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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Sep 12. 2021

두브로브니크, ‘30일 전염병 격리’가 시작된 곳

세상의 모든 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는 것, 자유

우린 세월이 흐르면 문명이 더 발전하고 야만으로부터 더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괴련 늘 그럴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이 도시의 첫인상은 아름다움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탈 때만 해도 정거장이 구시가 앞 '필레문'이려니 했다. 그런데 잘못 알았나 보다. 구시가 뒤편 언덕배기에 내려준 것이다. 투덜대면서 짐을 끌고 구시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아래로 분홍빛 저녁노을이 아드리아해와 파스텔톤의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바다 색까지 분홍빛이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구시가지로 들어가서 또 한 번 놀랐다. 길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었다. 원래 유럽의 중세도시 대부분은 길이 구불구불하다. 그런데 두브로브니크는 중심 대로부터가 일직선이다. 280m 정도의 플라차 대로는 곧게 뻗어서 구시가지 동서를 연결시킨다. 양 옆 골목길도 직선이다. 격자형 구조로 만든 도시다. 그렇다. 두브로브니크는 계획도시였던 것이다.


플라차 대로만 해도 원래는 바다였던 곳이다. 물자를 수송하던 해협이었는데 1272년에 여길 메꿔서 땅으로 만들었다. 바닥을 대리석으로 포장한 건 1468년의 일이다. 그 시절의 부를 짐작케 한다. 나중에 대지진을 겪으면서 건물들까지 통일성 있게 복구하면서 지금의 도시 외관이 탄생했다.

플라차 대로

도시 두브로브니크를 만든 건 8할이 바다다. 아드리아해를 누비며 무역으로 번성했고 그렇게 축적한 부로 도시를 만들었다. 13세기부터 14, 15세기가 전성기였던 라구사 공화국 얘기다. 그 시절 일종의 세관 역할을 한 스폰자궁에 쓰인 글귀는 매우 상징적이다. ‘우리 법은 저울을 속이는 것을 금한다. 상인들이 당신의 물건을 잴 때 당신의 양심도 저울에 단다는 걸 명심하라’.

광장 중심 기둥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올란도 동상도 용도가 하나 더 있다. 칼을 든 손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는 51.2센티미터로 당시의 표준 길이였다. 일종의 자 역할을 한 것이다. 라구사 공화국에선 중동 지역의 실크를 수입해 재가공해 팔기도 했는데 추정컨데 비단 길이를 잴 때 썼을 법 싶다.   


해상 무역도시 라구사에서 제일 눈여겨볼 곳을 묻는다면 나는 검역소를 꼽겠다. 동쪽 성문 부근에 검역소 건물이 길쭉하게 남아 있다. 놀랍게도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전염병 '검역' 조치를 제일 먼저 시행한 곳이 이 곳 라구사 공화국이다. 항해를 하고 돌아온 배나 상인들을 격리, 검역하는 건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당연한 조치다. 하지만 모든 당연해 보이는 것들엔 '최초'가 존재한다.

라구사 공화국이 검역 조치를 체계화한 건 1377년의 일이다. 바로 흑사병이 유럽을 덮친 시기다. 그때 도시 대평의회에선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법률 하나를 통과시켰다. 바로 30일 격리 조치다.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대응해 '30일 격리'라는 검역 대책을 만든 것이다. 무조건적인 외부 봉쇄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수무책 무대응도 아닌 30일 격리 후 문제 없으면 입항이란 판단, 이 시스템은 놀랍게도 잘 작동됐다. 그리고 베네치아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럽 최초의 '검역'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검역소를 라자레토 lazarettos라고 불렀는데 성서 속 한센병 환자의 성인 라자로 Lazarus에서 따온 이름이다. 참고로 이 격리 조치는 베네치아의 40일 격리 이후 40일로 일반화된다. 40일로 바뀐 건 40일 광야 생활 등 성경에서 기인한다.


검역소를 어디에 만들었나 봤더니 처음엔 두브로브니크 인근의 섬을 활용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서 차로 20분쯤 남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 Cavtat와 인근 섬인 Supetar, Mrkan,  Bobara에서 30일 격리조치를 시행했다. 여기다 오두막을 짓고 검역소로 썼다. 이런 오두막의 장점은 쓰고 난 후 태워버리기 쉬웠다는 점이다. 이렇게 여러 섬들을 검역소로 활용하다가 구시가지 동쪽 성문 앞 검역소는 1648년에 만들었다.

라구사 사람들의 질병에 대한 대응은 이렇게 매우 과학적인 편이다. 중세 시대였는데도 말이다. 배를 타고 돌아온 다친 어부들과 항해사들을 위해선 1301년부터 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1317년엔 약국까지 만들었다. 이건 흑사병 유행 전이다. 플라차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프란체스코 성당 부속 약국이 나온다. 지금도 장미 크림을 사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 3번째로 만들어진 약국인데 아직까지 운영 중인 약국으로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게다가 1319년에 일반인들에게까지 개방됐다. 지식이나 약품을 독점해 권력으로 삼지 않았다는 얘기라 주목된다.

