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끝난 도망

by 어둠의 극락

“으음……”

잠에서 깬 허월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워낙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머리가 아프고 속이 불편하였다. 입안부터 목까지 바짝 말라서 허월은 곁에 있던 자리끼부터 들이켰다. 갈증을 해결하고 나니 어제 데리고 온 여인과 아기가 생각났다. 그들을 확인하러 방을 나서려 하였으나 두통 탓에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머리야……. 밖에 누구 있는가?”

“예, 스님.”

허월의 부름에 마침 지나가던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빈도가 술이 과했던 모양일세, 허허허…….”

“의원을 부를까요?”

“아닐세. 그보다도 그 손님은 어찌하고 있는가?”

“조금 전에 정신을 차리고 미음을 들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에게도 암죽을 쑤어 주었고요.”

“다행이군. 당분간 자네들이 잘 돌봐주게나.”

“예, 스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침 공양을 준비하고 있으니 곧 올리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물 좀 더 가져다주게.”

집사가 나가고 허월은 머리가 띵하여 도로 자리에 누웠다.

물을 더 마시고 어느 정도 취기가 가신 허월은 여인과 아기를 살피러 별채로 향하였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가 신경 쓰였으나 그들의 상태와 사연이 궁금하여 꼭 확인하고 싶었다.

“에헴, 들어가겠소.”

인기척을 내며 방으로 들어서니 여인은 벽에 기대어 앉아 하녀의 품에 안겨 웃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허월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허월은 그를 말렸다.

“아아, 그대로 계시오. 기운을 차려서 참으로 다행이오.”

“참으로 고맙습니다, 스님.”

“허허허, 다 하늘이 도우신 덕이오.”

허월은 인자하게 웃으며 하녀에게 안겨있는 아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도 괜찮은가?”

“예. 열도 내리고 암죽도 잘 받아먹었습니다.”

“잘 되었구먼.”

허월은 장난스럽게 아기의 코를 살살 간질였다. 아기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았는지 방긋 웃었다.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오?”

“초롱이라고 합니다.”

“어여쁜 이름이구려. 이름처럼 참으로 어여쁜 아이요, 허허허.”

초롱을 귀여워해 주는 사람들 덕에 유영도 점차 웃음을 되찾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시오. 이곳에서 얼마든지 지내도 좋으니 부담 갖지 말고 몸을 회복하는 데에 전념하시구려.”

허월의 따뜻한 말에 유영은 목이 메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허허허, 하늘이 도왔다고 하지 않았소? 빈도에게 감사할 것 없소이다. 나무관세음보살.”

허월은 방을 나서며 하녀를 불렀다.

“잠시 나 좀 보자꾸나.”

방 밖으로 나온 허월은 하녀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저들을 돌보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

“예. 여태 잠들어 계시다가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얘기는 나누어 보았느냐? 이름이나 출신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없느냐?”

“여쭤보았으나 대답을 꺼리시더군요. 참,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

“저……”

하녀는 허월을 방에서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어제 저분의 몸에서 나온 그 나무 인형 말입니다. 잠들어 계시는 동안 그것을 아이에게 주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그것부터 찾으시더니 아이에게서 빼앗으면서 장난감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켜주는 목매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목매님? 그 나무 조각을 그렇게 불렀단 말이냐?”

“예, 스님. 두두리라고도 하였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허월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언젠가 소문으로는 들었으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물건의 정체와 함께 유영의 출신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들어본 적이 있느니라. 저 여인이 아무래도 왕도에서 온 모양이로구나. 두두리는 예로부터 서라벌에서 숭배하는 나무 도깨비를 이르는 말이다. 두두리를 믿는 것을 보니 서라벌 출신임이 틀림없다.”

“나무 도깨비요? 어찌 그런 것을……. 게다가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하녀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하니 일단은 함구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예, 스님.”

허월은 유영을 배려하여 하녀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허월과 순식은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숙취로 인하여 속이 불편했던 허월은 묽게 쑨 죽을 조금씩 떠먹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음, 괜찮다. 먹을 만하다. 너무 오랜만에 많이 마셨구나, 허허허.”

부자가 한참 식사를 하던 중, 밖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이보게, 밖에 웬 소란인가?”

