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왕이 등극한 뒤로 조정이 점차 힘을 잃어가자, 명주의 순식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서라벌과 담을 쌓고 지내게 되었다. 순식은 왕이 전국의 민심을 달래려 조세를 감면해 주자 그를 기회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조세를 아예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은밀히 더 많은 말과 군사를 모집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해온 대로 순찰과 검문을 철저히 하고, 일대의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지역민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신경을 썼다. 그 덕에 명주 지역의 사람들은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순식을 더욱 신뢰하며 충성을 바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은 관아에서 정신없이 바빴다. 군사와 군마의 수가 늘어 군대를 재편성하고, 서라벌에 조세로 보내던 곡식의 새로운 용도를 찾는 등의 할 일이 많아졌다. 밤이 되어서야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유봉, 오늘 참으로 수고 많았네. 그만 물러가서 쉬게.”
“예, 주공. 편히 쉬십시오.”
늦게까지 남아 순식의 일을 돕던 가신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다 뭔가가 떠올라 문 앞에서 돌아섰다.
“한데 주공, 스님께서는 무탈하신지요?”
유봉의 물음에 순식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종종 연통을 보내시기는 하네만, 여전히 그날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시는 듯하네. 사람들 말로는 좀처럼 암자를 벗어나시지 않는다더군.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상심이 크셨던 모양일세.”
“그 여인이 결국 시신으로 발견되고, 갓난아이도 찾지 못하였으니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다 이겨내실 터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이만 주무십시오.”
유봉이 나간 뒤 순식은 등불을 끄고 일어섰다. 그도 여러모로 안타까웠던 일이었다. 그때 곁에 사람 하나라도 붙여두었다면 그렇게 겁에 질려 달아나다가 비참하게 죽는 일은 막을 수도 있었다. 걸음마도 못 떼어보고 세상을 떠난 아기도 너무 가여웠다. 무엇보다 아버지 허월이 그 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이 들었다. 시간이 약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허월은 오대산에 혼자 머물 작은 암자를 지어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장소는 달랐으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송악에서 수행하던 때와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다. 암자를 청소하고, 땔감을 구하고, 경을 외우고 참선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순식이 수시로 보내주는 식량으로 매일 혼자 먹을 식사를 직접 준비하는 것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허월은 여전히 자신이 베푼 인정이 독이 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뽑혀 나간 여인의 기괴한 시신이 뇌리에 박혀 자꾸만 떠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아기의 해맑던 얼굴도 그의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해마다 여인과 아이의 기일을 챙기고 명복을 빌어주기라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는 늘 걱정하던 아들의 미래와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할 듯하여 마음이 괴로웠다.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져 갔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로 인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허월은 결국 목탁을 내던지고 암자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깊게 내쉬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답답함이 한결 가셨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좁은 암자에만 처박혀 있느니 차라리 만행을 떠나 하염없이 걷는 편이 나을 듯하였다. 정처 없이 그저 길 따라 떠돌거나 아예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문득 한동안 산속에만 있느라 잊고 있던 바다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바닷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허월은 그 마음을 따라 석장을 들었다.
산에서 내려온 허월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거닐었다. 산속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비릿한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로 들어오자, 굳어 있던 허월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맡는 냄새라 반갑고 상쾌하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을 감싸는 듯한 모래의 부드러운 느낌도 좋았다. 허월은 산에서 내려오길 잘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니 잡념이 사라지고 눈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해안가를 따라 한참을 걷던 허월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 위에 올라섰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연신 몰아치고 있었다. 허월은 아주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잠시나마 아찔하였던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더욱 시원하였다.
절벽 끝에서 상쾌한 바다 풍경과 바람을 한껏 즐긴 허월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 와 있었는지 작은 어린아이가 해초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알몸으로 흠뻑 젖은 채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아이도 놀랐는지 허월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얘, 얘야, 물놀이를 하고 있었느냐?”
허월이 어렵사리 먼저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혼자 왔느냐? 부모는 어디 있고?”
그래도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허월을 이리저리 훑어볼 뿐이었다. 허월은 아이가 말을 못 알아듣는지 아니면 원래 말을 못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슬슬 답답해졌다. 허월은 아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갔고,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어어, 괜찮다. 해치지 않는다. 옷은 어디에 두었느냐? 춥지 않으냐?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왔는고?”
