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여행 끝에 일행은 서라벌과 접해 있는 오구산현에 다다랐다. 마침내 길고도 험한 여정의 끝이 보이니 경보는 마음이 들떴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본모습으로 돌아가 발 없이 몸으로 기어가는 하랑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도선도 지쳤는지 점점 걸음이 느려졌다. 때맞추어 앞에 민가들이 보였다.
“큰스님, 저기서 좀 쉬었다가 가시지요.”
“그래, 그러자꾸나.”
마을에 들어서니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도선을 알아보고는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들었다. 도선도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화답하였다. 경보는 스승의 유명세를 직접 목격하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그런 도선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현의 관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옷을 잘 차려입은 현령과 관리들이 달려 나와 도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사님, 어서 오십시오. 지금 막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왔습니다.”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냈는가?”
도선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현령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예, 잘 지냈습니다. 대사님께서도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빈도야 늘 그럭저럭 지내지. 왕도에 또 볼 일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하루만 쉬어갈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대사님. 소인이 언제 거절한 적이 있었던가요? 안으로 드시지요.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매번 고맙구먼.”
현령은 도선 일행을 관아로 맞이하였다.
식사를 마친 도선은 현령이 따로 마련한 자리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현령은 잘 익은 참외를 도선에게 대접하였다.
“참외가 잘 익었군. 달고 시원하네.”
“철에 맞추어 잘 오셨습니다. 함께 오신 분들에게도 내어드렸습니다.”
“고맙네. 자네도 어서 들게.”
도선은 참외 한 조각을 더 먹은 뒤 현령에게 물었다.
“요즘 왕도의 사정은 어떠한가?”
그러자 현령의 표정이 한층 가라앉았다.
“대왕 폐하께서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후계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저런, 결국 때가 되었구먼.”
“본래 병약하신 분이셨으니 놀랄 일도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제 갓 보령 스물을 넘기신 분께서 어쩌다가…….”
현령은 도선이 별 동요가 없음을 보았다.
“역시 대사님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지난해에 열렸던 백고좌에도 참석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지금 왕도로 가시는 까닭도 혹……”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명운이 있는 법일세. 하늘의 뜻을 빈도라고 어찌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지만 별수 없는 일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나저나 흥륜사에 관한 소식은 혹시 듣지 못하였는가?”
“흥륜사 말씀입니까? 그곳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변고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현령의 대답에 도선은 아까와는 달리 다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음, 그래. 차 한 잔 더 주게.”
“아, 예.”
현령은 다관을 들어 도선의 빈 잔을 채웠다. 그는 도선이 왜 왕보다 흥륜사에 대하여 더 궁금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햇빛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도선은 방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경전을 읽으며 그 내용을 익히던 경보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숨을 죽였다. 방이 점점 어두워지자 경보는 등불을 밝히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족제비라도 되느냐? 편하게 있어라.”
“아, 예, 큰스님.”
도선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의 적막을 깨자 경보는 흠칫하였다. 그는 등불을 밝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문득 침대 쪽을 돌아보니 하랑이 침대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었다. 꼭 고양이가 똬리를 튼 뱀을 머리에 베고 자는 듯한 기이한 형상이었다. 경보는 다시 경전에 집중하였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마.”
“예?”
해가 지고 있는데 갑자기 도선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경보는 당황하였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도선은 석장만 챙겨서 빠르게 방을 나섰다. 경보는 얼이 빠진 채 닫힌 방문만 바라보았다. 어느 틈에 하랑도 잠에서 깨어 방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마치 겁을 먹은 듯 몸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경보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새벽 공기보다도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도선은 마을의 뒷산으로 향하였다. 한기가 산에서 내려와서 마을에 퍼지고 있었으나 도선은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히려 표범을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 평온하였다.
