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맺어준 새 인연

by 어둠의 극락

오랜 여행 끝에 허월은 마침내 오대산에 이르렀다. 고개만 넘으면 바로 고향인 명주였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신도 다 닳아서 떨어지기 직전이었으나, 그리운 고향의 풍경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들떠 아픈 줄도 몰랐다. 허월은 코로 숨을 한껏 들이쉬어 고향의 냄새를 맡았다.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 냄새도 허월을 반기며 그를 산길로 이끌었다.

산 중턱에 이르러 허월은 나무하러 올라온 사람들과 마주쳤다. 출가하기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그들은 단번에 허월을 알아보았다.

“아니, 전 성주님 아니십니까?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들은 허월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올렸다.

“예끼, 이 사람아. 이 까까머리와 장삼이 아니 보이는가? 전 성주는 무슨…….”

허월은 그들을 다그쳤다.

“어허허허! 소인도 모르게 그만…….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래. 자네들도 오랜만이구먼. 많이들 늙었네그려.”

“허허허, 그간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성으로 가십니까?”

“그렇다네. 아들놈 얼굴이 보고 싶어서 말일세. 요즘 그쪽 사정은 어떠한가?”

“아유, 성주님 덕분에 두루 평안하지요. 먹고 사는 걱정도 없고 도적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합니다. 성주님께서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살피십니다.”

“오, 그런가? 그 녀석이 제법 하는 모양이군.”

허월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 그의 아들이 성주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칭찬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수고들 하게.”

“예, 살펴 가십시오. 범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허허허! 이 말라비틀어진 땡추가 뭐 먹을 게 있다고 범이 달려들겠는가? 걱정하지 말게.”

허월은 농담을 던지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곡으로 내려온 허월은 목을 축이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물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물집이 잡힌 발이 걸을 때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신과 버선을 벗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통증이 조금 가시는 듯하였다.

“이런…… 못 쓰게 되었군.”

허월은 닳아서 찢어진 신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버선도 다 해져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풍덩-

별안간 뭔가 육중한 것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계곡의 하류 방향이었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거대한 호랑이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서 물에 몸을 담그고 더위를 씻어내는 듯하였다. 물장구를 치던 호랑이는 이윽고 수면 아래로 잠수하였다. 허월은 거리낌 없이 그리로 접근하였다.

촤아악-

곧바로 수면 위로 올라온 호랑이는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거대한 몸을 마구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었다. 허월은 그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합장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산신님.”

호랑이는 허월을 보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게 누구신가? 오랜만이군. 집으로 돌아가는가?”

“예, 아들 녀석을 보러 갑니다.”

“그렇군. 잘 가게. 가끔 얼굴이나 보여줘.”

“예, 그리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허월과 인사를 나눈 산신은 다시 호랑이로 변하여 달려갔다.

산에서 내려온 허월은 마침내 명주성에 도착하였다. 성문 앞에서는 군사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허월도 그에 합류하여 검문 순서를 기다렸다. 성곽 위에서는 수문장이 성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니, 저분은?”

문득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을 내려다본 수문장은 그 틈에 껴 있는 허월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서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비키시오, 비켜!”

수문장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허월에게 경례하였다.

“전 성주님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전 성주라는 말에 성문 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대부분 허월을 알아보고는 너도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허월은 박박 깎은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호통쳤다.

“어허, 스님이라고 불러야지! 어째 보는 사람마다 다 그리 부른단 말인가?”

“아…… 송구합니다, 스님.”

“보아하니 성의 방비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군. 성주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지금 해안가를 순찰 중이십니다.”

“성주가 직접 순찰을 한단 말인가?”

“예. 늘 그리 해오셨습니다.”

“허허, 열심히 하는구먼. 제법 성주다워. 그렇다면 빈도는 성주의 집에 가서 기다리겠네.”

“그리하시지요. 자네가 전 성주, 아니…… 스님을 성주님 댁까지 모셔다드리게.”

“예!”

수문장의 명령에 검문을 담당하던 군관이 답하였다.

“고맙네. 수고들 하게.”

“예, 스님. 살펴 가십시오.”

허월이 줄에서 나와 군관을 따라서 성문을 지나가려던 찰나, 줄 뒤쪽에서 고성이 들렸다.

“이보시오! 여기 사람들 줄 서 있는 거 안 보이오? 뒤로 가시오!”

“어허, 뒤로 가라니까!”

