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시지요.”
“태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사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저택에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모여들고 있었다. 저택의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방문한 사람들을 방으로 안내하였다. 꼭 도둑질이라도 하러 온 듯 그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등불이 은은하게 밝혀진 방 안에는 침묵과 긴장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말없이 서로 눈치만 살피며 자신들을 불러 모은 집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불안한 듯 다리를 떠는 이도 있었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였다. 모임을 소집한 집주인이었다.
“모두 앉게.”
상석에 앉은 집주인의 말에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의 동생이 입을 열었다.
“형님. 이들이 우리에게 가담하기로 한 현령들입니다.”
“그래. 모두 와주어서 고맙네. 이제 준비는 다 되었어. 왕이 이곳을 지나가는 날에 맞추어 거사를 치르도록 하세나.”
“알겠습니다.”
“상대등 김위홍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하네. 왕의 숙부이니 그자가 조정의 실세나 다름없으니까. 상대등만 사라져도 왕을 갈아치우는 일은 훨씬 수월해지지. 왕을 못 죽이더라도 그자는 반드시 없애야 해. 모두 명심하게.”
“예, 태수님.”
집주인은 반란을 계획 중이었다. 그는 양주에 속한 어느 지역의 태수였다. 삼촌에게 나랏일을 다 떠넘긴 어리숙한 왕을 보고 권력을 잡을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반란에 동참한 이들은 그의 동생들과 인근 지역의 현령들이었고, 반란을 도와서 그 대가로 높은 벼슬이나 보상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허나 태수님, 임금의 곁을 지키는 시위들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다 뛰어난 화랑들이 아닙니까?”
“머릿수는 우리가 훨씬 많네. 거기다 기습을 한다면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한다는 화랑들도 별수 없을 걸세. 자네들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우리 편을 구별할 수 있도록 즉시 붉은 천을 왼쪽 어깨에 묶도록 하게.”
“예, 태수님.”
“거사가 성공하여 내 손으로 왕을 새로 세우고 나면 내가 명실상부 조정의 실세가 되지. 그리된다면 골품에 상관없이 나를 도운 그대들 모두 벼슬을 높여주고 요직에 앉혀주겠네. 아니, 아예 골품을 없애버리세. 누구나 능력에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말이야. 선왕 때 있었던 반란들처럼 실패하지 않도록 모두 빈틈없이 준비하게.”
“예, 태수님. 이제 태수님께서 이 나라의 새로운 상대등이십니다, 하하하!”
현령들의 아첨에 태수는 기분이 좋아져 껄껄 웃었다.
“허허허, 고맙네. 허나 마음이 너무 들뜨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네. 한시도 긴장을 늦추거나 방심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겁던 방의 분위기가 한층 들뜨자 한 현령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곧 아기님이 태어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태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줄어들었다. 뭔가 탐탁지 않은 듯하였다. 분명 좋은 일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니 말을 꺼낸 이는 당혹스러웠다.
“그렇긴 하네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네.”
태수는 마치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잘라 말하였다. 그는 반란을 계획하는데 몰두하여 자식이 태어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 그래도 경사가 아닙니까? 기쁘지 않으십니까?”
“거사가 성공해야 경사가 되겠지. 만일 실패한다면 역적의 자식이 되어 태어나자마자 죽게 될 터인데 어찌 경사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무안해져 입을 다물었다. 얘기를 꺼낸 현령은 태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였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거사는 반드시 성공할 터이니까. 그리 풀이 죽을 것 없네.”
태수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 현령을 달래었다.
“자, 다들 그만 물러가게. 비밀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네. 거사 일까지 자네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게. 알겠는가?”
“예, 태수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현령들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뒤이어 태수의 동생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도 물러가겠습니다, 형님.”
모두가 떠난 뒤 태수는 홀로 방에 남아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상대등이라……. 그래, 거사만 성공하면 무엇이 어려우랴? 곧 있으면 나 신홍은 더 이상 일길찬 따위가 아니라 각찬이다. 이 나라의 으뜸이란 말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골품과 왕족들 따위 모조리 없애주겠다!’
자신의 야망이 실현된 미래를 그려본 태수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리고 그 야망이 그의 얼굴에 입이 찢어질 듯 큼지막한 미소를 그려 넣었다.
한편 태수의 회동을 심상치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 늦은 밤에 도련님들과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어인 일인가?”
저택의 안채에서 신홍의 아내 유영이 곁에 있던 하녀에게 물었다. 벽에 기대어 침대에 앉아있는 그는 만삭의 몸이었다.
“어르신께서 긴히 논할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집안사람들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셔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래? 하긴 나랏일에 관한 일일 터이니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다만…….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며칠 전부터 안채에는 기별도 아니 주신다니. 요즘 들어 낯빛이 어두워지시고 식사도 몇 술 뜨다가 금세 물리신다며?”
“예. 쇤네도 어찌 그러시는지 알 길이 없어 참으로 답답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까지 골몰하실꼬? 휴, 그래도 아녀자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그저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유영은 말을 멈추었다. 산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에구머니, 이제 아기님이 나오시나 봅니다!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하녀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극심한 통증에 유영은 쓰러져 신음하였다.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자신이 태어날 세상이 어떤 곳인지조차 모른 채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길을 열어라! 대왕 폐하께서 행차하신다!”
