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건은 목욕재계한 뒤 옷을 갈아입고 평달과 함께 송악산에 있는 절로 향하였다. 절에 시주할 물품들이 군사들과 함께 그들을 뒤따랐다.
“잔치에 쓸 술과 음식은 준비하고 있는가?”
“예, 형님. 넉넉히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래. 송악 백성들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되어야 하네. 이렇게 좋은 날 많이 베풀어야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날씨도 좋고 참으로 좋은 날이야, 하하하.”
용건은 신이 나서 빨리 절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건 일행이 절에 도착하자 승려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성주님. 어서 오시지요, 시주님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두 무탈하시었는지요?”
용건은 그중 비슷한 연배의 승려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허월 스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허월도 미소로 화답하였다.
“귀국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돌아오시는 길은 평안하였는지요?”
“말도 마십시오. 예기치 못하게 역풍을 만나서 예정보다 늦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 사람의 아들이 태어나서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오, 아드님을 보셨다고요? 경하드립니다. 허면 어서 법당으로 가시지요. 주지 스님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함께 법당으로 가면서 평달은 허월에게 말을 붙였다.
“속세의 아드님과는 계속 교류하고 계시는지요?”
“예. 가끔 서찰을 주고받습니다.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
아들 얘기가 나오자 허월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명주 지역의 세력가였다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한 그는 불가에 귀의하였음에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여전하였다. 이제 아버지가 된 용건은 그의 마음이 이해되어 한마디 거들었다.
“스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권세라는 게 그리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시다니 참으로 스님이 존경스럽습니다.”
“허허허, 어인 말씀을……. 아, 저기 주지 스님께서 오시는군요.”
주지가 다가와 용건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시지요, 성주님. 아드님의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주지 스님.”
“안으로 드시지요. 곧 예불을 시작하겠습니다.”
용건과 평달은 주지를 따라 법당으로 들어갔다.
예불을 마치고 용건에게 할 말이 있었던 허월은 법당에서 나가는 그를 뒤따랐다.
“성주님, 아드님의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왕건이라 지었습니다.”
“왕건? 근사한 이름이군요. 성주님께서 직접 지으셨는지요?”
“하하, 도선 대사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사는 집의 터도 정해주시고 우리 왕건이가 태어날 것도 미리 일러주시었지요.”
“그분이 아드님의 탄생을 미리 아셨단 말씀입니까? 오…… 소승도 소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만, 과연 도선 대사님이시군요. 허허허…….”
감탄하는 허월의 눈이 반짝 빛났다. 미래를 볼 줄 안다고 널리 알려진 도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님?”
“아,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허허.”
“그럼 저흰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시오. 허나 다시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곧 만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오랜만에 아들 녀석도 보고, 바람 따라 물 따라 여기저기 다니며 세상 구경도 하렵니다.”
“오, 그러셨군요. 아쉽지만 그래도 가고자 하시면 가셔야지요.”
“허허허, 한 번 맺어진 인연이 어찌 그리 쉽게 끊기겠습니까. 언젠가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부디 아드님과 함께 잘 지내십시오.”
“고맙습니다. 스님께서도 강건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허월은 이제 마음을 굳혔다. 도선을 찾아가서 아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물어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출가한 뒤에도 아들과 가문의 앞날이 걱정되어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에 남아 수행을 계속할지 아니면 떠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어르신, 송악에서 용건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송아가 흑재의 방에 들어서며 소식을 전하였다. 흑재는 도선에게 받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래. 함부로 나서지 말고 지켜보기만 하라고 하여라.”
“예. 어차피 그 집 안에 도선이 두고 간 염주가 있어서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 힘이 센 무언가가 그 집에 머물며 지키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무어라? 무엇이 말이냐?”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집에 아주 눌러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도선의 끄나풀이 틀림없구나. 솟대 노릇을 하고 있군, 쯧쯧. 여하튼 지켜만 보라 하였으니 그리 알라고 하여라.”
흑재는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또 하나를 집어 송아에게 내밀었다.
“도선이 임금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하더구나. 지난번에 담철이가 궁궐에서 가져온 것과 같은 것이다. 너도 한 번 맛보아라.”
“예, 어르신. 잘 먹겠습니다.”
송아는 과자를 받아 입에 넣었다.
“어떠냐? 맛이 있느냐?”
“맛이 좋습니다.”
“그러면 앉아서 더 먹어라.”
송아가 자리에 앉자 흑재는 석작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아지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제 옆방에 있는 것들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그래? 하긴 그 녀석은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겠지. 인간들이 만들었으니까.”
“글도 아는 듯합니다. 책도 읽고 있었습니다.”
