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을 시작한 허월은 우선 송악성으로 가서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동안 딱히 갈 일이 없던 곳이라 절을 떠나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둘러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장터에 진열된 외국에서 온 온갖 진귀한 물건들, 신기한 생김새의 외국인들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어지러울 정도로 이목을 정신없이 사로잡는 공간이었다. 북적거리는 화려한 거리를 거닐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지역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도선을 꼭 만나고 싶었다.
성에서 나온 허월은 이제 어디로 갈지 고민하였다.
‘우선 도선 대사님부터 찾아뵙고 아들 녀석을 보아야겠지. 잘 부탁드리면 그 아이를 위하여 한 말씀 해주실지도 몰라.’
허월은 도선이 창건한 백계산 옥룡사부터 찾아가기로 하였다. 남쪽으로 한참 가야 하는 먼 길이었으나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와 도선을 만날 희망을 품은 허월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계속 걷던 허월은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오는 산길에 접어들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도 나무가 우거진 산속은 그늘 덕에 시원하였다. 허월은 갓을 벗어서 나무 사이를 헤집던 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머리를 말리게 하였다. 더위를 달래고 나니 이번에는 허기가 밀려왔다. 허월은 계곡으로 내려가서 매끄러운 바위 위에 앉아 석장을 곁에 내려놓고 바랑에서 나뭇잎에 싼 주먹밥을 꺼내었다. 밥을 크게 한 입 베어문 허월은 천천히 씹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바위들과 높이 솟은 푸른 나무들만 보였다. 비록 지역은 달라도 산속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풍경에 금세 흥미를 잃은 허월은 주먹밥을 마저 다 먹고는 계곡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캬아아악!
그때,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계곡물에서 튀어나왔다. 몸통에 닭의 것처럼 생긴 발이 달린 괴상한 물고기였다. 그것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자, 허월은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였고 물고기는 그대로 허월이 앉아있던 바위에 머리를 박았다. 허월은 그것이 다가오는 기척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공격이 빗나가자 요괴는 약이 올라 꼬챙이 같은 이빨로 바위를 사과처럼 베어 물고는 씹어 부수었다. 요괴는 물고기 같은 생김새에도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있었는지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허월을 노려보았다.
“이놈아. 초식하는 중이 뭐가 맛있겠다고 덤벼드느냐?”
허월은 여유롭게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며 요괴를 놀렸다. 요괴는 허월이 자신을 깔보자 더욱 약이 올라서 바랑을 챙기려 몸을 숙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허월은 순식간에 바랑 대신 석장을 들어 요괴를 후려쳐 날려버렸다. 멀리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 요괴는 눈과 입에서 하얀 거품을 뿜어내더니 그대로 녹아내려 사라졌다. 허월은 요괴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합장하며 기도하였다.
“다음 생에는 고운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여라. 나무관세음보살.”
허월은 석장에 묻은 물기를 닦고 짐을 챙겨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덧 허월은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변에는 마침 나룻배가 도착하여 사람들을 내려 주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이 지긋한 노승과 그를 따르는 사미승도 있었다. 배로 다가가던 허월은 맞은편에서 오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었고, 그들도 그에게 인사하였다.
“스님, 불명이 어찌 되십니까?”
허월이 그들을 지나쳐 배에 올라타려는 찰나 노승이 물었다. 허월은 배에 얹은 발을 도로 내리고 노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니 나이는 자신보다 더 들어 보였으나 맑고 깊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승려였다.
“허월이라고 합니다만.”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요?”
“백계산 옥룡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도선 대사님을 뵈려고요.”
허월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였으나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답을 들은 노승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저런, 거기 가셔도 그분은 뵐 수가 없습니다. 마침 우리가 그곳에 다녀오는 길인데, 도선 스님께서는 지금 백계산 옥룡사에 아니 계십니다.”
“예? 허면 지금 어디에 계신답니까?”
“어디인지는 듣지 못하였으나 귀인을 만나러 떠나셨다고 하더이다. 한 번 길을 떠나시면 한동안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뜻밖의 소식에 허월은 당혹스러웠다. 허탈감에 무거운 한숨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노승은 그런 허월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스님, 안 타십니까?”
사공이 물었다.
“아, 그렇소. 그냥 가시구려.”
허월은 풀죽은 목소리로 배를 떠나보내었다.