허월은 아이를 달래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젖은 몸으로 물 밖에 나와 있는 아이가 걱정된 그는 천천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는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허월을 지나쳐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얘, 얘야! 잠깐만! 어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아이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허월은 서둘러 절벽 끄트머리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아이는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허월은 허둥지둥 절벽 아래로 향하는 길로 달려갔다.
절벽 아래로 내려온 허월은 암초를 딛으며 바다로 다가갔다. 물에 젖은 암초가 미끄러워 다급한 마음과 달리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그리 거세지는 않았으나 뛰어내렸다가는 다칠 위험이 큰 곳이었기에 허월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미 몇 번이나 미끄러져 두 발이 모두 젖어 있었다.
해가 지도록 한참을 더 찾아보았으나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허월은 어쩌면 자신이 헛것을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시뿐이었다.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스쳐 지나갈 때 물이 튀었고, 바닷물의 비린내를 분명히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실체가 있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얼핏 전설로 전해 듣던 장자마리 같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인 걱정과 불안으로 머리가 터질 듯하였으나 허월은 하는 수 없이 돌아서야만 하였다.
숨어서 허월이 육지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아이는 물 밖으로 나와 해초를 뒤집어쓴 채 암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이는 처음 마주친 낯선 이가 두려웠으나 막상 그가 떠나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흥미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박박 깎은 그의 머리가 우스꽝스러웠다. 아쉬움이 컸으나 뒤쫓아가 볼 용기는 없었던 아이는 암초에 기대어 허월이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았다.
“여기 있었구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을소였다.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해초를 내던지고 암초 위로 기어 올라갔다.
“오늘은 그만 놀고 돌아가자.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을소는 웃으며 아이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내일 또 놀면 되잖아. 저 위에 올라갔던 것은 비밀로 해줄게. 응?”
버티던 아이는 을소의 다정한 말에 마지못해 물속으로 들어왔다.
골짜기로 내려온 을소는 아이를 집까지 배웅해 주었다. 아이는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을소의 팔에 매달렸다. 을소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들어가. 해는 내일 또 뜰 거야. 배고프지 않니? 어서.”
굴 입구에서 뭉그적거리던 아이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갔다. 을소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아이의 집 안에는 세리가 누워있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아이가 들어와도 미동도 없었다. 일찍 들어온 척하고 싶었던 아이는 살금살금 다가가 세리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와아아!”
“꺄히히히!”
갑자기 세리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깜짝 놀라며 웃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세리는 아이를 놀래려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또 속았지?”
“너무해, 히히.”
세리는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오늘은 땅 위에 안 올라갔지?”
“응. 모래 위에서만 잠깐 놀았어.”
“참말이지? 을소에게 물어볼 거야.”
“그래. 나 배고파.”
세리는 비늘과 지느러미를 떼어 손질한 물고기를 주었고, 아이는 게 눈 감추듯 그것을 먹어 치웠다. 세리는 아이가 깨끗이 발라먹은 뼈를 버리지 않고 한쪽에 지느러미와 함께 쌓아두었다.
“엄마, 그것들은 왜 모으는 거야?”
“응, 칼날턱들은 비늘이 워낙 단단해서 칼날턱의 이빨과 뼈로만 잡을 수 있어. 지느러미도 아주 단단해서 여기저기 쓸모가 많단다.”
“아하, 그래서 사냥 막대 끝에 박아 넣은 거구나.”
“그래, 맞아.”
배도 채우고 궁금증도 해결한 아이는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세리는 하품하는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누웠다.
“오늘도 이야기 또 들려줄까?”
“응.”
세리는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흠흠, 날마다 힘차게 헤엄치는 작은 고래가 있었어. 작은 고래는 해를 좋아해서 가까이 가보고 싶었어. 그런데 해는 너무 높이 떠 있어서 아무리 뛰어올라도 닿지를 않았어. 그래서 고래는……”
아이는 눈을 감고 세리가 들려주는 자장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청하였다. 아이는 내일도 세리가 모르게 또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두 발로 거칠고 단단한 땅을 거니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 마주쳤던 까까머리 인간도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용어 해석>
장자마리 : 강릉 지역에서 전승되는 풍요 · 풍어를 상징하는 도깨비. 해초와 곡식이 몸에 뒤엉킨 형상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