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만남

by 어둠의 극락

땅과 하늘이 온통 바닷속처럼 푸르게 물든 새벽, 백계산 옥룡사에도 산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직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 되지 않아 승려들은 모두 승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반면 도선은 이미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켜 앉아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잠이 줄기도 하였으나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도선이 예견하였던 미래는 대부분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 꿈을 통하여 본 일은 예상보다 오래 지체되고 있었다. 손에 나뭇가지를 든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꿈이었는데, 그 나뭇가지에는 싱싱한 나뭇잎과 함께 복숭아 두 알이 달려있었다. 도선은 그 꿈이 머지않아 귀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온다는 의미임을 알아차렸다. 때마침 그의 제자 여럿이 옥룡사를 떠난 참이라 곧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인물이 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도선은 점차 자신의 해몽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예지력이 예전과 같지 않은 듯하였다.

도선은 침구를 정리하고 다시 정자세로 앉아 눈을 감았다. 새벽 예불 전에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잠을 설쳐 피곤한 상태인지라 자꾸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도선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하늘에서 내린 신승이라 불리며 추앙받는 그도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는 결국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아침 식사를 마친 승려들은 절의 모든 문을 활짝 열고 각자 맡은 곳을 청소하였다. 도선도 자신의 방을 쓸고 걸레로 닦았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는 승방 청소만큼은 직접 하였다. 작은 방을 금세 다 정리한 도선은 걸레를 빨고 치워둔 살림살이들을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 걸레 빤 물을 땅에 쏟아버리고 돌아서는 순간, 도선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었다. 누군가가 옥룡사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선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일주문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확실히 모른 채 직접 나가서 맞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은 장소를 옮겨서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손님이 오시는구나. 누가 일주문에 좀 다녀오너라.”

도선은 청소를 막 마친 어린 제자에게 이르고는 법당으로 향하였다.

법당의 청소 상태를 점검하며 도선은 방문객을 기다렸다. 그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도선의 마음도 들떴다.

“큰스님, 모셔왔습니다.”

손님을 마중 나갔던 제자가 돌아와 도선에게 알렸다. 도선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법당문을 통하여 보인 사람은 그의 제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미승이었다. 멀리서부터 왔는지 신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머리에는 고깔을 쓰고 등에 깨끗한 새 바랑을 매고 있었다. 사미승은 도선을 보고 합장하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도선은 온화한 웃음과 함께 법당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도선 큰스님이십니다.”

제자의 소개에 사미승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희대의 고승과 만나게 되자 그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어서 오너라. 불명이 무엇인고?”

“예, 소인은 경보라 합니다.”

“경보라……. 좀 늦었구나.”

“예?”

“허허허,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오너라. 얘야, 공양간에 가서 차 좀 내어오라고 전하여라.”

“예, 큰스님.”

도선은 제자를 보내고 경보를 승방으로 데려갔다.

도선의 방으로 들어온 경보는 바랑을 내려놓고 머리에 쓴 고깔을 벗은 뒤 도선에게 절을 세 번 올렸다.

“편히 앉아라.”

“예, 큰스님.”

“그래, 출가는 어디서 하였느냐?”

“공산 부인사에서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소인의 머리를 깎아주신 스승님께서 도선 대사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얻으라 일러주셨습니다.”

“공산이라……. 명산이지.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고명하신 대덕을 직접 뵙게 되었는데 어찌 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도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대덕은 무슨. 절밥 좀 오래 먹었다고 다 대덕이더냐?”

“예?”

“그저 해본 소리다. 그나저나 아까 보니 신이 다 떨어졌더구나. 새것을 내어줄 터이니 갈아신도록 하여라.”

“고맙습니다, 큰스님.”
도선은 인자하게 웃으며 경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직 나이는 어렸으나 눈빛이며 자세가 남달랐다. 그는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경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도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

“아니다. 차 한잔 마시고 푹 쉬어라. 빈 방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서 머물면 된다.”

“고맙습니다, 큰스님.”

도선은 꿈의 내용이 다시 떠오르면서 매우 흡족하였다. 찻상이 들어오자 경보에게 손수 차까지 따라주었다.

승방에서 휴식을 취한 경보는 다시 도선의 부름을 받았다. 방에서 글을 쓰고 있던 도선은 경보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너는 그만 나가보아라.”

도선은 곁에서 먹을 갈던 제자를 내보내고 경보에게 앉으라 손짓하였다. 경보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도선은 한참 더 말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경보는 문득 도선이 무엇을 그리 열중해서 쓰는지 궁금해졌다.

“지금 쓰고 계신 글은 어떤 글입니까?”