“무척 실망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꼭 뵙고 싶었던 분인데……. 그렇다면 그리로 갈 이유가 없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스님. 그럼 이만…….”
“아, 잠깐.”
노승은 돌아서려던 허월을 불러 세웠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인연을 맺었으니 잠시 동행하시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송악이나 정주 방향에서 오신 듯한데, 길 안내도 해주실 겸 송악 초입까지만 함께 가시지요.”
“어…….”
노승의 부탁을 들어주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기에 허월은 망설였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려던 목적도 없어졌고, 그들과 송악까지 함께 갈 필요 없이 도중에 헤어져서 삭주를 통하여 명주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시지요. 어차피 소승도 길을 다시 잡아야 하니까요.”
허월이 승낙하자 노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잘 되었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예, 스님. 참, 스님의 불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허허허, 천천히 알려드리지요. 가십시다.”
허월의 물음에 노승은 대답을 피하며 길을 재촉하였다.
지나온 산길을 다시 걸으며 허월은 노승과 그의 제자로 보이는 사미승을 곁눈질로 살폈다. 자신의 법명을 밝히지 않는 것이 조금 수상하였으나, 이상한 낌새는 딱히 없었고 승려인 것도 분명해 보였다. 허월의 속내를 눈치라도 챈 듯 노승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허월 스님께서는 송악에서 출가하셨는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허월은 갑작스러운 노승의 질문에 놀라 황급히 답하였다.
“스님의 말투를 들어보니 삭주나 명주 출신이신 듯한데 맞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허월은 그가 마치 자신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노승은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싱글벙글하였다. 사미승은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지 묵묵히 곁에서 걷고만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군요. 해가 지기 전에 묵을 곳을 찾아봅시다.”
노승이 걸음을 재촉하였다. 허월은 영 탐탁지 않았으나 그를 따랐다.
어느새 해가 거의 다 져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지자 허월은 슬슬 불안해졌다. 밝은 대낮에는 요괴와 마주쳐도 별로 두렵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는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불이 밝혀진 작은 초가 한 채가 보였다.
“오, 마침 저기 집이 있군요. 저기서 묵도록 합시다.”
노승은 신이 난 듯이 그 집을 향하여 성큼성큼 나아갔다. 반면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왔던 길을 되돌아온 허월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잠을 잘 곳은 필요하였기에 묵묵히 노승의 뒤를 따랐다.
“계시오?”
노승의 부름에 부엌문이 열리고 젊은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밥을 짓고 있었는지 부엌에서는 연기가 흘러나왔다.
“뉘시오?”
“하룻밤 신세 좀 질 수 있겠소이까? 지나던 길에 날이 저물어서, 허허.”
“……들어오시지요.”
“고맙구려. 나무관세음보살.”
어째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으나 여인은 일행을 받아주었다.
“공양을 올릴까요?”
노승은 기쁨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허허, 고맙구려.”
여인은 방문을 열어준 뒤 부엌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허월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은 겉보기엔 깨끗하였으나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편하였다. 반면에 노승은 매우 편안하였는지 바랑을 풀고 버선도 벗고 있었다.
“스님, 공양입니다.”
“들이시구려.”
여인이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멀건 장국과 보리밥, 산나물이 전부인 초라한 상이었다.
“홀로 사는 처지에 내어드릴 게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송구스러우나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요.”
“아니올시다. 이만하면 중에게 더할 나위 없이 푸짐한 밥상이지요. 잘 먹겠소이다.”
“그럼 많이들 잡수셔요.”
여인은 다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허월은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분명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섬뜩하고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 듯하였다.
“허월 스님, 아니 드십니까?”
노승이 밥을 크게 한술 뜨며 물었다.
“아, 예.”
허월은 일단 숟가락을 집어 들었으나 꺼림칙하여 밥을 뜨지는 않았다. 여인은 손님을 받아들이고 음식까지 내어주었으나 처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방을 나가면서 그런 얼굴까지 보이니 영 수상하였다. 급기야 음식에 무슨 짓을 하였을지 의심스러워졌다.
“독은 없으니 안심하고 드시지요.”
허월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였는지 노승이 그를 안심시켰다. 허월은 갈수록 의구심이 커져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노승은 꼭 처음부터 자신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는 듯하였다. 허월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노승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하였다.
“스님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요?”
허월의 질문에 노승과 사미승은 식사를 멈추었다. 사미승은 스승의 눈치를 살폈고 노승은 천천히 씹던 밥을 삼켰다.