순식은 수저를 내려놓고 집사를 불러 물었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집사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대문 밖에서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집을 지키는 수비병들이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러시는 게요?”

“어허, 대왕 폐하의 영을 받들어 왔다고 하지 않는가? 어서 성주님께 아뢰게!”

“무례를 삼가시지요!”

집사가 대문을 살며시 열고 바깥을 살피니 웬 군관과 한 무리의 군사들이 와 있었다. 집사는 당혹스러워하며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오?”

“우리는 서라벌에서 왔소. 얼마 전 왕도 인근에서 반란이 있었소. 그래서 도망친 역적의 일족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오. 이리로 오면서 이 댁에 수상한 자를 들였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그자를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군관의 말에 집사는 놀랐으나 이내 그의 태도에 성을 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몰려와서 소란을 피우면 어떡하오? 이곳은 명주의 성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란 말이오!”

군관은 굴하지 않고 소리쳤다.

“알고 있소! 허나 우리는 대왕 폐하의 영을 받들고 왔소. 어서 그 수상한 자를 넘기던지, 아니면 성주님을 뵙게 해주시오!”

“허, 이것 참……. 기다리시오!”

집사는 서둘러 순식에게 달려갔다.

“성주님, 지금 서라벌에서 온 관군이 성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뭐라? 서라벌의 관군이 왜?”

“서라벌 인근에서 반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적의 일족들을 색출한다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순식은 당황하여 집사와 허월을 번갈아 보았다. 허월은 굳어진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한데 왜 우리 집에 와서 역적의 일족을 찾는단 말인가?”

“수상한 자가 이리로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혹 스님께서 데려오신 그 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그 여인이?”

허월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여인이 서라벌에서 왔음을 확인하였으니 아무래도 연관이 있는 듯하였다. 만일 그 여인이 반란에 연루되어 도망치는 사람이라면, 그를 도와준 자신과 아들 순식까지 엮여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에 양주에서 신홍이라는 자가 모반을 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일인가 봅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허월은 순식을 바라보았다.

“내가 괜한 일을 벌였구나. 미안하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불제자이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순식은 허월을 위로하였다. 그러고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자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들이 그 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을 터이니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성주인 제가 아니라는데 제깟 놈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저들을 들여보낼까요?”

안절부절못하던 집사가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내가 나가겠네.”

“예? 대문 밖에서 맞으시렵니까?”

“그렇네. 왕명을 들먹거리는 저런 건방진 놈들을 무엇 하러 들인단 말인가?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허월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문이 열리고 순식이 군사들을 지휘할 때 쓰는 봉을 들고 걸어 나왔다. 서라벌의 관군은 대문 밖까지 직접 나온 성주를 보고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곳의 성주인데 무슨 일이냐?”

“예, 성주님. 대왕 폐하의 영으로 역적의 일족들을 색출하는 중입니다. 이리로 오는 길에 행색이 수상한 자가 성문에서 검문을 거부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성주님 댁으로 향하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소인이 그이를 한 번만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순식은 일부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여기로 오면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그렇습니다.”

“누가 그리 말하더냐?”

“몇몇 백성들이 그리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순식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허, 백성이라? 혹 그들과 면식이 있느냐?”

“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래? 그럼 어찌하여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느냐?”

“저, 그것이……”

군관은 말문이 막혔다.

“아, 알겠다. 네 놈은 이곳을 다스리는 성주인 내가 우스워서 이름도 모르는 어느 무지렁이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던 게로구나. 아니 그러하냐?”

순식이 비아냥거리자 군관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서, 성주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몰려와서 다짜고짜 내 집 대문부터 두드리겠느냐?”

“성주님……”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는 그런 자를 들인 적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찾아보아라. 여봐라, 문을 닫아라.”

“허나 성주님!”

“물러가라 하였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께서 귀향하시어 극진히 모시는 중이었건만, 네놈들 때문에 노여워하고 계시느니라! 혼쭐이 나기 싫거든 썩 물러가라!”

순식은 봉을 군관의 코 앞에 들이대며 호통쳤다.

“대문을 닫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잠가라!”

“예!”

“서, 성주님!”