사람들이 화를 내며 누군가를 밀쳐내고 있었다. 찢어지고 해져서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치고 뭔가를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움푹 들어간 볼과 얼굴에 핀 버짐 탓에 몰골이 처참하였다. 사람들에게 가로막힌 여인은 퀭한 두 눈을 성문에 고정한 채 맥없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품에 안은 것을 보호하려 애썼다.

“쯧쯧, 새치기를 한 모양입니다. 간혹 저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스님.”

군관은 무시하고 가려 하였으나 허월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아닐세. 잠시 돌아가세.”

“예?”

허월은 돌아서서 도로 성문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사람들에게 밀려 쓰러져있던 여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집고 나아가려 하였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누가 어떻게 좀 해보시오!”

또다시 고성이 오가자 군사들이 달려와서 여인을 끌어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검문을 받기 전에는 성으로 들어올 수 없소!”

소란이 커지면서 결국 수문장까지 나섰다.

“행색도 그렇고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끌어내어 몸을 수색하라! 저 보따리도 살펴보아라!”

“예!”

군사들이 달려들어 여인을 붙잡고 그의 품에 있는 것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돼! 이 아이만은 안 돼! 도깨비가 온단 말이야! 이 아이는 안 돼! 차라리 날 데려가! 안 돼!”

그러자 여인의 품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안고 있던 것은 바로 아기였다. 군사들은 당황하며 손을 거두었다.

“나, 나리. 갓난아이입니다…….”

“뭐라?”

“잠깐 멈추게.”

허월의 제지에 군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스님. 이 여인이 인솔을 따르지 않고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소장이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허월은 손을 들어 수문장의 말을 막은 뒤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인은 잔뜩 경계하며 우는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허월은 미소를 지으며 쭈그려 앉아 여인과 눈을 맞추었다.

“보아하니 고생을 많이 하셨구려. 이 어린 것까지 데리고서…….”

여인은 승려인 허월을 보고도 여전히 몸을 떨며 경계심을 보였다.

“한데 방금 하신 말씀은 무엇이오? 도깨비가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니?”

허월의 입에서 도깨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여인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허월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스님! 스님, 저희를 좀 숨겨 주십시오. 도깨비가…… 도깨비가 내 아이를 잡아갔습니다. 도깨비가 쫓아옵니다! 도와주셔요, 스님!”

허월을 붙들고 울부짖는 여인을 군사들은 어쩌면 좋을지 몰라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손 놓지 못할까!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이러는 게야? 어서 끌어내라!”

수문장이 고함을 쳤으나 허월은 그를 말렸다.

“멈추게. 이 사람은 빈도가 데려가겠네.”

“예?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이런 여인을 어찌……”

“좀 보게.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저리 두면 아이까지 잘못될 걸세. 빈도가 데려갈 터이니 보내주게.”

“허나 스님. 검문이라도 해야……”

“빈도가 책임지겠네. 자, 갑시다. 그대와 아이 둘 다 도와주겠소.”

허월은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수문장과 군사들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허월을 믿기로 하였다.

“수고들 하게.”

허월은 여인을 데리고 성문으로 돌아갔다. 허월이 옆에서 부축하는데도 여인은 제대로 걷지 못하여 비틀거렸다.

“네가 도와드리고 오너라.”

“예!”

그들을 지켜보던 수문장이 곁에 있던 병사에게 명령하자 병사는 허월을 뒤따랐다.

“스님,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그러면 빈도가 아이를 안지.”

허월이 아기를 대신 안으려 하였으나 여인은 아기를 내어주지 않으려 하였다.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허,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 분명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아이는 빈도가 안고 갈 터이니 편하게 업혀 가시구려.”

여인은 허월과 병사를 번갈아 보며 한참 망설이다가 아기를 허월에게 안겨주었다. 그리고 병사의 등에 몸을 맡겼다.

“성주의 집으로 가세.”

“예, 스님.”

허월은 우는 아기를 살살 달래며 조심스럽게 품었다.

한편 성 밖에서는 말을 탄 한 무리의 군사들이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선두에서 달리는 젊은이를 따르고 있었다. 젊은이와 기병들은 이내 속도를 줄여 해안을 따라 걸었다.

“주공, 피로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돌아가시지요.”

“괜찮네. 좀 더 둘러보세.”

부하의 제의에도 순식은 계속 말을 몰았다.

“요즘도 바닷가에서 기억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자들이 있는가?”

“근래에 들어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어쩌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말일세.”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던 순식은 문득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깊은 바다에는 인어들이 산다고 하네. 몸통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아래에는 다리 대신 물고기와 같은 꼬리를 가졌다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항해 중에 마주치게 되면 곧바로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고 하네.”

