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하는 자들

by 어둠의 극락

여름의 뜨거운 횡포가 물러가고 가을이 돌아올 무렵, 황룡사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백고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명망 있는 승려들이 초청받았고, 중앙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관리들과 외국 상인들까지 많은 공물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용건과 그를 따라온 어린 왕건도 있었다. 새로 즉위한 왕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였던 만큼 화려한 제단과 연등, 의장이 준비되었다. 황룡사 내 뜰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밖에도 사방에서 모여든 구경꾼들로 인하여 일대가 혼란스러웠다.

초청받은 승려들이 모두 황룡사에 도착하고 나서도 도선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흥륜사를 떠나지 않고 글을 쓰고 있었다. 흥륜사의 승려들까지 대부분 백고좌를 구경하러 나선 상태였다. 흑재와 하랑도 아침 일찍 서라벌 거리를 구경하러 나가고 없었다.

“큰스님, 지금쯤이면 법회 준비가 다 끝났을 것입니다. 이제는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보의 우려 섞인 물음에도 도선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백고좌에 참석할 생각이 없는 듯 글만 계속 써 내려갔다. 경보는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힘 조절을 잘못하여 갈던 먹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도선은 붓끝에만 신경을 집중하였다. 이윽고 몇 자를 더 적은 그는 붓을 내려놓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 경보는 서둘러 부러진 먹과 먹물을 수습하였다.

“백고좌라……. 다 부질없는 짓이거늘. 화려한 제단을 차려서 기도를 올리고, 중들을 불러 모아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고여서 썩은 물이 다시 맑아질 리가 있는가?”

“큰스님, 그래도……”

“그래, 상대등이 직접 와서 부탁한 일이니 가기는 가야겠지. 채비하거라.”

“예, 큰스님. 서두르시지요.”

도선과 경보가 막 흥륜사를 나서려던 찰나, 왕의 내관이 군사들과 함께 흥륜사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내관은 도선을 보자마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선 대사님이신지요?”

“그렇네만.”

“대사님을 황룡사로 모셔 오라는 영을 받들어 왔습니다. 곧 백고좌가 시작될 예정이니 어서 가시지요. 소인들이 모시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네. 가지.”

“예, 대사님. 가자!”

도선과 경보는 앞서 나아갔고 내관과 군사들이 뒤따랐다. 도선은 문득 그들 중 하나에 눈길이 갔다. 나이는 어려 보였으나 유독 덩치가 크고 외모도 범상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눈빛이 밝고 강렬하여 눈에서 불이 나는 듯하였다.

“이름이 무엇인가?”

생각지도 못한 도선의 관심에 병사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소인 말씀입니까?”

“그래, 자네.”

“소인은 견훤이라 합니다만…….”

“견훤? 견훤이라고?”

견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도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키지 않는 자리에 불려 가느라 못마땅하던 차에 반가운 인물을 만나게 되자 위안이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견훤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황룡사에서는 이미 백고좌가 시작되어 진행 중이었다. 오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만이 제단 앞에서 직접 인왕경을 외우며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데다 다소 긴장한 나머지 발음을 잘못하거나 버벅거리는 등 실수가 잦았다. 위홍이 곁에서 자상하게 도와주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느덧 초청한 고승으로부터 설법을 들을 차례가 되자 왕과 위홍은 금당 밖에 마련된 자리로 나와 앉았다. 왕은 금당에 모인 승려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숙부, 도선 대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 여봐라, 도선 대사는 지금 어디 있느냐?”

위홍의 호통에 내관이 황급히 답하였다.

“흥륜사로 사람을 보내었으니 곧 오실 것입니다.”

“쯧쯧쯧, 지난번에 분명 참석해 달라고 내 직접 찾아가 청하였거늘 어찌 늑장을 부린단 말인가? 기왕이면 그런 대단한 고승의 법문으로 이 중요한 법회를 시작해야지.”

“이제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한 모양이지요. 너무 괘념치 마셔요, 숙부.”

“뭐,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위홍은 왕의 말에 애써 웃었다.

황룡사에 거의 다 오자 군사들이 구경꾼들을 밀어내며 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도선을 보고 너도나도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도선은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내관의 물음에 도선은 복잡한 인파를 가리켰다. 구경꾼들 사이에 하랑이 있었다.