산기슭에 다다른 도선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멀찍이서 보았을 때는 분명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서 붉은 노을빛이 산의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있었다. 그런데 산에 가까워지니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마치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듯 발밑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보다 더 짙은 어둠이었다. 도선은 당황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의 차이가 없었다. 도선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석장으로 발밑을 짚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어두운 산으로 들어가면서도 조금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산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발과 석장 끝에 닿는 지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해가 다 졌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선은 산속을 다 꿰고 있는 듯 주저함이 없었다. 공허와 같은 어둠에 사로잡힌 산속에서 도선은 정신을 집중하여 산을 감싼 한기의 흐름을 느끼고 그 근원지를 찾았다. 한기가 미묘하게 더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이 있었다. 도선은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차츰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었다. 도선은 이제 석장으로 땅을 짚지도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눈을 가리던 어둠이 걷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땅거미가 져 있었다. 도선이 멈춰 선 곳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가였다.
“좀 더 일찍 만날 줄 알았네.”
도선은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계곡에서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으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옷차림의 인물이었다. 보라색 옷깃이 그의 옷에서 그나마 밝은 부분이었다. 흑재였다. 그는 이번에는 두건 대신 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관을 상투 위에 쓰고 있었다.
“늙었어도 눈치는 그대로구나. 징그러운 놈.”
“허허허,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흑재는 예전과 다름없이 도선을 보자마자 악담을 뱉었다. 도선은 손자의 투정을 받아주는 할아버지처럼 그저 웃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그대가 오지 않을까 우려하였다네. 잘 왔네.”
“뭐, 잊고 있기는 하였지. 조금 전에 갑자기 떠올라서 막 이리로 왔다.”
“그랬는가? 허허, 역시 신통하구먼. 마침 서라벌이 이곳에서 지척일세.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세나.”
“그러던지.”
도선은 산에서 내려가려고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흑재는 따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을에는 아니 가시려는가?”
“내가 무엇 하러 그 지저분한 곳까지 따라가야 하나? 여기서 있다가 아침에 그대가 길을 나서면 따르겠다.”
“그럼 그렇게 하시게. 내일 아침에 보세.”
도선은 손을 흔들며 산에서 내려갔다. 그는 흑재가 자신의 제안에 응해주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도선이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경보는 걱정되어 편히 쉬지도 못하였다. 방 안에 가득한 한기 탓에 몸이 떨렸다. 스승을 혼자 보낸 것이 후회되어 지금이라도 산으로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니 더욱 두려워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랑은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가봐야겠습니다. 역시 홀로 가시게 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잠자코 있어라.”
하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허나……”
“도선은 백계산에 눌러앉아 있던 사나운 놈을 홀로 쫓아낸 적도 있다. 나이가 들었어도 힘은 그대로이니 시름하지 말아라.”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하랑도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기운이 한기에 섞여 집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밤이 되자 더욱 강해진 그 기운은 불씨처럼 바람과 어둠을 타고 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고 가슴이 짓눌리듯이 답답하였다.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하랑은 공기의 변화를 감지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뼈까지 얼어붙는 듯하던 한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더는 몸이 떨리지 않았고 압박감과 불길한 느낌도 사라졌다. 하랑은 비로소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해졌다. 어느새 경보는 침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스승을 두고 차마 먼저 잠들 수가 없어서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랑이 안도하며 살며시 방문을 열어 보니 도선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빈도를 기다렸는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도선은 방으로 들어와 석장을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졸던 경보는 도선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아. 편히 누워서 자지 왜 그러고 있느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어서 자라.”
“예, 큰스님…….”
경보는 크게 하품을 하며 쓰러지듯 누웠다.
“누구를 만나고 왔나?”
하랑이 다가와 묻자 도선은 이불을 덮으며 답하였다.
“지난번에 함께 서라벌에 가기로 하였던 빈도의 벗이라네. 내일 소개해 주겠네.”
“벗이라고? 저토록 차갑고 섬뜩한 것을 벗이라고 부르는가? 태어나서 그런 것은 처음 느껴보았네. 누구인가?”
