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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Aug 29. 2021

스위스. 어둠의 역사가 자랑으로

루체른에서 '스위스 용병'을 만나다

 년도  어느  독일에 살던 후배와 채팅을 하다 처음  도시 이름을 들었다. 루체른. 스위스의 어느  도시로만 알았는데 보내준 사진을 보니 가장 전형적인 스위스 마을 같았다. 예쁜 호수에 강이 흐르고 멀리 산이 보이는 그림 같은 풍광은 절로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중세 도시의 느낌물씬 풍겼다.

언젠가 방문해봐야겠다 마음먹었던 게 그즈음 같다. 그리고 기회만 별렀는데 생각보다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당연히 일정 중에 루체른을 넣었다. 베른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루체른 역에 내렸을 때, 기차 역사의 규모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사진으로 본 첫인상 때문에 시골의 간이역 정도를 상상했는데 훨씬 컸다. 루체른은 스위스의 현대적 도시였구나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루체른 호수 동쪽으론 리기산이 있고 서쪽엔 필라투스산이 있다. 남쪽으로 보이는 산 이름은 슈탄저호른이고 멀리 티틀리스까지 있었다. 그중 필라투스는 로마 빌라도의 망령이 깃든 산이란 전설도 있지만, 중요한 건 이 산들 모두가 알프스란 사실이다. 지금이야 산악 지형을 뚫고 기차가 다니고 도로가 깔려있지만, 과거 산악은 단절의 이름이었다. 그 시절, 알프스를 넘어가려면 모두들 루체른에서 머물며 기력을 회복해야 했다. 루체른은 그렇게 교통의 요지로 발전한 것이다. 지금도 기차는 루체른에서 스위스 전역으로 뻗어나간다. 취리히나 베른, 인터라켄, 몽트뢰로 동서남북 연결된다. 스위스를 찾으면서 루체른을 방문했다 생각했는데, 여긴 결국 빼고 갈 수 없는 도시였다.

루체른 호수

루체른은 작은 도시지만 성벽이나 건물에 그려진 벽화, 다리, 박물관과 미술관, 호수 등 오밀조밀 볼만한 게 참 많은 동네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무조건 멈추게 하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빙하 박물관 근처 빈사의 사자상 Löwendenkmal이다. 처음 이곳을 찾을 때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일단 거대한 암벽 위에 바로 조각을 했다는 점이 흥미로왔다. 자주 보다 보니 흔하디 흔하게 느껴지는 동상이 아니라 암벽 속의 부조란 점이 차라리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압도적인 크기에도 놀랐다. 청소하는 분이 같이 찍힌 사진을 보면 그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에 찔려 숨져가는 사자의 이미지, 그 알 수 없는 처연함 때문에 모두들 먹먹해지는 게 아닐까? 모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응시하게 만드는 힘은 그 먹먹함이다. 암벽 앞엔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 표면에 사자의 얼굴이 비치곤 한다. 기분 탓이었을까? 바람이라도 불며 만들어지는 일렁임 때문에 연못 위 사자의 얼굴은 더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찬찬히 살펴보며 알게 됐다. 이게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란 걸.

loewendenkmal-luzern.ch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를 지키다 숨졌던 스위스 용병들 얘기는 알려진 이야기다. 혁명군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튈르리 궁을 지켰던 이들은 스위스 용병들이었다. 싸우다 숨지고, 나중에 루이 16세와 함께 처형되기도 했다.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목숨을 바친 셈이다. 왜 그랬을까? 도망갈 기회가 없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목숨을 선택해 도망치면 누가 앞으로 우리 후손을 용병으로 쓰겠느냐는 물음. 거기에 죽음으로 답한 이들이 스위스 용병들이었다. 그렇게 숨진 이가 모두 786명. 참고로 스위스 용병들의 시신은 파리 마들렌 묘지 Madeleine cemetery에 묻혀있다. 빈사의 사자상엔 큰 라틴어 글씨로 "스위스 사람들의 신의와 용기'라 쓰여있다.


처음 이 기념물을 만들자고 제안 한 사람은 당시 루이 16세의 용병이었지만 휴가 중이라 목숨을 구했던 칼 파이퍼 Karl Pfyffer였다. 그가 시민들의 모금을 추진했다. 그리고 빈사의 사자상이 완성된 시기는 1821년이었다.