“저기 빈도의 일행이 있네. 함께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게. 지리산에서부터 함께 온 길동무라네.”

“아, 예. 물론이지요. 함께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내관이 지시하자 군사들이 하랑이 들어올 수 있도록 틈을 내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이리저리 치이던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중문으로 들어섰다.

“그이는 어디 있는가?”

“모르네. 아침에 절에서 나오면서 갈라졌어.”

“저런, 역시 법회는 무리였나?”

도선은 흑재의 불참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한편 내관은 서둘러 왕에게 달려가 도선이 도착하였음을 알렸다.

“폐하, 도선 대사께서 당도하시었사옵니다.”

“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도선이 구층 목탑을 지나 금당 안으로 들어서자, 조정 신료들과 다른 승려들은 물론 뜰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를 향하여 합장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선은 석장을 경보에게 맡기고 금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랑과 경보는 금당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법상이 잘 보이는 자리에 섰다.

“이제 도선 대사에게 법문을 청하여라.”

“예, 폐하.”

내관이 도선에게 다가가 왕의 요청을 전달하자 도선은 법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그는 법상과 함께 준비되어 있던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그는 설법을 시작하려다 기대에 찬 왕과 위홍의 얼굴을 보았다. 나라의 운명이 다 해가고 있는데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나들이라도 나온 듯 싱글벙글한 그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입을 열지 않는가? 왜 저러는 게야?”

도선의 침묵에 위홍은 당황하여 왕의 눈치를 살폈다.

“숙부, 대사가 왜 설법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아, 대사가 잠시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나 봅니다. 곧 시작하겠지요, 허허.”

위홍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왕을 달래었다. 이윽고 도선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침묵을 깨었다.

“대왕 폐하께서 이 나라의 여러 비구들 가운데 미거한 소승에게 가장 먼저 입을 열 영광을 주시니 그 은혜가 하늘과 같사옵니다.”

아부하는 도선의 말에 위홍은 흡족해졌다. 마침내 유명한 고승의 설법을 듣게 된 왕은 기대감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백 명의 고승을 청하여 법문을 듣는 오늘의 이 법회는 본래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올시다. 백고좌는 새 임금께서 등극하실 때마다 의례 개최하던 의식이나 오늘만큼 간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음?”

심상치 않은 말에 위홍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작금의 나라 사정이 어떠합니까?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지고 있고, 왕실이 사치를 부리고 지방의 관리들이 점차 조정의 영을 받들지 않는 탓에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지에서 백성들이 굶어 죽거나 도적이 되어 수많은 살생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왕 폐하와 진골들께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이 절간에서 태평하게 늙은 중이 떠드는 소리나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뭐라?”

도선의 일침에 위홍은 숨이 턱 막힐 만큼 경악하였다. 왕은 아직 도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참된 마음과 의지가 담겨있지 않은데 백 일 동안 경을 외우고 법문을 듣는 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두 귀가 열려있는데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저, 저, 저 늙은이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야?”

위홍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역정을 내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당황하여 웅성거렸다. 경보는 몹시 놀라 불안하게 주변의 눈치를 살폈고, 하랑은 침착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올시다. 모든 것은 결국 끝을 맺게 되어있으니 다가오는 세월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그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폐하, 그리고 상대등과 이 나라의 진골들이시여. 이 자리에 함께한 나의 도반들이여! 모두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소서. 그리고 하늘의 뜻을 살피소서. 그리하지 않는다면 신라의 빛은 사라지고 두 번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게 되리오!”

“닥치지 못할까!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어서 저자를 법상에서 끌어내려라! 다른 스님을 모셔라!”

“수, 숙부, 저게 다 무슨 말입니까? 도선 대사가 왜 저러는 것입니까?”

“폐하,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도선 대사가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모양이옵니다. 무엇 하느냐? 어서 저자를 끌어내고 다른 스님을 모시라니까!”

위홍이 다시 명령하였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하오나, 저런 고승을 어떻게……”

“누가 고승이란 말이더냐! 노망난 늙은이에 불과하다! 당장 끌어내라니까!”

“예, 예…….”

내관들이 마지못해 법상으로 달려오자 도선이 주장자를 내리쳤다. 내관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더 다가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도선은 위홍의 고함에 잠시 중단한 말을 이어 나갔다.