구시가에서 만남의 장소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듯한 공간이 하나 있다. 플라차 대로 초입에 있는 오노프리오 분수Onofrio's Fountain다. 지진 피해를 겪으면서 장식물은 거의 사라졌는데 이곳은 흥미롭게도 산에서 물을 끌어와 만든 상수도 시설이다. 1436년에 이걸 만들었다. 파리에 근대적 상하수도 시설이 생긴 건 1853년인데, 도대체 라구사 사람들은 어떤 이들인지 더 궁금해진다.


방어 목적으로 성곽도시를 만들면 사실 식수가 문제다. 라구사 사람들도 처음엔 물 저장탱크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저장 용량의 한계나 저장탱크 오염에 대한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기술자를 데려다가 수로를 만들고 산에서 물을 끌어왔다. 작은 오노프리오 분수도 반대편에 존재하는데 역시 상수도 시설이다.

라구사 사람들은 해상무역으로 돈을 벌어 이렇게 일종의 사회 서비스에 투자하는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항해는 사실 뱃놀이가 아니다. 파도와 싸워야 하고 때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게 남편을 잃고 가난해진 여인들을 위해 라구사에선 일자리와 식량도 나눴다. 1347년부터 빈민 구호소를 만들었고, 1432년엔 고아원을 설립했다. 풍랑 또는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함께 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라구사 공화국의 노예 해방이 있다. 라구사 공화국은 1416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한다. 링컨의 노예 해방 446년 전에 노예 해방을 단행한 셈이다. 1416년 1월 27일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회의에서 78명 중 75명의 의원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결정에 찬성했다. 당시 노예의 대다수는 여성이었고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유의 가치를 진즉부터 실천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중세 시절 유태인이나 신교도 탄압이 횡행할 때도 이들은 관용의 원칙을 세웠다. 정교, 유대교, 가톨릭, 신교가 공존한 것이다. 심지어 두브로브니크의 부유한 상인과 선원들은 오스만 제국의 노예였던 유태인이나 가톨릭 노예에게 돈을 빌려줘 자유를 사도록 도왔다는 기록도 나온다.

렉터궁

그런데 두브로브니크엔 기억에 남는 왕이나 영웅이 생각나지 않는다.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의 통치 대신 법과 제도로 시스템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정치 체제는 귀족들이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었는데 흥미로운 게 책임자의 임기다. 투표를 통해 뽑았는데 권력 집중을 막으려고 임기는 1 달이었다. 뽑히고 나면 집을 떠나 렉터 궁에서 살아야 했는데, 1 달 동안은 가족이나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다. 부패 방지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공화국 체제는 나중에 나폴레옹에게 점령되기 전까지 유지됐다.

두브로브니크의 유명한 상징 중 하나는 암벽 위로 두텁게 세워진 성곽이다. 그 성곽을 걸으면 빨래가 널린 집이나 학교 운동장 등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일상까지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성곽이 상징하는 건 역시 전쟁이다.


라구사 공화국은 1205년부터 약 150년 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베네치아로부터 독립한 후 1458년까지는 헝가리, 그리고 1856년까지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독립공화국의 지위를 돈을 주고 샀다.


당시는 교황과 술탄이 격돌하던 시점이었다. 그때 라구사 사람들은  두터운 성곽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긴 했지만 이 나라가 전쟁에 휘말렸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큰 나라에게 보호세를 바치고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스탄불로 배를 타고 가 공납을 바치고 자유를 산 셈이다.

하지만 외교를 통해 시대를 헤쳐가며 전성기를 누렸던 이들도 결국 쇠락한다.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무역의 중심은 아드리아해가 아니었다. 대서양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진이 문제였다. 1667년 지진과 연이은 화재 때 주민 5000명이 숨지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 건물도 90%가 파괴됐다.


참고로 프란체스코 성당 위쪽 피에타상을 유심히 볼 만 하다. 새벽에 산책을 하다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피에타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봤다.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다. 플라차 대로에 있는 건물 대부분이 1667년 대지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프란체스코 수도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피에타상은 그 대지진 때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피에타상이 경배의 대상이 된 이유다.

두브로브니크가 자랑하고 그래서 화폐 도안에도 쓰이고 있는 시인 이반 군둘리치(Ivan Franov Gundulić, 1589-1638)는 말했다. “신은 우리에게 세상의 보물인 자유를 주었다. 자유만이 두브로브니크를 빛내는 유일한 장식이다. 세상의 모든 금을 주어도 아름답게 빛나는 자유와 바꾸지 않는다.”


두브로브니크, 정말 '자유'를 만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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