거리에 모든 사람들이 길가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비워진 길을 따라 긴 행렬이 지나갔다. 행렬 한가운데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마차가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하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화려한 비단옷 차림의 김위홍은 마차 바로 옆에 붙어 따랐고, 그 뒤로 다른 신료들과 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위홍은 마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에는 남매인 소년과 소녀가 타고 있었다.
“폐하, 피곤하지 않으시옵니까?”
그러자 소년이 답하였다.
“괜찮습니다, 숙부.”
“허허, 곧 해가 질 터이니 행차를 멈추어야겠사옵니다. 이곳 태수에게 폐하께서 행차하신다고 미리 알렸으니 폐하의 침소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옵니다.”
“알겠습니다, 숙부. 어서 왕도로 돌아가서 아우에게 순행 길에 있었던 신기한 일에 대하여 들려주고 싶습니다.”
어린 왕은 한껏 들떠있었다. 아무리 화려한 용포를 걸치고 마차에 타고 있어도 그는 별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위홍은 자신의 조카인 왕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리하시지요. 하긴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사옵니다. 바다에서 나타난 처용도 그러하고, 그자와 함께 나타난 그 신비로운 무희들도 그러하였사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춤사위였사옵니까? 그게 다 이 신라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겠사옵니까?”
위홍은 껄껄 웃으며 아첨을 하였다. 순진한 왕은 어리석게도 제 삼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숙부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길조가 틀림없습니다.”
“허허허, 다 성군이신 폐하의 덕이옵니다.”
그런데 함께 웃던 동생의 얼굴이 곧 수심에 잠겼다.
“하오나 작은 오라버니께서 함께 오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지금쯤 병세가 어떠할지도 걱정이옵니다.”
“그것은 그렇구나. 황이도 함께 오고 싶었을 터인데……. 그래도 만이 너라도 함께 온 게 어디냐?”
왕은 누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위홍은 인자하게 웃으며 그를 달래었다.
“이제 왕도가 지척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왕의 행렬이 신홍의 관아에 도착할 무렵, 반란군은 관아 뒷산의 기슭에 자리한 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왕이 머물게 될 숙소였다. 그들은 이목을 끌지 않도록 사방에 흩어져 있다가 인적이 드문 여러 길목을 통하여 천천히 모여들었다. 모두 입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한 상태였다. 만약 반란이 실패한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난을 일으킨 이상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하여 왕과 위홍을 죽여야만 하였다.
별관 근처에 집결한 반란군은 주위에 흩어져 몸을 숨겼다. 관아에는 이미 왕의 행렬이 도착하여 신홍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왕이 관아에 당도하였다. 어서 어깨에 표시를 달아라!”
현령의 지시에 반란군들은 품에서 붉은 천을 꺼내어 왼쪽 어깨에 묶었다.
“왕이 잠들면 별관에서 신호가 올 것이다. 신호가 오면 그 즉시 습격하여 안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알겠느냐?”
“예, 나으리.”
반란군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호를 기다렸다.
별관에서는 한바탕 잔치가 열렸다. 임금과 신료들은 신홍이 마련한 주안상에 모여 앉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무희들이 악사들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그들의 흥을 돋우었다.
“한 잔 더 하시지요, 각간 어른.”
“아, 아닐세. 이미 많이 마셨네.”
슬슬 피로가 몰려온 위홍은 신홍이 따르는 술을 사양하였다. 왕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폐하께서 몹시 곤하신 듯하니 침소로 뫼시어라.”
위홍의 명령에 만과 내관들이 왕을 부축하였다. 악사들은 연주를 멈추고 신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편히 주무시옵소서, 폐하.”
왕이 물러가고 위홍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사람도 피로하여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마저 즐기시구려.”
“편히 주무십시오, 각간 어른.”
위홍이 방을 나선 뒤 악사들은 연주를 재개하였고 신료들도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 틈을 타서 신홍은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신홍의 동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들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임금과 상대등이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 술에 취한 상태이니 시위들은 처리하기 쉬울 게다. 우리 군사들에게는 내가 신호를 보낼 터이니 너희들은 가서 왕과 상대등의 숨통을 끊어라. 그쪽에는 내관들만 지키고 있으니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예, 형님. 이제 내일이면 천하는 형님의 것입니다, 흐흐.”
“나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것이지. 어서 움직여라.”
신홍의 동생들은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왕의 침실로 향하였다. 신홍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별관 밖 마당에서는 왕과 동행한 군사들이 불을 피워 놓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보초 몇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대부분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홍은 그들의 경계를 사지 않으려 일부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 부족한 것은 없는가?”
“이미 배가 터지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얼마든지 있으니 좀 더 들게.”
군사들이 모두 방심하고 있음을 확인한 신홍은 안심하고 별관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 숨겨둔 홰를 꺼내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용어 해석>
상대등 : 신라의 귀족 회의인 화백회의의 의장.
양주 : 신라 9주 중 하나. 지금의 경상도 일대.
일길찬 : 신라 17 관등 중 7번째 등급. 6두품에 해당.
각찬 : 신라 17 관등 중 가장 높은 등급. 이벌찬, 각간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