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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Sep 07. 2021

핑크빛 바다, 프랑스 에그모르트

신념 때문에 38년 갇혔던 여성

에그모르트 Aigues-Mortes는 프랑스 남부의 도시다. 고흐의 도시 아를과 몽펠리에 중간 정도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성곽도시를 나와 바다 쪽으로 가면 아름다운 핑크빛 바다와 염전, 소금 언덕을 볼 수 있다. 한국에 많이 알려진 유명한 여행지는 아니지만 프랑스 현지인들은 이곳 방문을 추천한다. 풍광이 일단 독특하고 색감이 예뻐서 사진을 찍으면 모두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바다색이 쪽빛이 아닐 수도 있구나 깨닫는 건 신선한 경험이다. 분홍 플랑크톤이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에그모르트는 7, 8차 십자군 원정이 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십자군 원정 때 루이 9세가 100척 정도의 배를 이곳에서 출발시켰다. 지금은 물길이 줄었지만 수로를 따라선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관광을 온 분들은 주로 성벽 위를 따라 걷거나 30m 높이의 콩스탕스 탑을 오르곤 한다.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면 평화로운 주변 경관이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 도시의 탑 아래쪽엔 창문 하나 제대로 없는 지하 공간, 감옥이 있다. 성지순례가 아니라면 감옥을 찾는 관광객은 적은 편인데 감옥에 갇혔던 한 여성을 기억하는 이는 더 적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38년을 감옥에 갇혔다. 19살에 감옥에 갇혀, 57세에 풀려난 마리 뒤랑 Marie Durand의 이야기다.

그녀가 갇힌 이유는 프랑스 위그노였기 때문이다. 위그노 Huguenot란 프랑스에서 16~18세기에 칼뱅 신학을 따르던 개신교도를 일컫는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신구교 갈등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1572년, 3만에서 7만 명의 위그노가 학살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이다. 가톨릭 공주와 위그노 왕자의 결혼식날 이뤄진 학살이라 충격은 더 컸다. 하지만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나중에 왕이 된 앙리 4세가 1598년에 낭트 칙령을 발표하면서 위그노에게도 조건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됐다. 그렇게 공존을 선택하고 30년 동안 지속된 위그노 전쟁이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1685년 손자 뻘인 태양왕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기한다는 퐁텐블로 칙령을 내렸다. 절대왕정을 위해 가톨릭 국가를 선언한 것이다. 사실 친정체제를 수립한 1661년부터 1685년까지 위그노의 자유를 조금씩 박탈하는 내용의 칙령만 300건을 내린 상황이었다. 탄압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개종을 강제하려고 신교들의 집에 용기병을 보내 고문과 약탈, 강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 일이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시대였다.


결국 많은 위그노들의 선택은 영국이나 독일, 스위스로의 망명이었다. 일부는 남아공으로 망명해 와인 제조 기술을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처 도피하지 못하거나 잔류를 선택한 이들은 남아서 신앙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루이 14세가 이미 국경을 봉쇄해 위그노의 망명을 막기도 했다. 핍박의 시간이었다. 나중에 루이 16세가 1787년 베르사유에서 내린 관용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선언될 때까지 102년을 위그노들은 '광야 시대'라고 부른다. 고난의 시기였다. 마리 뒤랑이 탑에 갇힌 것도 그때의 일이다.


탑은 주로 여성들의 감옥으로 쓰였다. 남성이나 위그노 목사들은 처형되거나 지중해의 갤리선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일을 했다. 노예선에 탄 이들은 몸에 GAL이라는 낙인을 받았다. 노예선 GALERIE 형을 받았다는 의미다. 1730년, 마리 뒤랑은 에그모르트의 콩스탕스 탑에 수감된다. 1711년 생이니 19살의 나이였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위그노였고 특히 오빠 피에르 뒤랑은 제네바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교 목사였다. 함께 예배를 봤다는 게 이 가족의 체포 이유였다.

1754년 마리 뒤랑이 쓴 걸 보면 탑에는 25명의 여성이 갇혀 있었다. 그중엔 시각장애인에다 80세로 고령이었던 베랑부터 신교 예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737년부터 수감 중이던 마리 레이도 있었다. 네빌리아르는 신교 목사와 결혼했다는 죄로 수감됐는데 국법을 어긴 거란다. 안타까운 사연은 이제 막 결혼하고 수감된 여성 중 출산을 한 경우였다. 메네란 이름의 여성인데 갓난아기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가톨릭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생이별이었다.


마리 뒤랑은 그 감옥 안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끌었다. 매일 저녁 성경을 읽고 함께 모여 기도했다. 환자가 발생하면 간호사 역할도 했다. 편지 중엔 감옥 안에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알리면서 약품 지원을 호소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1732년에 몽펠리에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한 오빠 피에르 뒤랑 목사의 설교를 기억해 전해주었다. 가장 어린 나이였지만 영적인 지도자였던 셈이다.

@museeprotestant.org

사실, 에그 모르트의 콩스탕스 탑에 수감된 여성들에겐 매일 한 번씩 똑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개종하겠느냐? 그렇다고 답을 하는 순간 자유였다. 하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날마다.


마리 뒤랑은 감옥 중심부의 물을 길어 올리는 구멍 주위 돌에 뜨개질바늘로  ‘저항하라’라고 썼다.  비인간적인 상황에, 폭력에 저항하라. 신앙의 자유를 말살하는 이들의 불관용에 저항하라. REGISTER. 물론 마리 뒤랑 그녀의 마음속에선 성경 구절도 떠올랐을 것이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전서 5장 9절이다. 대적하라 Register. 마리 뒤랑의 아버지와 오빠, 어머니도 이미 갇히거나 처형된 상태였으니, 이 구절이 어떤 울림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다만 그녀의 저항은 철저하게 평화 속에서 이뤄졌다. 증오 대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어떻게 풀려났을까? 이 이야기는 프랑스 성원용 목사의 책 <위그노처럼>에서 답을 찾았다. 샤를르 쥐스트 드 보보가 이 지역의 책임자였는데 1767년 이 여성들의 고통을 알게 된 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을 단행했다. 당시 종교 갈등의 현장에서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상식이 무엇인지 길을 찾아간 셈이다. 하지만 석방된 마리 뒤랑은 57세였다. 돌아간 집도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곳에서 8년 정도 더 살다 숨졌다. 네덜란드 교회에선 사연을 듣고 200 리브르의 연금을 보냈는데 주변 이웃과 나눴다는 게 마지막 기록이다.

에그모르트의 호텔

18세기에도 에그모르트의 바다는 지금처럼 아름다웠을 텐데, 종교 갈등의 현장에서 저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신념은 누군가엔 위험한 독이 되고 누군가에겐 고결한 위대함이 되는 듯하다.  차이는 뭘까? 신념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최악의 결과를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바로 홀로코스트다.  또는 기껏해야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신념은 어떻게 포장해도 추악한  하다. 하지만 자신의 희생이나 손해를 감내하며 켜가는 신념들엔  묵직한 감동이 있곤 한다. 마리 뒤랑이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visitezlesalindaiguesmor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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