“이 아이의 견문을 넓혀줄 겸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랍니다.”
“그렇다면 어느 절에서 오셨는지요?”
다음 물음에 노승은 답하지 않았다. 의혹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는 허월의 눈을 통하여 그의 의도를 다 파악한 듯 그저 웃기만 하였다.
“허허허, 빈도가 영 못 미더우신가 봅니다. 하긴 그러실 만도 하지요. 곳곳에서 우리 중들의 수도를 방해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군들이 출몰하고 있으니까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집의 주인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만 그 힘은 미약하여 우리를 해코지하지는 못할 터이니 안심하시지요.”
허월은 그제야 찝찝한 느낌과 여인이 험상궂은 얼굴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은 사실 요괴였고, 일행을 끌어들여 어떻게 해보려다 노승의 혜안과 법력에 기가 눌려 순순히 음식을 내어주고 물러난 것이었다. 허월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도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한 번 물어봐도 될 듯하였다.
“허월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도선 스님을 뵙고자 하시는지요?”
하지만 노승이 먼저 묻는 바람에 허월은 꺼내려던 물음을 도로 삼켰다.
“아, 예. 실은 속가에 두고 온 아들 녀석과 이 땅의 중생들이 가여워 이 나라의 앞날이 어찌 될지 여쭙고자 함입니다. 도선 대사님께서는 앞날의 일을 미리 보실 수 있는 신통력이 있으시다 들었기에…….”
“허허허, 그분이 점쟁이도 아닌데 명주 장군의 앞날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예?”
허월은 순간 정신이 아찔하였다.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아들이 명주의 세력가 순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명주 일대의 주민들과 일부 송악 사람들뿐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노승에게는 자신의 법명 외에는 알려준 것이 없었는데도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허월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한참 동안 얼이 빠져있던 그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노승은 머금고 있던 웃음기를 서서히 거두며 허월과 눈을 맞추었다.
“스님께서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신 모양입니다. 여전히 속가를 향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도선 대사님?”
허월은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법명도 모른 채 동행하다가 지금은 그와 밥상에 마주 앉아있는 이가 바로 그토록 만나길 고대했던 도선이었다. 허월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서둘러 그에게 엎드렸다.
“대사님! 소승의 살아있는 혈육입니다. 속세를 떠났다고 하여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피로 이어진 연을 어찌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그 아이의 앞날이 어찌 되겠습니까?”
바닥에 엎드려 사정하는 허월을 보며 도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도는 점쟁이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좌정하시지요.”
“대사님. 이렇게 간곡히 청합니다. 대사님께서도 지금 이 나라의 사정이 어떠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진골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나이 어린 임금의 숙부가 권세를 틀어쥐고 제 조카의 눈과 귀를 막고 있습니다. 소승이 수행하고 있던 송악처럼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은 점차 조정의 영을 받들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려 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 땅이 다시 옛날처럼 갈라져 혼돈에 휩싸이려는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다가올 그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으려면 소승의 아들이 어찌해야겠습니까?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도선은 애원하는 허월을 안타깝게 여겼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은 있으나 미련을 떨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그가 가여웠다.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실 때 그 미련도 함께 버리셨어야 하였습니다. 다 버리십시오.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도선은 안타까운 속마음을 감추고 허월에게 냉정하게 잘라 말하였다. 허월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스님께서 성주 자리를 아드님에게 물려주시고 출가를 결심하셨을 적에 이미 두 분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습니다. 스님께선 불제자의 길로, 아드님은 명주 장군의 길로 말입니다. 어버이의 미련과 집착은 자식의 발목을 붙잡고 길을 잃게 만드는 법입니다.”
허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스승에게 크게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호한 도선의 태도를 보아 더 빌어도 소용이 없을 듯하였다. 서운함이 담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손등을 적셨다.
“다 내려놓으십시오. 양손에 번뇌를 틀어쥔 채로 어찌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를 내려놓으셨으니 나머지도 놓아버리시지요.”
도선은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어서 마저 드시지요. 빈도는 고단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도선이 수저를 들자 계속 눈치를 살피던 사미승도 안도하며 다시 식사를 재개하였다. 허월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으나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그들은 밥상을 밖에 내어놓고 이부자리를 펼쳤다. 허월도 하는 수 없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였다. 도선은 바랑에서 염주를 꺼내어 문고리에 한 바퀴 감아서 걸었다.