“내일 얘기하세.”
도선이 대답을 피하니 하랑은 더 캐물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랑은 도로 자리로 돌아가서 잠을 청하였다. 정체는 몰라도 굉장히 강력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한없이 냉혹하고 사악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펴 가십시오, 대사님.”
“잘 있게. 돌아가는 길에도 잘 부탁하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선 일행은 현령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밝게 인사하며 길을 나선 도선과 경보와는 달리 하랑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는 왠지 찝찝하여 마을 뒷산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불길하였다.
마을을 벗어나자 흑재가 서라벌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랑은 본능적으로 낯선 이를 경계하였다. 반면 도선은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길동무가 늘어나니 좋구먼.”
흑재에게 접근하자 하랑은 당혹스러웠다.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님이 분명하였는데도 요기는커녕 눈앞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기운을 감추는 것은 본인은 물론 웬만한 요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날 밤과 달리 몸은 편하였으나 마음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흑재와 눈이 마주친 하랑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였다.
“서로 인사들 나누게. 이쪽은 흑재라고 하네. 우리와 서라벌까지 동행할 걸세.”
경보는 흑재에게 합장하며 인사를 하였으나 하랑은 시선을 돌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를 본 흑재는 코웃음을 쳤다.
“인사는 무슨. 알고 싶지도 않다.”
“어허, 왜 그러시는가. 정 그렇다면 빈도가 대신 소개하지. 이쪽은 하랑이라고 하네. 그리고 이 아이는 빈도의 제자인 경보이고.”
하랑은 마지못해 흑재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왼쪽 눈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였으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온전한 오른쪽 눈보다 더 섬뜩하였다. 흑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먼저 인사를 하자 하랑도 고개를 숙였다. 흑재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하랑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자, 그럼 가세. 서라벌에 도착하면 우선 들를 곳이 있네.”
하랑은 도로 흑재의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도선의 뒤를 따랐고, 흑재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구산현에서처럼 서라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도선을 알아보았다. 인파가 삽시간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도선에게 인사를 올리고 미래를 알려달라, 법문을 해달라며 매달리는 바람에 일행은 곤란해졌다. 경보가 나서서 사람들을 밀어내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북새통을 벗어나고 보니 경보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고, 깔려 죽는 줄 알았네.”
“고생 많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힘을 내거라.”
도선은 숨을 몰아쉬는 경보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였다. 흑재는 경보를 보고 숨죽여 웃었으나 하랑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흑재의 존재가 몹시 불편하였으나 도선과 경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도선은 일행을 이끌고 흥륜사 앞에 멈춰 섰다.
“여기는 절 아닌가?”
흑재는 볼멘소리를 내었다. 서라벌에 함께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그래도 구경거리가 있을까 내심 기대하였으나 웬 오래된 절로 데려오니 짜증이 치밀었다.
“이 흥륜사는 신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도량일세. 그대가 꼭 만나보았으면 하는 이가 이곳에 있네.”
“누구를 만나란 말인가? 절에 왔으면 중놈일 터인데 네놈 하나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일 없으니 나는 가련다.”
“잠깐 기다리게. 한 번만 만나보게. 어차피 곧 세상을 떠날 분이시네. 이번 한 번만 보면 돼. 부탁하네.”
도선이 간곡히 청하자 떠나려던 흑재는 멈춰 섰다. 도선의 의도는 뻔하였다. 또다시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결국 호기심이 동한 흑재는 짜증을 억누르고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값으로 그 조과라는 것을 더 받아 가겠다.”
“물론이지. 어서 가세. 기다리고 계실 걸세.”
일행은 흥륜사로 들어갔다.
절 안에는 어째서인지 승려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선은 무슨 영문인지 이미 아는 듯 개의치 않고 곧장 법당으로 향하였다. 승려들은 전부 그곳에 모여있었다. 설법이라도 듣는지 어느 나이 든 승려를 둘러싸고 앉아있던 그들은 도선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스님, 도선 대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오…… 어서 뫼시어라.”
