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탄생

by 어둠의 극락

크고 작은 여러 선박이 정박하고 또 출항하고 있는 예성강 하구로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을 준비하며 접근하였다.

“어서 서둘러라!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다!”

“예, 성주님!”

갑판 위에 서 있던 용건은 마음이 급하여 선원들을 닦달하였다. 아내의 해산일이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원들은 분주하게 배를 정박시켰다. 포구에는 군사들이 말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주님. 말을 대령하였습니다.”

“고맙네. 다들 서두르게!”

배에서 내린 용건은 가신의 인사도 대충 받으며 허둥지둥 말에 올라탔다.

“이랴!”

항해에 동행했던 가신들이 미처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용건은 쏜살같이 집으로 말을 달렸다.

“성주님! 아이고 저런…….”

가신들과 군사들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한 용건은 말에서 뛰어내려 대문을 마구 두드렸다. 어째서인지 대문에는 금줄이 걸려 있지 않았다.

“여봐라! 어서 문을 열어라!”

놀란 하인들이 뛰쳐나와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주님.”

“어찌 되었느냐? 헉, 헉, 안사람은 어찌하고 있느냐?”

“이미 아드님을 해산하시고 요양 중이십니다. 어제 금줄을 내렸습니다.”

“허억, 뭐라? 이미 세이레가 허억, 지났단 말이냐? 헉, 헉, 아이고 이런…… 이런 낭패가 있나!”

숨을 헐떡이던 용건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주저앉았다. 아내의 해산일에 맞추어 일정을 잡아 당나라에 다녀왔다가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고 말았다.

“형님 오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용건의 동생 평달이 뒤이어 그에게 달려왔다. 용건은 동생을 보자마자 그의 손을 잡으며 한탄하였다.

“이보게, 아우. 늦어버렸네. 하필 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바뀌어서…….”

“아, 그 때문이었군요. 형수님께서 해산하신 뒤로도 한참 소식이 없어서 무슨 변고라도 당하신 줄만 알았습니다. 조카가 예정보다 일찍 나오기도 하였지만요.”

“내 꼭 우리 아이의 첫 울음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놓쳤어…….”

“뭐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무사히 돌아오신 게 어딥니까? 해산일이 예기치 못하게 앞당겨진 탓도 있습니다. 자, 어서 일어나시지요.”

“나리 말씀이 옳습니다, 성주님. 마님과 아기님도 모두 무탈하시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주님. 좋게 생각하시지요.”

평달과 하인들이 애써 그를 위로해 주었다. 가신들이 뒤늦게 집 안으로 쫓아 들어오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용건은 옷을 털며 일어섰다.

“그래. 다들 맞는 말일세. 아무튼 둘 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먼. 아들이란 말이지?”

“예, 형님. 틀림없는 아드님이십니다.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모두가 축하하자 용건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다들 고맙네. 이런 경사에 잔치를 아니 할 수 없지. 모두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성대하게 준비하게. 술과 고기는 물론이고 떡도 빚도록 하게!”

“예, 성주님!”

용건은 뒤늦게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방으로 들어와 한숨 돌리던 용건에게 평달이 술을 가져왔다.

“축하주 한 잔 받으시지요, 형님.”

“고맙네. 집안 단속은 잘하였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평달이 형의 잔에 술을 따르고 용건도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둘은 동시에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커, 좋다. 급히 오느라 목이 많이 탔거든.”

“그러실 만도 하지요. 이제는 급할 일이 없으니 푹 쉬시고 조카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보시지요. 어차피 형수님께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요.”

“그리하세. 목욕도 해야겠고…….”

“당나라 사정은 어떠한지요?”

“말도 말게. 소금값이 폭등하여 밀매가 기승을 부리고, 황소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서 꽤 소란스러웠다네. 낙양이나 장안은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하였지.”

“저런, 결국 그 지경까지 되었군요.”

“그래. 천년만년 갈 것처럼 보이던 그 대국이 결국 무너지기 시작한 게야. 한데 그것이 남의 일이겠는가? 이 신라도 여전히 골품이나 따지면서 권력 싸움만 하고 나랏일은 뒷전이니…….”

“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도선 대사님께서 예언을 하셨겠지요. 우리 조카님이 새로이 제왕이 되어 이 삼한 땅을 안정시키리라고 말입니다.”

“하하하!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게야. 도선 대사님이 어떤 분이신가? 신승(神僧)이라 불리시는 희대의 고승이 아니신가? 그분께서 이 집터까지 정해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니 분명 그대로 이루어질 걸세. 자, 한 잔 더 드세나.”

“예, 형님.”

형제는 다시 잔을 채우고 술을 들이켰다. 평달은 용건의 잔을 다시 채운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실은 형님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집안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일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말씀을 드릴지 말지 고민하였습니다만, 괴이한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괴이한 일?”

“예. 형님께서 떠나실 무렵부터 마당 한쪽에 놓아둔 빗자루가 어느 틈에 부엌에 가 있질 않나, 분명 아침에 정돈한 형님의 침소가 다시 가보니 어지럽혀져 있질 않나, 이런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데 집안사람들 아무도 그리 한 적이 없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용건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 이 집에 도깨비라도 있단 말인가? 노비들이 거짓을 말할 리도 없고, 다들 평소에 정리 정돈을 잘해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괴이하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는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만, 안채의 처마에 뱀이 한 마리 나타났는데, 머리가 꼭 고양이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더군요. 혹 틈새를 통하여 방 안으로 들어갔을까 우려되어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평달의 말에 용건은 말을 잃었다. 그런 괴상한 동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런 것이 임신한 아내가 지내는 안채에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용건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평달은 그를 달래었다.

“아, 그래도 아무런 일도 없었잖습니까. 분명 도선 대사님께서 주신 염주 덕분이겠지요.”

“어, 그, 그럼, 대사님 덕분이지. 그렇고말고.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를 않네그려.”

“정 그러시다면 절에 한 번 다녀오시지요.”

“그래. 아들이 태어났으니 부처님께 감사도 드릴 겸 그래야겠구먼.”

다음 날 아침, 용건은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세수를 하고 안채로 건너갔다. 아내와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도 되겠소?”

용건은 작은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서방님? 서방님 오셨습니까?”

아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용건은 황급히 제지하며 들어섰다.

“아아, 누워계시오. 미안하오, 부인. 실은 어제 돌아왔는데 많이 늦은 데다 아우가 쉬고 오늘 보라고 해서 지금 왔소.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예정보다 지체되었다오. 내 꼭 우리 왕건이의 첫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이미 지난 일을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오셨으니 되었습니다. 정말 도선 대사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서방님.”

“다 부인 덕이오. 참으로 고맙소. 내가 없는 사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들이 감당해야 할 일인 것을요.”

“아무튼 이제 우리 집안이 대성할 일만 남았소이다. 우리 왕건이는 틀림없는 임금감이에요. 이 쇠약해진 신라로부터 새 세상을 열고 제왕이 될 겁니다. 틀림없어요, 하하하!”

용건은 왕건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며 기뻐하였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왕건에게 말하였다.

“왕건아, 내가 네 아비니라. 너는 장차 제왕이 될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이니라.”

눈도 뜨지 못한 왕건은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하여 전혀 모른 채 그저 꼬물거리며 용건의 품에 안겨 하품을 하였다.




<용어 해석>

세이레 : 21일. 아이가 태어나고 이 기간이 지나면 금줄을 거둔다. 삼칠일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