“상대등은 새겨들으시오! 그대의 명운도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지옥에 떨어지고 싶지 않거든 더는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나라를 망치는 짓을 그만두시오!”

“그 입 닥치라니까! 아니 되겠구나. 저 미친 중을 당장 옥에 가두어라! 끌어내어 옥에 처넣으란 말이다!”

“예!”

위홍이 노발대발하며 지시하자 시위들이 금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승려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기는 하였으나, 금당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터라 시위들이 빠르게 진입할 수가 없었다.

“큰스님! 큰스님!”

경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선을 불렀다. 그러나 도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법상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경보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조정의 실세인 위홍의 노여움을 산 이상 도선을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왕에게 엎드려서 대신 용서를 빌기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경보가 왕에게 가려고 하자 하랑이 그를 붙잡았다. 하랑의 두 눈이 노란 고양이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막아내고 도선을 구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군사들이 법상 코앞까지 접근한 순간, 제단에 켜둔 초와 향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금당 안이 어둠에 잠기자 곧이어 바깥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사람들 모두 혼비백산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냐? 어째서 갑자기 하늘이……”

“숙부, 하늘이 이상합니다!”

왕과 위홍은 놀라서 서로를 붙들었다. 황룡사 안팎으로 모여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늘을 가리키며 두려움에 빠졌다. 이윽고 세찬 바람이 불어 절에 설치된 장식들과 오색 천이 찢어질 듯 흩날렸고, 건물의 기와가 떨어져 내려 박살이 났다. 태풍처럼 거센 바람에 사람들은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 이리저리 넘어지며 굴렀고, 금당 안쪽까지 바람이 불어 들어와 제단을 휘저어 놓았다.

“탑이 흔들린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구층탑을 올려다보니 정말 탑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뜰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도망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빠져나가려고 서로 밀치는 바람에 넘어지고 깔렸다.

“폐하, 어서 피하시지요! 폐하를 뫼시어라!”

왕과 위홍은 서둘러 대피하였다. 급기야 번개와 천둥까지 쳤다. 왕과 위홍이 자리를 뜨는 순간, 그들이 앉아있던 자리에 벼락이 내리쳐 의자를 부수었다. 왕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위홍은 그를 감싸며 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도선은 차분하게 법상에서 내려와 금당 밖으로 나왔다. 경보는 돌풍을 간신히 버티며 그에게 다가갔다.

“큰스님, 탑이 무너지겠습니다! 어서 피하시지요!”

도선은 말없이 출구로 향하였다. 경보는 서둘러 그를 뒤따랐으나 하랑은 제자리에 서서 계속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가 두렵다기보다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법력이 높아도 도선에게 구름과 바람을 조종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가 아는 이들 중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문득 구층탑으로 시선을 옮긴 하랑은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흔들리는 탑 위에서 흑재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랑은 처음 그와 마주쳤을 때처럼 섬뜩하고 소름이 끼쳤다. 약 올리듯 웃는 그의 미소가 불쾌함을 넘어 역겨울 지경이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뺨을 할퀴고 몸이 휘청거리는데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사람들이 황룡사에서 다 도망쳤을 즈음,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번개가 구층탑에 내리치더니 흑재가 사라졌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먹구름도 걷혀서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하랑은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황룡사에 한순간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아서 도선과 경보를 쫓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지럽혀진 제단 위에는 술과 음식이 다 뒤엎어져 널브러져 있었으나 그 중 과자와 떡은 사라지고 없었다.

흥륜사로 돌아온 도선은 곧바로 바랑을 꾸렸다. 경보는 황룡사에서의 일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아 넋이 빠져있었다. 지금까지 꿈을 꾸다가 이제야 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경보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자 도선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리 넋을 빼고 있느냐? 어서 떠날 채비를 하여라.”

“예, 예, 큰스님.”

경보는 흠칫하며 소지품을 챙겨 쓸어 담듯이 바랑에 집어넣었다. 금세 바랑을 다 챙긴 그는 머뭇거리다가 도선에게 물었다.

“저, 큰스님. 아까 황룡사에서의 그 이변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인은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본 그대로이다. 이변이었지.”

“혹, 큰스님께서 도술을 부리셨습니까?”

그러자 도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도술이라니, 이 녀석아. 나에게 그런 신통력이 있었으면 내가 직접 세상을 바꾸었겠지.”