노승이 쉰 목소리로 말하였다. 눈도 뜨지 못한 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도선은 방 안의 승려들과 모두 인사를 나눈 뒤 노승을 마주하고 앉았다. 도선의 일행이 앉을 공간을 만들어 주려 젊은 승려들이 마당으로 나와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선이 왔습니다, 범교 스님.”
“어서 오십시오, 대사님. 하마터면 못 뵙고 가는 줄 알았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는지요?”
“아닙니다. 때맞추어 잘 오셨습니다.”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범교는 안색이 매우 나빴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입적을 앞두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수는 빈도가 더 많은 데도 범교 스님께서 이렇게 먼저 떠나시다니요.”
“허허, 이 사바세계에서 더 살아봐야 번뇌와 고통만 더할 뿐이지요.”
“그러면 어째서 빈도를 이토록 간절히 기다리셨는지요?”
범교는 숨이 차는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심호흡하였다.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대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대덕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습니다.”
“여전히 미련이 남으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가르쳐 주십시오.”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잊어버리시지요.”
“하……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무거운 업장인데…….”
“업장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스님의 잘못이 아닌데 자꾸 그리 자책하시면 어찌 열반에 드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다 잊으십시오.”
승려들은 범교의 마지막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도선과 그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반면 흑재는 죽어가는 범교의 넋두리가 금세 지루해졌다. 도선이 범교를 통하여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사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승하하신 경문대왕을 옹립하였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헌안대왕의 첫째 따님과 혼인하시도록 권하였고, 그리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지요. 그분은 훌륭한 화랑이었기에 이 나라가 다시 옛 영광을 되찾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교는 또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이 등극하신 이래로 천재지변과 반란이 이어져 신라는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그분은 임금감이 아니었던 게지요. 그분의 아드님들도 그러하였고, 새로이 등극하신 그분의 따님께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아 이 신라의 몰락을 앞당겼습니다.”
잠자코 범교의 말을 듣고 있던 도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등극하신 이래 여러 차례 변란이 있었으나, 경문대왕께서는 매번 위기를 잘 헤쳐 나가시어 국정을 안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 임금의 재목이 아니셨다면 나라가 진작에 망하였겠지요. 스님께서는 절대 사람을 잘못 보시지 않았습니다.”
도선의 위로를 들은 범교의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사님.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이 나라가 앞으로, 허억…… 얼마나 가겠습니까? 신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범교는 숨을 가쁘게 쉬며 간절하게 물었다. 그러나 도선은 단호하였다.
“다 잊으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시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다 내려놓으시지요. 곧 아주 멀리 떠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대사님…….”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스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진작에 깨우친 진리가 아닙니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요.”
범교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들은 듯 눈을 감고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더 많은 눈물이 그의 눈에서 스며 나와 흘러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얽혀있던 무거운 사슬을 풀어낸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미련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도선 대사님을 통하여 듣고 싶었습니다.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더는……”
마음이 홀가분해진 범교는 깊은 잠에 빠져들 듯 서서히 눈을 감았다.
“모두 다 훌훌 털어버리고 편히 가십시오. 빈도가 배웅하겠습니다. 내세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윽고 범교는 마지막 숨을 내쉰 뒤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그 모습은 전혀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올곧고 평온하였다. 도선은 합장하며 범교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왕생극락하소서.”
경보와 승려들은 일제히 도선을 따라 기도하였다. 일부 젊은 승려들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하랑은 합장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들과 함께 범교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흑재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버리고 없었다.
범교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도선과 경보는 흥륜사에 더 머물렀다. 흥륜사는 소식을 듣고 찾아든 조문객들로 인하여 북새통이었다. 다른 절의 승려들은 물론 귀족과 왕족들까지 찾아왔다. 위홍도 직접 와서 애도를 표하였다. 위홍은 형과 더불어 화랑 시절을 함께 보냈던 범교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대사, 그간 별고 없으셨소?”