지금의 스위스야 관광만으로도 먹고사는 부자 나라지만 중세 시대엔 영토도 작고 국토의 60%가 산악지대라 먹고 살기 매우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기억 속 대제국들은 해양을 지배한 나라들이다. 로마부터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바닷길을 장악해야 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가난한 스위스인들은 생계를 위해 용병의 길을 택했다. 원래 스위스 병사들은 캉통 canton이라 불리는 주 단위의 군대에 속했다. 이 캉통 정부가 사실 용병업을 통해 배를 불린 셈이다. 하지만 병사들도 밭을 가는 소박한 삶보다 전장을 다니며 많은 보수를 받는 데 길들여지면서 자발적으로 용병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1400년에서 1800년 사이 용병으로 나간 사람은 15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고향으로 돌아온 비율은 30%에 불과했다고 한다. 때론 싸우는 두 집단에 동시 고용되는 바람에 동족상잔의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이 역시 비극이었다. 다만 이들이 스위스를 공격하진 않았다는 점은, 왜 강대국 사이에 자리한 스위스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을까 하는 의문에 답변의 실마리를 만들어준다.

생각해보면 스위스 비밀금고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그건 신뢰다. 나치 독일이나 3세계 독재자들의 검은돈을 관리해 비난받기도 하지만 스위스 금융업은 덕분에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 국제 자산의 25% 정도를 움직인다. 이렇게 신뢰라는 자산은 일상 속 스위스에서 매우 잘 작동한다. 그리고 이게 상식이 된 사회라서 편리하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시계만큼 정확한 게 대중교통 출발, 도착 시간이다. 루체른에서 열차를 몇 시에 내려서 호숫가로 걸어가 몇 분 지나면 출발하는 배를 탈 수 있겠구나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을 정도다. 신뢰라는 자산이 확장되면서 내 주변의 사람과 시스템을 믿을만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그게 스위스에서 느끼는 편안함의 첫 이유다. 용병이라는 어두운 과거의 유산을 스위스가 가장 자랑스럽게 기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루체른에서 누구나 걷게 되는 카펠교 Kapellbrücke도 양면성이 가득한 관광지 중 하나다. 로이스강 위에 놓인 204m 정도의 다리는 어느 각도에서 보는지에 따라 풍광이 달라진다. 다리가 일직선이 아니고 사선으로 만들어져 있는 데다 각도를 한 번 더 틀어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로 지붕이 있다는 점이 특이한 곳이다. 아름답다.

처음엔 34m 높이 팔각형 탑만 있었다. 다리가 생기건 1333년이니 거의 71년 후의 일이다. 강 한가운데 세워진 '물의 탑'의 용도는 감옥이었고 고문의 장소였다.  탑의 아래쪽을 자세히 보면 밖으로 난 창이 하나도 없다는 게 확인된다. 내부엔 높이 5.5m의 공간이 있다. 연결 통로는 위쪽으로 난 구멍 하나다.  계단은 당연히 없다. 애초 감옥으로 지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대략 18세기까지 그렇게 사용됐다. 그 후 문서저장고로 쓰이기도 했다. 중세 루체른에선 범죄자 처형의 방법 중, 손발을 묶어 로이스 강에 던지는 처형 방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는데도 죽지 않으면 악령 때문이라면서 화형에 처하곤 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던 공간이 지금 루체른의 상징으로,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가 된 것이라 보면 되겠다.

사진은 @Unsplash

나중에 탑에다 다리를 이어 붙인 이유도 군사용 목적이었다. 방어용 요새를 만들려고 한 건데 호수 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으려 했다. 자세히 보면 호수 쪽을 향한 다리 난간이 반대쪽보다 살짝 높다. 총 같은걸 올려놓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chapel-bridge.ch

카펠교는 천정에 그려진 삼각형 그림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참고로 몇 장만 설명드리면 가장 왼편의 것은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에 하늘로 이어진 사다리를 보았는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모습을 본 그 장면이다. 두 번째는 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와인이다' '왕이다'는 답에 이어 세 번째 사람이 '여인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값진 건 진실이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결혼을 원했던 신부들이 시험을 본 이야기다. 등불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기름과 같이 가져온 이들과 등만 가져온 이들이 나뉘었다. 등만 가져온 5명은 중간의 문을 넘지 못했다. 불합격이었다. 대략적이지만 중세 사람들의 생각의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chapel-bridge.ch

하나 아쉬운 건 흥미로운 삼각형 그림들 대부분이 이미 소실됐다는 점이다. 93년 버려진 담배꽁초에서 출발한 화재로 절반 이상의 다리가 불에 타버렸다. 그 후 복원이 이뤄졌지만 일부 삼각형 그림이 있던 곳은 빈 공간으로만 남아있다.  111개의 삼각형 그림 중 화재 피해를 본 그림이 총 86개였다.


루체른은 참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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