“미리 본 일들에 대하여 글로 정리하고 있느니라.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냐?”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거짓만큼이나 감추기 어려운 것이 호기심이니라. 너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 아니냐?”

속내를 들킨 경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도선의 예지력에 대한 소문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적고 있는 글은 곧 예언서였다. 도선을 만나게 되면 그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들인데 미리 알아서 무엇하랴? 어리석은 중생들이 다들 나를 찾아와 알려달라고 매달린다만, 흐르는 물줄기의 방향을 안다고 하여 그를 반대로 꺾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다들 그를 모르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경보가 풀이 죽어 사과하자 도선은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런 부질없는 허상에 휘둘리지 않도록 앞으로 열심히 수행하면 된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잘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큰스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참, 하마터면 잊을 뻔하였구나. 곧 왕도로 떠나야 하는데 너도 함께 가자꾸나. 좋은 공부가 될 게다.”

“왕도에는 어인 일로……”

“온 세상을 한바탕 뒤집어엎을 폭풍이 다가오고 있느니라. 그를 대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곳에서 배웅해야 할 사람도 있고.”

그때, 밖에서 범종이 울렸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공양할 시간이로구나. 자, 가자. 자세한 것은 내일 알려주마.”

“예, 큰스님.”

도선과 경보는 함께 방을 나섰다.


며칠 뒤 도선은 서라벌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먼 곳까지 가는 만큼 경보는 출발하기 전에 짐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였다. 공양간에서 식량을 한가득 챙겨주어 바랑이 묵직하였다. 경보는 서라벌에 처음 가보는지라 방향은 물론 거리도 몰랐다. 도중에 산적이나 맹수를 마주치지는 않을지도 걱정이었다. 운이 좋아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백계산으로 오는 길에도 몇 번이나 산짐승의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경보와는 달리 도선은 매우 평온하였다. 그에게는 초행길이 아니었기에 안전한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경보는 그런 스승에게 존경심이 솟아났다.

“이쯤 왔으니 일러줄 말이 있다. 도중에 만나서 함께 갈 길동무가 있느니라. 그러니 누군가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고 예를 갖추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예, 큰스님.”
여행길에서는 누구든 마주칠 수 있었으나 놀라지 말라는 도선의 말에 경보는 의아하였다. 혹 귀한 사람이라도 만날 예정인 모양이었다. 놀랄 만큼 귀한 사람을 만나 함께 왕이 사는 서라벌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경보는 기대가 커졌다.

지리산 정상에 오른 도선과 경보는 경치를 감상하며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갓을 벗고 앉아 휴식을 취하였다.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본 경보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봉우리 위에 올라서니 꼭 하늘을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산맥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 산의 융단 너머에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경보는 온 세상이 그의 발아래에 놓인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뛰었다.

“큰스님,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지친 몸을 쉬게 하니 허기가 밀려온 경보는 바랑에서 주먹밥을 꺼내어 도선에게 건네었다.

“그래, 고맙구나. 너도 어서 들어라.”

“예, 큰스님. 잘 먹겠습니다.”

도선이 먼저 한입 먹는 것을 본 경보는 서둘러 주먹밥을 크게 베어 물었다. 소금간만 해서 나물과 함께 뭉쳐놓았을 뿐인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자꾸나. 내일이면 강양군에 도착할 수 있겠다.”

“만나실 분이 혹 그곳에 계시는지요?”

“허허, 나도 모른다. 가다 보면 만나겠지.”

묻는 이를 무안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경보는 남은 밥을 욱여넣으며 다시 풍경에 집중하였다.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였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덜 힘들었다. 다만 가파른 곳에서 수시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도선은 석장으로 땅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갔고 경보도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 사용하였다. 나무들 틈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서서히 붉어지자 경보는 불안해졌다.

“큰스님, 서둘러야겠습니다. 해가 지면 범이나 이리가 나올 테고, 운이 나쁘면 도적을 마주칠 수도……”

“그렇겠지. 차라리 범을 마주치는 편이 나을 터인데.”

“예?”

도선의 말에 경보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몰랐느냐? 범은 의외로 말이 통하는 상대이다. 본디 범은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한다만 간혹 반백 년을 넘기는 특별한 것들이 있는데, 신통력이 생겨서 둔갑도 하고 말도 할 수 있게 되느니라. 그리되고 나면 자신이 살던 산의 주인이 되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놀라운 이야기에 경보는 입이 떡 벌어졌다. 얘기를 듣고 나니 호기심이 마구 솟아났다.

“큰스님, 그런 범을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범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을 해치지는 않습니까?”

