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의 자취를 찾아서.
모든 것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삶에도 일에도 인간관계에서도.
수원화성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아이들과 영화 <사도>를 다시 보면서 이들에게도 적절한 쉼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MBTI 파워J 같은 영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행태를 꾸중할 때 중간 중간 쉼표가 있었다면 그래서 아들의 마음과 상황을 헤아려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은 적어도 그토록 애정하고 영특해하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극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한 안타까움은 잠시 마음 한 켠에 접어두고 조선 후기 제 22대왕 정조의 이상향이 계획되고 실현된 수원화성으로 떠났다. 조선 500년 통틀어 손에 꼽히는 성군이었던 정조의 효심과 애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곳.
박물관에서는 화성의 축성 과정 및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의 모습이나 사도제자 릉 에 행차할 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한 나라의 군주로서도 자식으로서도 참 부족함 없는 성인(聖人)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시대에 정조대왕이나 세종대왕 같은 능력 있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완성형 리더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아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정조대왕도 그들의 삶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분노와 슬픔에 대한 즉각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쉼표를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물관 앞 공터에는 화성을 짓기 위해 만들어진 거중기, 유형거, 노로 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책 속 그림이나 사진에서만 보던 것을 실물 크기로 보니 비로소 현장에서 쓰였을 이것들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고, 이걸 알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아이들 손을 잡고 다니나 보다. 어렸을 때 지리와 역사를 어려워했던 나는 내 아이들에게는 시험 치긴 위한 영역이 아닌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접할 수 있길 바랐고 그런 마음으로 지도 위 지역들을 도장 찍기하며 다니다 보니 요즘 내가 제일 관심있는 분야가 역사가 되었다. 그런걸 보면 내가 아이들을 성장시킨 만큼 아이들 덕분에 내가 많이 성장한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
자리를 옮겨 행궁에 갔을 때 놓여있던 뒤주를 보고 아이들이 소리쳤다.“앗, 여기 사도사자 갇혀서 죽었는데.” “어떻게 아들한테 그럴 수 있어? 나빠!” “그래, 엄마도 아들을 그렇게 죽게 한 거는 이해가 안되긴 해. 얼마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을까. 하지만 점점 이성을 잃고 많은 사람을 해하는 아들을 한 나라의 왕으로서나 아버지로서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게 되어버린 관계가 너무 안타깝긴 하다. 그치?”
아마 이번 여행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도, 성군인 정조의 자취도 아닌 ‘뒤주’인 듯 하다.
해질녘 쯤 선선한 가을 바람을 느끼며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아이들의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이곳에 대한 자기가 아는 얘기를 알려주기도 하고, 자기도 정조처럼 엄마 아빠한테 효도할 거라는 이쁜 말도 하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나는 느낀다.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들의 삶의 여정에서 쉼표 같은 시간 들 임을.
이런 쉼표의 여백으로 우리가 스스로 를 잃지 않고 각자의 모습일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