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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뚜벅 Sep 25. 2021

프라하, 14세기를 만나는 곳

카렐 4세가 꿈꾼 도시

프라하의 첫인상? 시간을 거슬러 현대적 시설 가득한 중세로  느낌이랄까? 구시가 성당과 천문시계, 블타바  위의 카를교, 프라하성과 비투스 성당까지 확실히 볼거리가 넘치는 도시가 프라하이긴 하다. 게다가 카프카까지.

하지만 관광객들에 휩쓸려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날이 금세 저물고 만다. 그래서 프라하와 만날 때는 가능하면 ‘자기만의  하나쯤 있는 것도 좋겠다. 내가 택한 창은 14세기의 프라하였다. 왜냐하면 프라하가 지금 같은 도시의 모습을 갖춘 시기가 14세기라서다.

사실 유럽의 14세기는 흥미로운 시기다. 가장 피폐했던 시기였다 해야할까? 1314, 영국과 프랑스에선 5월부터 내린 폭우가 가을을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독일은 1315 겨울에 비가 엄청 내리더니 추위까지 극심해졌다. 1317년까지  유명한 '유럽 대기근' 시작된 것이다. 사람이 배고파 죽는다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


게다가 1346년부터 53년까지는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다. 인구의 3분의 1이 숨졌다. 우리의 경험으로 상상해보면 이 역시 어마어마한 일이다. 접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일상의 활동이 정지된다. 장례 미사조차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14세기엔 인간이 벌인 전쟁의 참화도 이어졌다. 당장 백년전쟁이 있었다. 1337년부터 1454년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민심은 이미 황폐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세를 지탱해오던 신념 체계인 성당의 권위 역시 무너지는 중이었다. 우리가 르네상스로 기억하는 15세기나 그 후 종교개혁의 시기가 오기 직전의 시기가 14세기였다. 그런데 아름다운 중세도시 프라하는 흥미롭게도 그 14세기에 국제도시로 탈바꿈됐고 전성기를 누렸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바로 카렐 4세 때문이다. 지금도 체코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왕을 조사해보면 카렐 4세가 1순위를 기록한다. 당시 프라하가 속한 체코의 이름은 보헤미아였다. 카렐 4세는 보헤미아의 왕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폴란드 일부에 걸쳐있었으니 중부 유럽의 중심이라 봐야겠다. 황제는 일곱 명의 선제후가 투표로 뽑았다. 카렐 4세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7 명 중 5 표를 얻어 황제가 됐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 첫 작업이 프라하를 황제의 도시, 국제도시로 만드는 일이었다.

 

카렐 4세는 먼저 올드 타운 바로 옆에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본인이 짰다. 그 결과로 프라하 도시 크기는 3배나 늘었다. 새로운 인구 유입도 당연히 이어졌다. 이때 체코어를 하는 이들이 더 모여든 게 흥미롭다. 설명이 필요한데, 당시 프라하의 주류 언어는 독일어였다. 또 카렐 4세는 교황과 얘기해 라틴어로만 미사를 보던 걸 슬라브어로도 드릴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이 역시 매우 예외적인 조치였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체코에서 체코어가 살아남은 건 이렇게 카렐 4세 덕분이다.

카렐 4세는 신시가지와 강 동쪽의 구시가를 연결하도록 다리 건설도 명했다. 역시 첫 주춧돌은 본인이 놓았다. 흥미로운 건 이 다리 건설을 위해 첫 삽을 뜬 시각이 정확히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연월일 표기법을 따르면 1357년 9일 7월 5시 31분이다. 1357(년) 9(일) 7(월) 531(시간)으로 내림차순으로 읽거나 오름차순으로 읽어도 같은 시간을 택한 것이다. 당시 왕실의 점성가가 그때 다리 공사를 해야 견고함이 보장된다고 해서다.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넓은 강에 돌다리를 건설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완공하기까지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택일을 잘한 건지는 모르겠다. 1402년에 완공된 다리가 1432년 홍수 때 기둥 3개가 파괴됐으니 말이다.

원래 이 자리엔 블라디슬라프 Vladislav II 왕이 1170년에 지었던 유디트 Judith 다리가 있었다. 부인의 이름을 따서 다리 이름을 붙였었다. 그런데 이 다리는 홍수에 휩쓸려 무너진 상태였다. 강 서쪽의 말라 스트라나는 왕이나 대공들의 주거지였는데 강 동쪽 신시가지와 잇는 다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흥미로운 건 처음엔 그냥 돌다리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1848년 뉘른베르크에서 선물 받은 카렐 4세 동상을 다리 앞에 세우면서 카렐교라 이름 붙여졌다.

