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토지>촬영지를 가다

그들을 만나는 시간.

by 꿈꾸는엄마

처음 학교 도서관에서 <토지> 20권이 새 책으로 들어와 나란히 꽂혀 있는걸 보고 약간 나만의 도전처럼 1권을 빌려왔던 기억이 난다. 고백하자면 약간의 허세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이 그렇듯 한 장 한 장, 한 권 한 권 읽다 보면 머릿 속에 하나의 세계관이 생기고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되면서 오히려 읽을 수 있는 책이 줄어듦에 아쉬워지는 시간이 온다.

독서의 장점 중 하나가 간접경험이라는데 진짜 그러한 것이 책을 읽으면 일생을 살면서도 경험해 보지 못할 온갖 유형의 인물들을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 속에서 만나게 된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발이 넓어 봤자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겪을 수 있을까. 하물며 인맥을 넓히기 보다는 한번 인연이 된 사람을 깊이 있게 사귀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책 속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각양각색 사람들을 만나고 탐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재작년 9월 아직은 여름을 놓아주기 싫었는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때 아이들과 함께 하동에 있는 최참판 댁 드라마 촬영지와 박경리 문학관으로 향했다. <토지>는 작가가 집필에만 25년이 걸린 소설로 최 참판 일가를 중심으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스무 권의 책을 1년 넘게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결국 마지막 책의 표지를 덮었을 때 나는 그 긴 세월 속에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인간사를 이렇게 하나의 서사로 담아낼 수 있는 작가의 기적 같은 능력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마을로 올라가는 오르막길부터가 우리에겐 시간여행을 떠나는 준비 시간이었다. 강정 가게 아주머니께서 하나 먹어보라며 투박한 손길로 내미는 달콤한 강정을 하나씩을 쥐고서 그저 신난 아이들과, 짐이 없는 게 편할 텐데 굳이 챙겨온 <토지> 책까지 들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나, 그리고 그 소중한 시간 들을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아둘 준비를 하는 남편은 이렇게 각자의 임무를 가지고 평사리에 다다랐다.


마을에 들어서니 푸른 하늘 아래 소담 스런 초가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집앞에는 ‘용이네’ ‘칠성이,임이네’ ‘우가네’ ‘관수네’ 등등 간단한 인물 소개와 함께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정말 그들이 사는 곳에 온 것 같은 그래서 마치 실존하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에는 6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 한다는데 그 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임이네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행동거지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정말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지만 이렇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염려가 될 정도였다.


초가집이 모여있는 마을을 지나 좀 더 올라가면 평사리 논 뷰를 감상하기 딱 좋은 곳에 최 참판댁 기와집이 위엄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습처럼 으리으리한 자태 그대로라 현실감이 있어 만족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지금이나 그때나 빈부격차로 인해 우리네들의 삶의 모습이 이렇게 다르다는 게 보여져 좀 씁쓸한 마음은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아직 자리 잡지 못했던 머릿 속 인물들이 이제 번짓 수를 찾은 거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대청마루에 꽂꽂히 서 있는 윤씨 부인도, 연못에서 봉순이와 놀고있는 꼬마 서희도, 마당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랫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눈에 선하다.

이 드라마 세트장 역시 책을 읽은 누군가에 위해 재현 되어진 공간이기에 조금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다른 부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치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곳을 거닐다 보니 책 속에서 만난 많은 나의 그들과 그녀들을 좀 더 현실감 있게 마주할 수 있어서 설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쉽지 않은 아니 너무나 격동적이고 험난했던 시대를 힘겹게 살아냈던 사람들,,물론 삶의 방향이 옳았던 사람들도 있고 아니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내는 라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엄마의 여정에 기꺼이 함께해준 두 딸들과 남편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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