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무

by 어둠의 극락

한참을 세상모르고 자던 아지태는 눈을 떴다. 방 안은 그가 잠들기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심지가 다 탔는지 등불이 꺼진 탓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마치 감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인지 밤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이것 참, 봉사나 다름없네.’

아지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찾았다.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탓에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는 방이라 발에 걸릴 것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앗!”

손끝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는 순간 아지태는 놀라서 나자빠졌다. 방 안에는 촉감이 부드러울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문고리도 벽도 아니었다.

“내가 놀라게 하였소? 일부러 그리하지는 않았소.”

송아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바닥에 쓰러진 아지태는 안도하며 일어섰다. 방 안의 어둠이 걷히며 송아의 모습이 보였다.

“휴……. 괜찮으니 다음부터는 기척을 좀 내주시지요. 게다가 저는 이런 어둠이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합니다. 등불이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습니까?”

“알겠소. 가져다드리겠소. 그리고 더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아이들에게 말하면 되오.”

“고맙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어르신께서 몸을 씻은 뒤에 이 옷으로 갈아입고 큰방으로 건너오라 하시었소. 받으시오.”

송아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과 옷가지를 내밀었다. 색이 화려하고 자수까지 놓인 부드러운 비단옷이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어르신의 은혜가 너무 과분하십니다.”

“곧 아이들이 이리로 물통을 들여올 터이니 씻으시오.”

“물통이라 하시었습니까? 이리로 오는 길에 계곡이 있던데 그냥 그곳에서……”

“어제는 그대가 딱하여 먹을 것부터 내어주었으나 본디 어르신께서는 더러운 것을 싫어하시오. 끓여서 냄새가 좋은 꽃과 풀을 우려낸 물이니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바르게 입고 오도록 하시오.”

“아…… 알겠습니다.”

송아가 방에서 나가고 잠시 뒤 스무 명 정도 되는 검은 아이들이 커다란 나무 목욕통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통 안에는 향긋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넓은 방 안은 금세 몰려 들어온 검은 아이들로 바글바글하였다.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 나가지 않고 계속 아지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지태는 옷을 벗으려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들과 마주 보았다.

“다 나가라.”

송아가 도로 방으로 들어와서 지시하자, 검은 아이들은 기겁하며 공중으로 튀어 올라 사라졌다. 아지태는 그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그러이 봐주시오.”

“괜찮습니다. 그럼…….”

송아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아지태는 옷을 벗고 물에 몸을 담갔다.

목욕을 마친 아지태는 몸의 물기를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 옷은 전에 입던 옷과는 달리 무척 부드럽고 따뜻해 촉감이 어색하였다. 아지태가 옷을 다 입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검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가지고 들어올 때처럼 목욕통을 둘러싸고 들어 올려서 방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아지태는 이제 그들이 귀여웠다.

방에서 나오니 복도는 변함없이 어두웠다. 등을 가져오려 아지태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검은 아이 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따라오라고?”

검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지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검은 아이가 이끄는 대로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었다.

흑재의 방으로 온 아지태는 우선 절을 올렸다.

“어르신, 문후드리옵니다.”

아지태는 흑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잘 잤느냐? 방은 마음에 들고?”

“예, 어르신. 잘 살펴주신 덕에 매우 편안하였사옵니다.”

“내가 무얼 그리 살펴주었다고. 모두 자리에 앉아라.”

아지태는 일어서서 의자에 앉았다. 곁에 서 있던 송아와 담철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제 미처 물어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사냥을 잘하느냐?”

“그것은 소인이 스스로 판단할 수 없사오나 성공한 적이 많기는 하옵니다.”

“그렇다면 잘한다고 할 수 있겠구나. 오늘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마. 얻어먹었으면 밥값은 하여야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무엇이든 하명하시옵소서.”

“여우를 하나 잡아 오너라.”

“……예?”

아지태는 흑재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으나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을 시키자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처음인 만큼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 같았다.

“물론 아무 여우나 잡아 오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태백산맥이라고 부르는 곳에 내가 보아둔 녀석이 하나 있는데, 목과 등허리에 마치 할퀸 듯한 검은 흠집이 나 있다. 날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다만,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와야 하느니라.”