카를교의 스타인 성인상들은 다리가 건설될 때 세워진 건 아니고 1683년부터 1714년까지 하나씩 다리 기둥에 설치되었다. 그중 동판 부문이 반질반질하게 변한 얀 네포무크 성인 상이 가장 인기다. 왕후의 불륜을 의심하던 바츨라프 왕이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고, 개한테나 얘기하겠다고 한 인물이다. 결국 왕의 미움을 사 강에 던져졌다. 지금 성인상 원본은 박물관에 있고 다리에 있는 건 복제품이다.

재밌는 건 1965년에 이 돌다리의 아스팔트 포장을 벗겨내고 지금 같은 조약돌이 깔린 보도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보행자 전용 도로로 관광의 중심이지만 예전엔 전차나 버스가 다니던 다리였다는 얘기다.

카렐 4세는 또 자신이 어려서 보았을 때 황폐했고 무너진 곳이던 프라하성도 다시 쌓았다. 황제의 거주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성당을 본따 고딕 성당 비투스 성당을 새로 지었다. 이건 본인이 죽기 전에 완공되지도 못할 성당이었다.


이렇게 도시와 성당, 성과 교량을 만들면서 카렐 4세는 프라하를 명실 공부한 국제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다. 덕분에 당시 도시 크기로만 보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다음 3번째 도시가 프라하가 된다. 작은 변방의 도시가 국제도시가 된 것이다.

프라하는 문화의 중심으로도 변모한다. 그 출발은 카렐 대학교의 설립이었다. 알프스 이북에선 처음으로 만들어진 대학이다. 프라하에 있는 카렐 4세 동상을 자세히 보면 오른손으로 종이를 건네고 있는데 그게 바로 대학설립 허가증이다. 이 대학에서 프라하 종교개혁의 상징 후스가 나중에 총장으로 일하게 된다. 카프카도 이 대학 출신이다.


왜 이런 대학 설립이 중요할까? 일반적으로 파리나 이탈리아에선 자연스럽게 학생과 교수들의 학문적 열정이 모여 대학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이 조합을 만들고 교수를 초빙했다. 그에 반해 프라하에선 왕이 대학을 만든 게 차이다. 일종의 국립대학이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대학을 통해 성직자나 재판관, 관리가 배출되고 의사와 교사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관료 역할을 하며 황제를 돕는 세상, 이것이 카렐 4세가 꿈꾼 세상이 아니었을까?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중심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과 대학 설립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카렐 4세가 꿈꾼 도시는 어린 시절 그가 머물던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됐다. 4살부터 7년간 카렐 4세는  프랑스 궁정에 머물며 일종의 군주 수업을 받았다. 이때 그를 가르친 이 중엔 나중에 교황이 되는 클레멘스 6세도 있다. 또 페트라르카와도 친분을 나눴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꿈은 황폐해진 프라하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카렐 4세가 임기를 시작한 1347년은 흑사병이 유럽을 덮친 시기였다. 프라하는 그나마 내륙 지역이라 해안을 낀 지역보다는 흑사병 피해가 적었다. 특히 독일에서 흑사병이 대량으로 발생해 교통까지 두절된 상태였던 게 일종의 격리 조치 역할을 했다. 그렇게 흑사병을 이겨내면서 황제의 도시 프라하는 14세기에 절정기를 맞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후 세계 역사의 변방으로 남으면서 덕분에 우리에겐 아름다운 중세의 프라하가 고스란히 남겨졌다. 그리고, 히틀러의 침공 때도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적 실수 때문에 결과적으로 체코가 일찍 항복하게 되면서 도시의 파괴를 피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드 제목으로도 쓰인 헝가리 속담인데 난 이 말을 들을 때면 체코 프라하가 떠오른다.

프라하 구시가를 돌다 보면 중세의 유적들은 놀랍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심각하구나 느껴지는 건 아쉽다. 구도심에선 거의 모든 게 관광을 위해 움직인다. 주민들을 위한 공간인 학교나 슈퍼마켓, 주차장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외곽으로 나와야 그런 공간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구도심이 완벽하게 관광도시가 돼버릴 경우, 역설적이게도 관광의 맛이 떨어진다. 현지인들도 살지 않으면 마치 영화 세트장이나 놀이동산을 거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 프라하가 그런 위기 일보 직전의 상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를 찾는다면 멀리까진 못 가더라도 카를교 다리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 카파 섬이라도 거닐어보길 추천한다. 이 공간 역시 12세기에 만들어졌는데 그나마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존 레논의 담벼락 등 찾아가볼만한 관광지도 있다.  


도시는 꿈의 반영이고 삶의 조합이다. 그래왔고 또 그래야한다. 지금도 그런가? 프라하가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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