군관이 다급하게 돌아서는 순식을 불렀으나 대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관군들은 얼이 빠진 채 잠긴 대문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이 서라벌의 관군을 쫓아내고 돌아오니 허월과 집안사람들이 전부 마당에 나와 있었다. 걱정하는 가족들과는 달리 허월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역시 너에게 자리를 물려주길 잘하였어, 허허허.”

허월은 순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였다.

“과찬입니다, 아버지. 들어가시지요.”

“그래.”

“스님! 성주님!”

허월과 순식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유영과 초롱을 살피러 갔던 하녀가 다급히 그들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별채의 손님이 사라지셨습니다!”

하녀의 말에 허월은 화들짝 놀랐다.

“뭐라? 아니 그 몸으로 어디를 갔다는 게냐?”

“성주님께서 나오셨을 때 쇤네가 그분을 살피러 별채로 가보았더니 이미 안 계셨습니다.”

“아이도 데려갔느냐?”

“예, 스님.”

“이런…… 관군이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뒷문으로 달아난 모양이로구나. 이를 어찌한다?”

허월은 탄식하며 머리를 짚었다.

“심려 놓으십시오, 아버지. 성치 않은 몸으로 멀리 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군사들을 풀어서 찾아내겠습니다. 여봐라!”

순식은 허월을 안심시키며 장수를 부르려 하였다. 그러자 허월이 그를 말렸다.

“아니, 아니! 군사들은 아니 된다. 저를 잡으러 쫓아오는 줄 알고 더 멀리 달아날 게야. 가솔들을 동원하거라.”

“알겠습니다. 여보게, 집사! 어서 아랫것들 전부 데리고 가서 그 여인을 찾아 데려오게! 성안을 샅샅이 뒤지게!”

“예, 성주님. 다들 가자!”

집사는 하인들과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내가 괜한 짓을 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으로 드시지요.”


“헉, 허억, 헉……”

유영은 앞만 보고 계속 달렸다. 정신없이 뛰느라 그의 품에 안긴 초롱이 불편하여 울음을 터뜨렸으나 달래줄 틈은 없었다.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라벌의 관군들이 끝내 자신을 찾아내고 말았다. 왕명을 내세우며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기세였다. 초롱도 살아남을 수 없을뿐더러 자신들을 도운 허월의 입장까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유영은 쉼 없이 달렸다.

어느덧 성 밖으로 빠져나온 유영은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오르막길은 뛰고 싶어도 뛸 수가 없어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신 한 짝은 도중에 잃어버렸고, 물집이 다 터진 발은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나기 시작하였다.

산 중턱에 이르러 길이 점점 험해진 탓에 유영은 더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하마터면 초롱을 깔아뭉갤 뻔하였다. 숨이 차서 가슴이 칼로 에는 것처럼 아팠다. 유영은 품에 안은 초롱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간신히 몸을 반쯤 세우고 기어갔다. 그러나 더는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유영은 결국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곁에 서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유영은 이제 몸에서 생명의 불씨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딸을 지켜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꼼짝없이 산중에서 홀로 울다가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 분명하였다.

‘이 아이만은……. 부디 이 아이만은…….’

울부짖는 딸을 달래줄 여력도 없던 유영은 손을 겨우 움직여서 품속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었다. 평생 모신 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유영은 다른 손을 나무 곁에 있던 바위의 날카로운 부분에 내리쳐 상처를 내었다. 그리고 손을 꼭 쥐고 피를 짜내어 나무 조각에 떨어뜨렸다.

‘목매님, 저의 제물을 받으시고 부디 도와주십시오.’

유영은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상처에서는 점점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와 나무 조각에 스며들었다.

‘목매님, 부디 이 가엾은 아이를 도와주십시오. 비나이다…….’

유영은 합장하듯 두 손으로 피에 젖은 나무 조각을 감싸 쥐었다. 비록 살면서 단 한 번도 두두리의 실체를 본 적은 없었으나, 피까지 바치고 간곡하게 빌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손의 상처와 피가 말라붙었고, 졸음이 쏟아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영은 손에 힘이 빠져 쥐고 있던 나무 조각을 떨어뜨렸다. 마지막 희망마저 잃어버린 그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무에 기대어 죽음을 기다렸다.

“이 가여운 것. 네가 나를 찾았구나.”