아지태는 검은 흠집이라는 말에 의아하였다. 보통 짐승이 부상을 당하면 그냥 상처가 났다고만 할 텐데 굳이 그것이 검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생각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 여우가 어떻게 다쳤기에 그런 흠집이 나 있사옵니까?”

“나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보려고 잡아 오라는 말이니라.”

아지태의 물음에 흑재는 시치미를 떼었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사냥은 어떻게 하려느냐?”

“우선 사냥감이 남긴 흔적을 쫓아 그를 찾아내겠사옵니다. 그리고 자주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어떤 잠개를 쓸 것이냐는 말이다. 어제 보니 몽둥이를 가지고 있던데 그것으로 때려잡으려느냐?”

“소인이 가진 게 그것뿐인지라…….”

“쯧쯧, 그걸 가지고 무얼 하겠느냐? 한 번 휘두르면 부러지게 생겼더구나. 네 방과 마주한 방에 이것저것 있으니 거기서 쓸 만한 것을 찾아서 가져가거라.”

“예, 어르신.”

“이만 가보아라.”

아지태는 다시 절을 올리고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르신, 저 이를 그리로 보내려 하십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송아는 놀란 듯하였다.

“마침 들어온 저 녀석을 한 번 보내보자꾸나. 저런 보잘것없는 녀석이 도리어 뜻밖의 복을 가져다줄지 누가 아느냐?”

“허나 그 여우에게 더는 마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메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뿐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김에 그 여우도 잡아 온다면 더 잘된 일이지.”

흑재는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아지태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역시 그는 아지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소모품으로 사용하려는 듯하였다.

“왜, 저 녀석이 마음에 드느냐?”

흑재는 송아를 놀리듯 이기죽거렸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몰려가서 설친 탓에 그 메의 임자에게 쉽게 들켰던 게다. 그러니 이번에는 하나만 조용히 보내보도록 하자. 설령 들키더라도 아무 힘 없는 녀석이니 사냥 나온 인간인 줄 알고 곱게 돌려보내 줄지도 모르지.”

“잘 알겠습니다.”

송아는 흑재의 의도에 수긍하였다.

아지태는 맞은편 방의 문을 열었다. 등불을 비추며 안으로 들어가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었다. 잠금장치가 달린 다양한 크기의 나무 궤짝과 함들이 쌓여 있었고, 흰 천으로 싸인 물건들과 봉해진 항아리도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책과 다양한 무기들이 있었다. 크고 작은 칼과 창, 활과 화살, 쇠뇌, 도끼에 철퇴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이야, 보물 창고가 따로 없네.’

아지태는 감탄하며 활을 집어 들었다.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으나 튼튼하고 시위도 팽팽하게 걸려 있었다. 그는 화살이 든 활집도 챙기고 이번엔 칼을 하나하나 뽑아보며 골랐다. 녹슬고 이가 빠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중 그나마 상태가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챙겼다.

원래 입고 있던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무기와 식량을 챙긴 아지태는 흑재에게 절을 올리고는 길을 떠났다. 송아와 담철은 물론 검은 아이들까지 나와서 그를 배웅하였다.

“저 누더기를 꼭 다시 입어야 하나? 쯧쯧…….”

“어르신께서 주신 옷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천 쪼가리들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래, 보니까 어떻더냐?”

“아비에게 물려받은 힘이 억눌린 채 인간처럼 살아와서 인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비가 재미 삼아 암컷 인간을 덮쳐서 새끼를 배었습니다.”

“그렇구나. 만들고 싶어서 만든 새끼가 아니었던 게로군.”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기억 속에 아비의 자취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어미와 함께 떠돌며 살아온 기억뿐입니다. 거기다 어미는 갓 태어난 것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녀석이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더냐?”

“기억 못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딱한 것. 시킨 일을 잘 해내고 돌아온다면 잘 돌봐주면서 아비의 피가 다시 끓어오르도록 도와주어야겠다. 그렇게 되면 쓸모가 있겠지.”




<용어 해석>

잠개 : 연장이나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