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통째로 문화유산인 곳
브뤼헤, 브르주, 브루게. 도시 이름을 뭘로 불러야 하나 고민스러운 곳이 있다. 난 벨기에 브뤼헤로 부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선 공식적으로 브루게라고 하나 보다. 글을 쓰는데 자꾸 수정하라고 뜬다. 어쨌든 벨기에란 나라, 프랑스어도 쓰고 네덜란드어도 쓰는데 영어까지 섞이며 이런 현상이 생긴 듯하다.
여행 전에 브뤼헤를 소개하는 사진을 봤는데 어딜 찍어도 꼭 동화 속 한 장면 같이 찍혀있었다. '북구의 베네치아'란 수식어가 괜히 따라붙은 게 아닌가 보다. 기차역에 내려서 초록빛 나무 사이로 구도심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만난 오리들이 유영하는 푸른빛 호수가 브뤼헤의 첫인상이었다. 구 도심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마음을 빼앗기는 곳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브뤼헤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어느 정도라서 통째로 문화유산이 됐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종탑을 주목해보기라 권하고싶다. 중심부인 마르크트 광장 한편에 있고 가장 높은 곳이라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13세기 브뤼헤가 가장 번성했을 때 만들어진 팔각형,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탑이다. 366 계단을 올라가면 브뤼헤의 도시 전망도 감상할 수 있다. 기다리는 줄만 길지 않다면 올라가 보시라 권한다. 여기부터 찾아보길 권한 이유는 종탑의 ‘높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은 성당이다. 모든 삶의 중심이 종교다. 그런데 구약성서엔 높은 바벨탑을 짓다 무너진 이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당연히 건축의 높이 규제가 있었던 시대다. 그런데 브뤼헤는 보란 듯이 성당보다 더 높게 종탑을 지어 올린 것이다.
종탑의 본질은 브뤼헤 상인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 보면 맞다. 당시 브뤼헤가 파는 가장 중요한 특산품은 모직물이었다. 운하를 통해서 이 모직이 팔려 나갔고 스칸디나비아 생선이나 아라비아 향신료, 러시아 모피가 브뤼헤로 밀려들었다가 판매처를 향해 떠나곤 했다. 종탑은 모직물 길드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번성하던 시대, 브뤼헤 사람들의 자신감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광장 맞은편에서 식당이나 카페로 쓰이는 건물은 ‘길드 하우스’들이다. 그렇게 중세가 조금씩 변해가는 어느 지점에서 번성하던 브뤼헤가 존재한 것이다.
브뤼헤 사람들의 자신감은 ‘얀 반 에이크’ 광장에서도 발견된다. 유명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이곳 출신이다. 여기건 거리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스페인 거리, 영국 거리, 동양의 거리, 바스크의 거리라고 쓰인 표지판을 보게 될 것이다. 스케일 한 번 대단하지 않은가? 한 때는 이곳이 코즈모폴리턴 한 도시였다는 증거다.
브뤼헤에 무역 선단을 파견한 도시만 해도 당시, 한자동맹의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 러시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다양했다. 브뤼헤는 남유럽과 북유럽의 중간 해상 무역도시와도 같은 곳이었다. 17개 나라 정도가 무역사무소와 은행을 이 도시에 만들었다. 주식이나 신용제도, 환어음 같은 것들이 이 도시에서 출발했다. 국제 무역 시장이 발달하다보니 금융업이 동시에 커나간 것이다. 세계 최초로 주식거래를 발명한 반 부에스 Van Buerse의 집 역시 브뤼헤에 있다. 증권거래소를 의미하는 Bourse란 말이 이 사람한테서 출발한다.
브뤼헤, 번성의 증거를 예술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브뤼헤의 보물, 미켈란젤로의 ‘성 모자상’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해외 반출이 된 작품이다. 이런 상황은 브뤼헤와 이탈리아의 교역을 상징한다. 또 브뤼헤의 상인 중에서 이 정도의 미술품을 살 재력을 갖춘 이가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화 <모뉴먼트 맨>을 보면 성 모자상이 등장한다.
브뤼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인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역시 흥미롭게 볼만한 작품이다.
볼록 거울 속에 화가가 등장한다거나 서명을 남겼다는 얘기처럼 그림에 얽힌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 얘기니 생략한다. 내가 주목한 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르놀피니 이 사람이 이탈리아 사람이란 점이다. 이 시기 브뤼헤에 온 이탈리아 사람들은 돈 많은 상인이나 은행가였다. 브뤼헤는 당시 플랑드르의 이탈리아 금융 지점으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조반니 아르놀피니는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가 두 번째 결혼이든 부부의 초상화 의뢰 목적이든 브뤼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얀 반 에이크에게 그림을 의뢰한 것을 확인힐 수 있다.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은 그가 속한 시대가 아직 르네상스 시대가 아닌데도 중세와는 뭔가 다른 화풍이다. 특히 세밀한 묘사나 당시로선 아직 낯설었던 유화란 점에서 플랑드르 회화를 통해 새 시대를 열고 있움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보면 무역이 이뤄지는 곳에선 예술이 만나고, 문화가 새롭게 만들어지곤 한다. 그 점에서 내게 브뤼헤란 도시는 중세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가 기지개를 켜는 정도의 이미지다.
브뤼헤의 침체는 15세기경부터 시작된다. 일단 인근 즈빈만에 진흙이 쌓이면서 브뤼헤에 큰 배가 다닐 수 없게 된 게 결정타였다. 작은 배로 버티긴 했지만 결국 무역의 중심은 근처의 담이나 안트베르펜 등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항로의 개척 이후 지중해보다 대서양이 물류의 중심이 된 것도 쇠락에 영향을 미쳤다. 또 신구교 갈등으로 상징되는 오랜 갈등도 브뤼헤 몰락의 이유다. 이후 운하를 정비하면서 재기를 모색해보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 직물 산업 공업화에 더뎠던 것도 이 도시의 쇠락에 영향을 주었다.
브뤼헤를 산책하다 보면 초콜릿이나 와플도 많이 팔지만 레이스도 참 많이 판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레이스들인데 내게는 산업화 시대, 가난한 여성들이 만든 상품의 이미지로 겹쳐진다. 하지만 인근 폴란드나 영국의 저가 모직 산업에 대항해 시대에 역행하는 수공예 전략을 썼던 게 꼭 잘못이랄 순 없다. 그렇게 쇠락한 덕분에 중세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하나가 통째로 우리한테 선물로 주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