별안간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촉감이 뺨에 느껴지며 온화하고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유영은 힘겹게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눈이 부시도록 하얀 형체가 서 있었다.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인 여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은 물론 피부까지 마치 눈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모, 목매님……?”

유영이 조심스레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가 나를 부르기에 와 보았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오자 유영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한순간 몸에 힘이 솟은 유영은 그 신비한 여인에게 쓰러지듯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예, 목매님. 제 피를 제물로 바쳤으니 저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 여식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안전한 곳에 숨겨 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이 아이만 꼭 좀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여인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이더니 차디찬 손으로 유영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하였다.

“네가 이토록 비니 내 들어주마. 다만 피가 모자라는데, 네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바칠 수 있겠느냐?”

피를 전부 다 달라는 말에 유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말은 결국 목숨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뿐이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저는 얼마 더 살지 못하니 다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만 무사하면 됩니다.”

여인은 기뻐하며 유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착하기도 하지. 꼭 그렇게 해 주마. 이 아이를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잘 숨겨 주겠다. 그러니 염려 말고 편히 눈을 감아라.”

“고맙습니다, 목매님. 고맙습니다.”

유영은 비로소 안심하며 정신을 놓아버렸다. 여인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유영을 안아 올렸다. 유영의 몸이 축 늘어지며 고개가 뒤로 꺾였다. 여인은 입을 쩍 벌리더니 기다란 혀를 내밀어 유영의 꺾인 목에 찔러 박았다. 그러고는 유영의 몸에 흐르는 피를 빨아 마셨다. 그 가녀린 몸에서는 피와 함께 생기가 점차 사라졌다. 유영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더는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어 죽더라도 안타까울 게 없었다.

“하…… 다 말라비틀어져서 맛도 별로네.”

피를 다 마신 요괴는 하얗게 질린 유영의 몸을 내던졌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누워있는 초롱을 내려다보았다. 초롱은 처음 보는 요괴가 신기하였는지 울음을 그치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작아서 먹을 것도 없겠고.”

요괴는 하얀 발로 초롱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이제 값을 치러볼까?”

요괴는 교활하게 웃으며 초롱을 집어 들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요괴의 손에 잡힌 채 거센 맞바람을 맞은 초롱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산을 벗어난 요괴는 해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리의 윤곽이 비칠 정도로 얇고 하얀 바짓자락이 흐르는 물결처럼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요괴는 햇빛에 데워진 따뜻한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해변을 거닐었다.

“어휴, 비린내.”

요괴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바다와 모래, 작은 바위 몇 개뿐이었다. 요괴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은 해변을 박차고 다시 날아올랐다.

요괴는 해변과 달리 파도가 거칠게 후려치는 커다란 갯바위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작은 산 같은 거대한 바위 주변에는 크고 작은 암초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요괴는 초롱을 코앞에 들어 올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되게 시끄럽네. 인간들은 이런 걸 왜 낳지?”

요괴는 포대기를 풀어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초롱을 이리저리 돌리며 만져보았다. 초롱은 발버둥 치지도 못하고 요괴의 차가운 손에 희롱당하였다. 요괴는 금세 흥미를 잃고 초롱을 혀로 한 번 핥아보고는 다시 포대기로 대충 감쌌다.

“너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달라고 하였지. 이렇게 축축하고 냄새나는 곳까지 누가 찾아오겠어?”

요괴는 허리를 숙이고 바위 아래에 있는 암초들 사이의 틈새에 초롱을 내려놓았다. 파도가 암초를 때리며 튄 바닷물이 초롱의 포대기를 적셨다. 요괴는 물이 튀는 게 싫어서 재빨리 몸을 세웠다.

“나는 네 어미가 해달라는 대로 했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잘 있어.”

요괴는 약 올리듯 초롱에게 손을 흔들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람에 날아가는 천 조각처럼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초롱은 끊임없는 파도 소리와 차가운 바닷물 탓에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거센 파도가 축축한 암초 사이에 누운 초롱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크고 거친 암초들은 초롱을 둘러싸고 육지로부터 그를 감추었다. 이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모두 잃고 바닷가에 버려진 갓난아이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당장 바다에 삼켜져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용어 해석>

기침 : 윗사람이 잠에서 깨어 일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