“소장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인어는 모두 암컷이라서 새끼를 낳기 위해 인간 사내를 홀려 정을 통한다고도 합니다.”

“그렇다지.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로군.”

순식은 전설로만 전해 들었던 인어의 모습을 상상하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기에 곧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나저나 여전히 해적이 기승을 부린다지?”

“그렇습니다, 주공. 이 일대는 물론 바다 건너 왜국까지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흉악한 놈들. 그러니 우리도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하네. 검문과 순시를 결코 게을리해서는 아니 돼. 알겠는가?”

“예!”

“주공, 저기 보십시오.”

성에서부터 기병 하나가 순식을 향해 달려왔다.

“성주님!”

쏜살같이 달려오던 기병이 모래를 튀기며 말을 세웠다.

“무슨 일이냐?”

“허월 스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아버지께서?”

순식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성주님 댁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돌아가세. 이랴!”

순식과 기병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성으로 내달렸다.

검문을 담당하던 군관의 안내로 허월은 순식의 집에 도착하였다. 군관은 대문을 지키던 수비병들에게 허월이 왔음을 알렸고, 수비병들은 허월에게 인사를 하고 대문을 열었다. 아기는 여전히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어서 방으로 데려가 눕히고 의원을 불러오게.”

“예, 스님.”

병사가 여인을 업고 별채로 향하였고, 안채의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인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인은 허월을 보자마자 놀라며 마당으로 나왔다.

“아버님? 아버님이십니까?”

“오, 새아기로구나.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순식의 아내는 허월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예,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래, 잘 지냈다. 아범은 언제쯤 돌아오느냐?”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오냐. 그리 하마.”

“한데 품에 안고 계신 그것은…….”

“아, 오는 길에 이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만났는데, 길에서 다 죽어가기에 차마 두고 올 수가 없었다. 지금 별채에 데려다 놓았으니 내가 알아서 하마.”

허월은 여인을 눕힌 방으로 향하였다. 하녀가 수건을 물에 적셔서 죽은 듯이 잠든 여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허월은 그 곁에 앉아서 우는 아기를 달래려 애썼으나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허…… 이를 어찌한다?”

아기의 머리를 짚어보니 미열이 있었다. 허월은 아기가 잘못될까 애가 탔으나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어? 이게 뭐지?”

여인의 옷을 벌려 목과 가슴을 닦아주던 하녀는 그 품속에 들어있던 것을 발견하였다. 나무를 투박하게 깎아 사람의 형상처럼 만든 조각이었다.

“왜 그러느냐?”

“이분의 품에서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하녀는 나무 조각을 허월에게 내밀었다. 허월이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니 머리 부분에 얼굴은 없었고 몸통과 그 아래 갈라진 두 다리가 있었다.

“아이의 장난감인 모양이로구나. 곁에 잘 두어라.”

허월은 나무 조각을 도로 하녀에게 건네주고 아기를 달래주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려무나. 네 어미가 인형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꼭 살아야지.”

그때, 밖에서 말 울음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 성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이 밖에서 순식이 왔음을 알렸다.

“오냐. 사랑으로 가마.”

허월은 아기를 여인 옆에 조심히 눕히고 사랑채로 향하였다.

순식은 아내와 함께 허월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느냐?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예, 소자도 잘 지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소식을 간간이 접하였습니다만, 이렇게 돌아오시어 다시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진지는 잡수셨는지요?”

“진지가 아니라 공양이지, 이 녀석아. 아직 안 들었다.”

“하하하! 송구합니다, 아버지. 부엌에 일러 서둘러 공양을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오냐. 이제 일어서라.”

허월은 순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부자는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서로를 아끼고 그리워하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허월은 자신의 뒤를 이어 어엿한 성주가 된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참, 여기까지 오느라 신이 다 떨어졌는데 새것으로 좀 구해다 주겠느냐?”

“예, 아버지.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어, 실은 지금 별채에 손님이 계신다. 오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는데, 갓난아이를 안고 반쯤 넋이 나가서는 도움을 청하더구나. 오랫동안 굶주렸는지 꼴이 말이 아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이리로 데려왔는데 괜찮겠느냐?”

“아버지께서 데려오신 손님이라면 정성껏 모셔야지요. 의원도 부를까요?”

“내가 이미 불렀으니 곧 올 거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아버지. 송악은 지내시기에 어떠셨는지요?”