“허면……”

“나를 그토록 미워하면서도 곤경에서 구해주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두려움과 경각심까지 심어줄 줄은 몰랐구나.”

“흑재님 말씀입니까?”

“그래. 이제는 그만 평온을 얻어야 할 터인데…….”

하랑은 도선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흑재는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그의 존재가 앞으로 세상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흑재의 엄청난 힘을 느껴보았기에 그를 동정하는 도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 참, 내 정신 좀 보게. 그대에게 머루주를 대접하기로 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구먼. 미안하네.”

도선은 하랑과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약속이 떠올랐다.

“되었네. 다음에 보지.”

한없이 태평한 도선에 짜증이 치민 하랑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선은 멋쩍게 웃으며 바랑을 메고 방을 나섰다.

“아! 아직 계셨군요. 하마터면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한 젊은 승려가 도선을 보고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한쪽 눈이 없었다.

“도선 대사님, 인사 올립니다. 소승은 선종이라고 합니다. 대사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선종이라……. 어디서 왔는가?”

“세달사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만행 중입니다.”

“그렇구먼. 속명은 무엇이고?”

“예? 속명은 궁예라고 합니다만, 어찌 물으시는지요?”

“무슨 일로 나를 찾는가?”

“실은 오늘 황룡사에 소승도 있었습니다. 법회를 구경하러 갔다가 대사님의 뼈 있는 말씀을 다 들었고,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그 광경도 모두 보았습니다. 너무도 두려웠으나 대사님의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도선은 궁예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갓을 머리에 쓰며 길을 떠났다. 당황한 궁예는 다급하게 그를 뒤쫓아갔다.

“대사님, 이 땅의 중생들이 너무도 가엾습니다. 소승이 직접 나서서 썩어빠진 신라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궁예야. 오래 살고 싶거든 쓸데없는 욕심을 그 이름과 함께 버리거라.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다. 경보야, 가자.”

궁예의 간곡한 청에도 도선은 눈길도 주지 않고 냉정하게 그를 지나쳐 갔다.

“대사님!”

궁예는 허탈하게 도선을 불렀으나 도선은 돌아보지 않았다.

은신처로 돌아온 흑재는 황룡사의 제단에서 빼돌린 과자와 떡을 꺼내어 펼쳤다. 검은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차를 준비하러 몰려갔다.

“다들 어디에 있느냐?”

흑재의 부름에 송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지태는 담철을 데리고 이 땅 곳곳을 둘러보러 떠났습니다.”

“담철이가 함께 갔느냐?”

“예.”

“그 녀석들 많이 가까워졌구나. 그나저나 서라벌에서 쓸 만한 인간 하나를 찾았다. 이름이 궁예라고 하였는데, 불쌍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고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중놈이었지. 그놈도 나처럼 눈 하나를 잃었더구나.”

“그 궁예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두고 볼 만한 놈이기는 하더구나. 아지태가 돌아오면 그동안 찾아낸 다른 놈들과 함께 살펴보아야겠다. 참으로 기다려지는구나. 어서 돌아와야 할 터인데.”

“발이 빠르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앉아라. 이거나 들자꾸나.”

“예, 어르신.”

흑재는 과자를 집어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하였다.

“다시 먹어도 참 맛이 좋아. 이 맛있는 것을 아무나 마음껏 먹지도 못하다니 불쌍한 것들, 쯧쯧.”

때맞춰 검은 아이들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흑재는 씹던 과자를 입에 머금은 채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와 섞이는 과자의 맛을 만끽하였다.

“도선은 아직도 굳건하더구나. 나이를 먹었는데도 힘이 조금도 줄지 않았어. 오히려 더 세졌더구나. 게다가 내 속을 다 들여다보기까지 하였지.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흑재는 치가 떨렸으나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와주셨습니까? 그대로 인간들 손에 끌려가게 내버려 두셨다면 쉽게 끝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놈이 죽을 때까지 마음을 놓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죽어서도 덜 걸리적거릴 테니까. 송악에서도 보지 않았느냐? 그놈은 하나뿐인 몸뚱이로 나서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얼마든지 손아귀를 뻗칠 수 있는 놈이다.”

송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용어 해석>

미거 : 철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

도반 : 함께 수행하는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