“오, 책을 읽는다고? 그렇다면 쓸모가 아주 많겠구나. 인간들 틈에 들어가기 더 쉬워질 터이니까. 저 녀석을 들이기를 잘하였어. 아지태를 이리로 데려오너라.”
흑재의 지시에 검은 아이들이 나타나서 아지태의 방으로 향하였다.
아지태는 창고에 있던 케케묵은 책과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묵은내가 방 안에 진동하였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책도 다 있다니……. 참으로 놀라워.”
아지태는 홀로 중얼거리며 오래된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한자는 물론 알아볼 수 없는 여러 나라의 문자들로 쓰인 것들이었다.
“이게 글자란 말인가? 대체 어디서 쓰이는 것이지?”
돌돌 말려있던 다른 문서를 조심스럽게 펼쳐 본 그는 마치 그림 같은 상형 문자를 보며 신기해하였다. 읽을 수는 없었으나 매우 흥미로웠다. 검은 아이들이 나타나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는데도 문서를 읽는 데에 열중하여 보지 못하였다. 보다 못한 그들 중 하나가 상 위로 튀어 올라 옷소매를 잡아당기자 그제야 아지태는 깜짝 놀라며 그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다.
“어휴, 놀래라. 무슨 일이야?”
검은 아이들이 다시 팔을 휘두르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아, 어르신께서 찾으신다고?”
아지태는 문서를 내려놓고 그들을 따라갔다.
흑재의 방으로 들어선 아지태의 코에 웬 달고 고소한 냄새가 들어왔다. 입에 절로 침이 고이게 하는 향이었다.
“찾으셨사옵니까?”
“그래, 앉아라. 이것 좀 먹어 보아라.”
흑재는 아지태에게도 과자를 건네었다.
“예, 어르신. 감사드리옵니다.”
아지태는 과자를 집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입에 넣었다. 그 맛에 놀란 아지태의 눈이 번쩍 띄었다.
“어르신. 이런 것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았사옵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인지요?”
“응? 이것을 처음 먹어 보느냐? 인간들이 만든 것인데.”
“이런 음식이 있는 줄도 몰랐사옵니다. 어디서 구하셨사옵니까?”
“도선이 주었다. 궁에 갔다가 임금에게 받았다더군. 그 엉뚱한 놈이 제 입에 맞지도 않는 것을 나를 주려고 일부러 받아왔다고 하더구나.”
“그러하옵니까? 궁중의 음식이라니……. 그래도 참으로 괘씸한 중이옵니다. 어르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나도 그렇게 느껴지기는 하다만, 이것은 부처에게 차리는 밥상에도 올린다고 하더구나. 너희에게는 부처와 임금만 먹는 것을 먹을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니냐? 좋게 여기자꾸나.”
“……하나 더 먹어도 되겠사옵니까?”
“물론이지. 마음껏 들어라.”
아지태는 신이 나서 과자를 더 집었다.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송아도 입에 맞았는지 과자를 또 하나 집어 조금씩 베어 먹었다. 흑재는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먹으면서 들어라. 왕건이 드디어 태어났다고 한다. 어림한 대로 도선은 우리가 다가갈 수 없도록 왕건의 집에 울타리를 쳐두었더구나. 마음은 서두르고 싶으나 자칫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왕건의 자리를 빼앗을 인간을 천천히 꼼꼼하게 골라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어르신."
"듣자니 아지태 네가 책을 읽는다면서? 글을 읽을 줄 아느냐?”
“예, 어릴 적에 배웠사옵니다. 고향 마을에서 쫓겨난 뒤에도 어머니께서 책을 구해다 주시어 익혔사옵니다.”
“허, 참으로 놀랍구나. 배를 채우기도 힘들었을 터인데 글까지 익히다니……. 잘되었구나. 이 안에 있는 책들은 물론이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책을 구해다 마음껏 읽고 익히도록 하여라. 너에게 아주 큰 일을 맡기려 하는데, 똘똘하고 글솜씨가 뛰어나야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어떤 일이옵니까?”
“네가 왕건을 해치울 인간을 고르고 나면 그 녀석에게 너를 보내려고 한다. 새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도록 돕고, 그 나라의 으뜸가는 벼슬아치가 되어 임금이 왕건과 그 집안의 씨를 말리게 만들어라. 그리하도록 네가 그놈을 뒤에서 밀어주고 주무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마침내 그가 고대하던 기회가 주어지자 아지태는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예, 어르신. 학문을 열심히 닦아 결코 어르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사옵니다.”
“그래. 자, 차를 내어오너라. 이 조과는 차와 잘 어울리니 함께 들자꾸나.”
<용어 해석>
만행 :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닦는 온갖 수행.
솟대 : 마을의 수호신 및 경계의 상징으로 마을 입구에 세운 장대. 장대 끝에 나무로 만든 새를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