위홍은 도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예, 상대등. 오랜만에 뵙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려. 대사도 아시다시피 범교 대사는 우리 형제의 오랜 벗이었고, 형님을 왕위에 앉혀주신 분이 아니었소? 참으로 대덕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분이셨는데…….”
“상대등께서 이렇게 친히 오시어 배웅하여 주셨으니 편히 떠나셨을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고마운 말씀이오, 대사. 곧 있으면 새로이 등극하신 대왕 폐하께서 백고좌를 주관하실 터이니 이번에는 꼭 참석해 주시구려.”
“그리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이곳 흥륜사에 머물 터이니 그동안 빈도가 도울 일이 있거든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고맙소, 대사. 그때 봅시다.”
위홍은 궁으로 돌아갔다. 도선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한숨을 내쉬었다.
“큰스님, 왜 그러십니까?”
경보의 물음에 도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어리석은 자가 안타까워서 그런다. 제 앞길에 무엇이 닥쳐올지도 모르고 있구나. 저자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
“저자의 죽음과 함께 본격적으로 격동의 세월이 시작되리라. 나는 물론이고 너도 그에 대비해야 하느니라.”
경보는 서슴없는 도선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혹시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져 주위를 살폈다.
“큰스님,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일행들이 보이질 않는구나.”
도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흑재와 하랑에게 관심을 돌렸다.
“사람들 눈을 피하려 하신 모양입니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터이니 내가 찾아보마. 할 얘기도 있으니.”
도선은 북적이는 조문 행렬을 뚫고 흑재를 찾아 나섰다.
흥륜사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흑재는 인근의 형산강에 있었다. 그는 강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먼. 조금만 참게. 오늘 장례를 마무리하면 내일부터는 잠잠해질 걸세.”
그러자 흑재는 도선을 노려보았다.
“나는 네놈의 꿍꿍이를 다 안다. 그 죽은 놈을 보여주면서 또 나를 가르치려 들었지? 더러운 놈.”
흑재의 위협적인 말투에도 도선은 태연하였다.
“그분을 보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가?”
“어서 죽지를 않으니 따분해서 내가 먼저 죽는 줄만 알았다.”
흑재의 불평에 도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미안하게 되었네. 그러나 빈도가 그대에게 범교 스님을 보여준 까닭은 그분을 보고서 그대 자신을 돌아보길 바랐기 때문이네. 그분은 한평생을 후회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셨네. 마지막 순간에야 빈도가 도와드려 열반에 드실 수 있었지. 빈도는 지금 그대의 처지가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보네. 부디 스스로 만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게.”
흑재는 화가 치밀었으나 애써 감추었다.
“후회? 미련? 웃기는구나.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네놈이 빼앗아 간 내 땅에 더는 마음이 없다고. 나는 이미 더 맑은 물을 찾아내서 잘살고 있다.”
“빈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흑재는 그 말을 되받아치지 못하였다. 도선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느꼈던 탓이었다. 그의 두 눈이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으나 겨우 인간 따위에게 기가 눌렸다고 생각하니 흑재는 자존심이 상하였다.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돌아가지. 차를 마시고 싶군.”
흑재는 겉으로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며 흥륜사로 돌아갔다. 도선은 진심으로 그가 안타까웠다. 흑재의 눈을 찌르고 백계산에서 쫓아낸 것은 그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에게는 단 한 순간도 노여움이나 악감정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도선은 흑재의 마음 깊은 곳에 박힌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그의 사연도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내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용어 해석>
오구산현 : 신라 때 양주 밀성군(현 밀양시)에 속한 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 ‘오악현’이라고도 함.
지척 : 아주 가까운 거리.
입적 : 승려가 죽음.
세수 : 속세의 나이. 승려가 출가한 이후로는 ‘법랍’이라고 함.
사바세계 :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가 사는 세계.
내세 :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살게 되는 미래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