“허허, 조금 전까지 서두르자던 녀석은 어디로 갔누? 나도 잘 모른다. 하나밖에 만나보지 못하였다. 자, 어서 가자. 오늘 밤에 묵을 곳을 찾아봐야지.”

이제 열아홉 살이나 먹었으니 알 만한 건 다 안다는 경보의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도선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저 두렵기만 하던 존재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부스럭-

고요하던 산속에 두 사람 외에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밤에 돌아다니는 산짐승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었다. 경보는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자 그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도선도 뭔가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큰스님?”

“쉿!”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던 도선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그는 우거진 나무들 틈 사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보의 눈에는 딱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와 덤불, 크고 작은 바위들만 보일 뿐이었다. 도선이 짚고 있던 석장을 천천히 양손으로 쥐었다. 금방이라도 석장으로 뭔가를 내리칠 듯한 방어 태세였다. 도선의 행동에 경보는 더욱 두려워져서 손이 떨렸다.

“움직이지 마라.”

도선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경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도선의 등 뒤에서 눈알만 굴려서 도선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도선이 무엇을 보고 경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보는 이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이 찰 지경이었다. 도선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헉!”

눈이 빠지도록 노려본 끝에 경보는 도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무들 사이로 검은 점박이 무늬가 보였다. 커다란 표범 한 마리가 멀찍이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표범은 몸을 웅크리고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경보는 표범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멎을 듯하였다.

“천천히, 등을 보이지 말고 뒤로 물러나거라.”

도선이 속삭였다. 그러나 경보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였다가는 곧바로 표범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노려보는 노란 두 눈은 그가 어서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였다. 설령 전력으로 달아나더라도 네 발로 달리는 맹수에게 금방 따라잡힐 것이 불 보듯 뻔하였다.

“뒤로 물러나라니까. 어서.”

“크, 큰스님께선 어쩌시려고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와중에도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선은 단호하였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물러나거라.”

도선이 재촉하자 경보는 마지못해 간신히 발을 떼어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최대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게 움직이면 굶주린 짐승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어어……”

그러나 두려움으로 경직된 채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몸의 중심이 흐트러져 경보는 그대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자 도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덮칠 기회를 노리던 표범은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으아아아!”

경보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도선은 재빨리 코앞까지 달려온 표범에게 석장을 휘둘렀다. 석장에 달린 고리가 요란하게 쩔렁거리자, 표범은 놀랐는지 급히 멈춰 서서 더 다가오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도선은 석장을 계속 이리저리 내찔렀고, 표범은 이빨을 드러내며 앞발을 휘둘렀다. 도선은 애써 침착하게 표범에게 맞섰으나 노쇠한 그의 몸은 서서히 한계에 다다랐다. 점차 힘이 빠진 도선은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표범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선을 덮쳐 넘어뜨렸다. 도선은 간신히 석장을 붙들고 표범을 밀어내려 하였다. 표범은 자신을 가로막는 석장을 씹어 부러뜨릴 기세로 집요하게 도선의 목을 노렸다. 표범의 뜨거운 침이 도선의 얼굴과 옷깃에 튀었다.

쉬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갑자기 표범이 나가떨어졌다. 마치 뭔가에 밀쳐지듯 표범은 순식간에 도선으로부터 떨어져 나뒹굴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표범이 떨어져 나가자 도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경보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보니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쓰러졌던 표범이 곧바로 일어나 무언가를 향하여 포효하고 있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뱀이었다. 거대한 뱀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경보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 뱀의 머리는 뱀의 것이 아니었다. 비늘로 뒤덮인 매끄러운 몸에 흰 털로 뒤덮이고 수염이 달린 고양이의 머리가 있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생김새에 경보는 넋을 잃고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다 잡은 먹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표범은 앞발을 휘두르며 덤볐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그 존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머리를 움직이며 날카로운 소리와 낫 같은 이빨로 표범을 위협하였다. 그 기세에 밀린 표범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뒤로 돌아 잽싸게 달아났다.

“때맞추어 잘 와주었네. 덕분에 살았어.”

도선은 옷을 털며 자연스럽게 요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경보는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였다. 도선이 합장하며 인사를 건네자 요괴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엇 하느냐? 어서 이리 와서 인사하거라.”

도선은 멀찍이서 넋을 놓고 있던 경보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경보는 조심스럽게 요괴에게 다가갔다.

“두려워 마라. 이 자가 방금 우리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느냐? 어서 이리 가까이 와서 예를 갖추어라.”

“예, 예…….”

