귀족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싸움에 휘말리거나 유리걸식을 하다가 죽어갔고, 그 시산혈해의 혼돈 속에서 짐승들만 배를 불렸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아 조정에 저항하거나 도적이 되었다. 천 년에 달하는 역사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용어 해석>
일주문 : 절의 첫 출입구.
천왕문 :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건물.
어린 : 어리석은
빈도 : 덕이 적다는 뜻으로, 승려가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승방 : 절에서 승려들의 숙소.
공양간 : 절의 부엌
다관 : 차를 담는 주전자.
서원경 :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행정 구역인 5소경 중 하나.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상당 : 상당현. 삼국시대 당시 백제가 붙인 청주의 지명.
누리 : 세상.
시름 : 근심하거나 걱정하다.
유리걸식 : 정처 없이 떠돌면서 구걸함.
시산혈해 :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