“이러면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허월은 편히 잠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도선과 사미승은 잠이 들었으나 허월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었다. 요괴의 기운이 사라져서 답답함은 가셨으나 마음이 편치 않아 잠들 수가 없었다. 멀리 가지 않고도 도선을 만난 일은 행운이었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여 실망이 매우 컸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청하였는데도 끝내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을 거절한 도선이 원망스러워졌다. 이제는 명주로 가서 아들을 찾아가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허월은 날이 밝는 대로 떠나기 위해 눈을 감고 어떻게든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군요.”
잠든 줄 알았던 도선이 말을 걸자 허월은 눈을 떴다.
“섭섭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대사님. 어서 주무시지요…….”
도선은 자면서도 바로 옆에 누운 허월의 마음속을 다 읽고 있는 듯하였다. 슬슬 그에게 속내를 읽히는 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자식을 아끼는 어버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허나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는 법이니 부디 이해하시지요.”
허월은 뒤늦게 이해해달라는 말이 어이가 없어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꼭 사람을 골리려고 그러는 듯하여 약이 바짝 올랐다. 기분이 나빠진 허월은 도선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허월은 문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얼굴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푹 잔 듯이 몸이 개운하였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선과 사미승은 먼저 일어나 길을 떠난 모양이었다. 비록 서운함은 남아있었으나 작별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려니 아쉬움이 컸다.
‘거 참,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허월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였다. 어서 명주로 가서 아들 순식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문득 도선이 염주를 걸어두었던 문고리를 보니 문고리 주위에 마치 불에 탄 듯 시커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무렵 도선과 사미승은 어느덧 송악산을 넘고 있었다.
“큰스님, 그 여인의 정체도 그렇고 밥에 독이 없다는 것까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미승은 스승의 신통력을 직접 보고 나니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너라면 네가 잡아먹을 고기에게 독을 먹이겠느냐?”
“아……”
사미승은 도선의 답변에 입이 떡 벌어지며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성문이 보이는구나. 이제 다 왔다.”
그들 앞에 송악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활짝 열린 성문 앞에는 군사들이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무엇 하느냐? 어서 가자.”
“아, 예, 큰스님.”
사미승은 서둘러 앞서가는 도선을 쫓아갔다.
“한데 큰스님, 허월 스님께서 별 탈이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제 갈 길로 알아서 잘 가셨을 터이니 걱정할 것 없다. 서두르자. 송악 성주와 더불어 그곳에 있는 나의 친우와도 만나야 하느니라.”
“예…….”
성으로 향하며 도선은 제자에게 물었다.
“내가 몰인정하다고 여기느냐?”
“예? 아, 아닙니다, 큰스님…….”
“아니기는. 네 녀석 얼굴에 다 쓰여 있느니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아무리 속세를 떠났어도 아비가 어찌 자식 걱정을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털어놓는 제자의 말에 도선은 미소를 지었다.
“허나 어찌하랴? 그이는 장차 새 세상을 열기 위해 큰일을 하여야 하느니라. 그런 사람이 작은 미련에 얽매여 일을 그르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언젠가 때가 되면 그이도 나의 뜻을 깨닫겠지.”
“그렇다면 그분이 앞으로 송악 성주님의 아드님을 도와 새로이 나라를 세우신단 말씀입니까?”
“어허,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렸다.”
도선은 석장을 땅에 내리치며 호통을 치자 사미승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소, 송구합니다, 큰스님.”
“송악 성주에게도 그저 앞으로의 일을 예비하는 데에 실수가 없도록 귀띔을 해주었을 뿐 본래 앞날의 일을 여기저기 떠벌려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래서 허월 스님에게도 일러주지 않았던 게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서 행해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큰스님.”
“게다가 그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어있다. 그 또한 이 땅의 중생들을 구원하고 새 세상을 여는 초석을 닦는 일이다.”
<용어 해석>
석장 : 승려가 길을 나설 때 짚는 지팡이.
바랑 : 승려들이 옷과 경전 등을 넣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자루 모양의 주머니.
사미승 :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어린 승려.
정주 : 지금의 북한 경기도 개풍군 일대.
삭주 : 신라 9주 중 하나. 지금의 강원도 영서 지역 및 경기도 북부 일부.
마군 : 魔軍. 석가모니의 득도를 방해한 악마의 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