경보는 간신히 요괴와 마주하고 있는 도선의 옆에 섰다. 그러나 요괴의 기이한 생김새에 여전히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를 알아차렸는지 요괴는 모습을 바꾸었다. 한순간에 고양이의 머리와 뱀의 몸이 인간처럼 바뀌었다. 달빛처럼 희고 은빛이 섞인 털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고운 머리카락으로 바뀌었고, 하얀 얼굴은 성별을 알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비늘로 덮인 매끄러운 몸은 하얀 비단옷 차림의 사람으로 변하였다. 요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먼저 경보에게 고개를 숙였다. 경보는 자기도 모르게 요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경보가 요괴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있자 도선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경보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요괴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빈도의 제자를 용서하시게. 우리 옥룡사에 갓 들어온 사미인데, 담이 작아서 그렇다네. 통성명들 하게나.”

“하랑이오.”

“겨, 겨, 경보라 합니다.”

요괴의 붉은 입술로부터 나긋하고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하랑은 지난 십 년간 송악에 머물러 있었느니라. 나의 부탁으로 그곳에서 태어난 귀인을 지켜주었지. 생김새는 이러하여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 없느니라. 자, 그럼 다시 길을 떠나자. 갈 길이 멀다.”

산에서 내려오니 이미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다. 도선 일행은 산기슭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제외하면 집 안은 깨끗한 편이었다. 경보는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도선은 마루를 대충 쓸어내었다.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으니 그냥 맨바닥에서 자야겠구먼.”

도선은 자리에 앉아서 버선을 벗었다. 하랑은 다소곳이 앉아 그와 마주하였다.

“서라벌에는 무엇 하러 가는가?”

“가서 할 일이 많다네. 곧 이승을 떠날 사람을 배웅해야 하고 왕실에도 큰 격동이 있을 걸세. 어쩌면 백고좌에 또다시 참석해야 할 수도 있고.”

“임금이 또 바뀐다는 말인가?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본디 타고난 명이 짧은 탓이라네. 그래서 서라벌에 도착하면 한동안 그곳에 머무를 생각일세. 그대도 함께 가지 않겠는가? 도성이 매우 화려해서 구경거리가 많다네. 황룡사와 금으로 뒤덮은 집들도 있고, 무엇보다 맛 좋은 음식이 많지. 그대가 좋아하는 머루주도 얻을 수 있을 걸세, 허허허.”

머루주라는 말에 하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가야지. 한데 송악은 참으로 괜찮겠는가? 그대의 말대로 그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곁을 지켰네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으니 이제부터는 빈도가 직접 그 아이를 살필 생각이라네. 제왕의 자질을 갖추고 앞날을 준비하도록 하여야지.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는가?”

“일이야 많았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에 온갖 잡것들이 꼬였네.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들을 몇 번 쫓아내었더니 그 뒤로는 담장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더군.”

“그랬는가?”

도선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래. 다른 집에는 얼씬거리지도 않고 오직 그 집에만 그렇게 모여들었다네. 그대가 두고 간 목걸이와 함께 내가 버티고 있는데도 물러가지를 않았어. 잡아먹을 어린아이는 다른 집에도 얼마든지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그러자 도선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딘가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서였다.

“짚이는 데가 있는가?”

하랑이 도선의 심중을 읽고 묻자 도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괴들이 왕건의 집에 모여드는 것은 단순히 어린아이를 잡아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떤 공동의 목적이 있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었다. 도선은 그 목적을 이루려는 이가 누구인지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큰스님, 다 되었습니다.”

“오, 그래. 너도 이리 와 앉아라.”

경보가 도중에 캤던 버섯과 마를 구워서 가져왔다.

“좀 들어보겠는가?”

도선은 하랑에게 먼저 음식을 권하였으나 하랑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였다. 그는 굳이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었고, 먹게 되더라도 산과 들에서 나는 작물보다는 인간이 여러 방법으로 만든 음식을 선호하였다.

도선과 경보가 잠자리에 든 사이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마당에 피워둔 불이 사그라들 즈음,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깬 경보는 곁에 둔 호리병의 물을 마셨다. 다시 누우려던 경보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도선과 본인 둘뿐이었다. 하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경보는 그가 다른 곳에서 자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치 않아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도선이 말한 길동무가 바로 하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식사를 준비하면서 엿들은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만나서 함께 가기로 하였다면 분명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을 터인데, 도선은 하랑을 만난 오늘 서라벌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다. 어쩌면 하랑과 만난 것은 우연이었고 만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경보는 한참 더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용어 해석>

공산 : 지금의 대구 팔공산.

대덕 : 부처 · 보살 · 고승 등을 높여 이르는 말.

강양군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백고좌 : 100명의 승려를 청하여 100일 동안 한 명씩 설법을 듣는 호국불교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