“거기야 좋은 땅이니 지내기 좋지……”

오랜만에 상봉한 부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허월과 순식은 푸짐한 밥상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술이냐? 좋구나, 좋아! 허허허!”

허월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껄껄 웃었다.

“아버지, 아무리 절을 떠나셨다지만 계율을 어기셔도 되는 것입니까?”

“시끄럽다. 중도 사람이다. 그동안 이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느냐?”

“하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드시지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래, 그래. 한 잔 더 따라 보아라.”

순식은 다시 허월의 잔을 채웠고 허월은 또 단번에 들이켰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원함과 자유였다.

부자가 한참 술을 즐기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집사가 순식을 불렀다.

“성주님, 의원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여보내게.”

의원이 안으로 들어오자 허월은 서둘러 그에게 물었다.

“어서 오게. 그 여인과 아이는 좀 어떤가?”

“아이는 열이 내렸으니 괜찮을 겁니다. 허나 아이 어미는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기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 상한 음식을 먹었는지 위장에도 탈이 났습니다. 오래 안정을 취하며 몸을 돌보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쩌다 그 지경까지……. 잘 좀 살펴주게.”

“예, 스님.”

허월은 술잔을 마저 비웠으나 마음이 착잡하여 더 들어가지 않았다.

“피곤하구나. 그만 자야겠다.”

“예, 아버지. 침소를 살펴두었습니다. 가시지요.”

순식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허월을 부축하여 방으로 데려갔다.

유영은 어느 집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전에 묵었던 노인의 집과는 달리 넓고 잘 정돈된 방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유영은 눈앞이 핑 돌아서 도로 쓰러졌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초롱이 잠들어 있었다. 초롱은 부드러운 새 포대기에 싸여있었다. 곤히 잠든 초롱을 보니 유영은 마음이 놓였으나 어쩌다 지금 있는 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의 기억은 한 승려에게 도움을 청하였던 것까지였다.

“목매님, 고맙습니다…….”

유영은 중얼거리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나무 조각은 없었다. 유영은 당황하여 옷 속을 다급하게 뒤졌다. 누워있던 자리를 다 들춰보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미음을 좀 가져왔습니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여긴 명주의 성주님 댁입니다.”

“성주님 댁이요? 아니, 내가 왜……”

“성주님의 가친이신 허월 스님께서 이리로 데리고 오셨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허월 스님이요?”

무작정 도움을 청했던 유영이 허월의 법명을 알 리가 없었다. 유영은 하녀를 붙들고 다급히 나무 조각의 행방을 물었다.

“그, 내가 가지고 있던 그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것이요? 아, 그 나무 인형 말입니까? 어제 몸을 닦아드리면서 꺼내 놓았습니다. 여기…….”

하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초롱이 조각을 안고 자고 있었다. 유영은 그것을 빼내어 자신의 품속에 깊숙이 넣었다. 하녀는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의 장난감인 줄 알고 아이에게 주었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요?”

“이것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목매님이십니다…….”

“목매님? 그게 무엇입니까?”

하녀가 묻자 유영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모르십니까? 두두리 말입니다.”

하녀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처음 들어보는군요. 어쨌든 미음 좀 드시지요.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속이 많이 상해서 아직 곡기를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드셔요.”

하녀는 그릇을 유영에게 내밀었다. 유영은 자신이 있는 장소가 명주 성주의 집이고, 도움을 청했던 승려가 성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그릇을 들어 천천히 미음을 마셨다. 따끈한 미음이 허한 위장을 달래주었다. 배를 채워주진 못하였으나 속에 뭐라도 들어가니 정신이 들고 눈이 맑아졌다. 미음을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초롱이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뜨렸다. 유영은 아이를 안으려 하였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뭘 드시니까 저도 배가 고픈 모양이네, 호호. 내 이럴 줄 알고 암죽을 쑤어 왔지. 제가 먹일 터이니 좀 더 쉬세요.”

하녀는 초롱을 안고 미음과 함께 가져온 암죽을 숟가락으로 떠서 초롱의 입에 가져갔다. 초롱은 금세 울음을 그치고 숟가락을 빨며 암죽을 받아먹었다.

“아유, 잘 먹네. 착하기도 해라.”

유영은 얌전히 암죽을 먹는 초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외지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금 있는 곳까지 살아서 올 수 있었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유영은 마음속으로 목매에게 기도를 올렸다. 어서 기운을 차려 도움을 준 성주 부자에게도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용어 해석>

암죽 : 어머니가 젖이 부족할 때 아기에게 젖 대신 먹이는 곡식이나 밤의 가루로 쑨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