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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숙소 주변 지하철을 향해 나섰다.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의 지하철이라 그런지 '잘못 내리는 거 아니겠지?'라는 초조함에 계속해서 애꿎은 구글 맵 속 지하철 노선도만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한 역을 지나칠 때마다 부드럽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생각했던 역 이름과 실제로 안내해 주는 안내 방송의 이름은 달랐다. 묵음도 있었고, '이걸 이렇게 발음한다고?'라는 생각을 할 만큼 엉뚱하기도 했다. 낯선 역 이름을 들으며 내가 정말 파리에 도착했구나 싶었다.
소매치기 많고 차갑기로 유명한(?) 파리.
나는 조그마한 까만색 가방을 온몸으로 움켜쥐었고, 혹여나 누가 내 가방 속을 나도 모르게 휘저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의 몸은 점점 더 앞으로 숙여졌다. 양 사이드로 서로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한국의 지하철과는 달리, 이곳의 지하철은 버스 마냥 좌석 배치가 되어 있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없었다. 지하철을 죽 둘러보았을 때,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신기하게 자리가 있음에도 앉지 않고 기둥 혹은 의자를 접어놓은 상태로 기대어 한 손으로는 무심하게 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두들겼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 지하철 밖으로 나왔을 때, 나의 양 뺨에는 찬 바람이 맞닿았다. 한국의 겨울만큼 춥진 않았다. 갑자기 환한 빛과 찬 바람에 나의 눈에는 약간의 눈물이 차올랐다. 눈을 크게 떴을 땐, 휘황찬란한 금색 빛을 한 새 모양 동상과 죽 길게 늘여진 하얀 다리, 그리고 다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등이(나중에 찾아보니 유명한 알렉산드로 3세 다리였다)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한 바퀴를 둘러보니 유럽만이 가진 옛날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와"
내가 지하철에서 나와 처음으로 본 광경에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질렀다.
사실 서른에 가까워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리 멋있는 것을 봐도 두근거림이나 설렘을 느낄 수 없었다. 점점 감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는 알 수 없는 낯섦에 잠시 멍해짐을 느껴지며 조용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떨떨한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전부라고 할 만큼 사방이 그 그림이었다. 예상도 못했다. 가로로 길게 네 개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이런 그림은 또 처음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수련>이었다. 다른 방을 가도 그랬다. 같은 곳을 그렸지만 모두 다른 색채,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가까이서 그림을 보면 눈이 흐릿해져 대체 무슨 그림인가 싶지만 그림에서 한 발짝 뒤로 멀어지면 이게 꽃이었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그림에서 나의 몸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연못에 비친 꽃의 잔상과 은은하게 흘러가는 연못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 문외한이었지만, '이게 인상주의구나' 정도는 그림을 보고 채감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한 곳에 머물며 연구를 하며 그렸을지, 취미로 아이패드에 세네 시간을 끄적거리며 그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프고 두통이 올 정도인데. 정말이지 그 기다림에 있어 끈기와 고통을 인내하는 힘이 대단하다 싶었다.
여러 방을 둘러보았으나 죄다 <수련>이었기에 '내가 이 방을 봤었나?' 헷갈려하며 길을 잃기도 했다. 스스로 되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여러 개의 <수련> 그림을 보고 나서 나는 빽빽하게 짜 놓은 다음 일정으로 향했다.
미술관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튈리르 정원이 나왔다. 나무들이 조금 웃기게 생겼다, 모두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이발해 놓은 듯이 깎아져 있었고, 멀리서 보니 나무가 아닌 무슨 레고를 심어놓은 것 같았다.
어느새 배가 고파져 구글맵을 틀고 주변 별점 높은 음식점을 찾아보았다. 길게 늘여진 건물 골목 사이로 걷다 보니 양쪽에 많은 수의 자전거들이 파킹되어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낭만이겠다 싶었다.
처음으로 음식점을 가려니 긴장이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오전 11시로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멀리서 무심히 조금 콧잔등에 내려앉게 안경을 끼고 예술가 같은 공허한 눈을 한 동시에 큰 키와 곱슬머리의 잘생긴 남자 직원이 맞이하러 왔다. 긴장한 탓에 조용히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한 모습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먼저 "봉쥬르"를 외치며 어서 자리로 안내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직원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고, 딱 봐도 어리숙해 보이는 관광객임을 알아차렸는지, 친절하게 영어로 설명하며 메뉴판을 건네주고 갔다. 메뉴판을 딱 펼치니 역시나 다 불어로 적혀있었고, 나는 동공지진이 되었다. 당황한 나머지 메뉴판을 아래에 깔고 다시 구글맵으로 이곳 사이트에 들어가 메뉴 사진을 보았고, 직원을 향해 '나 주문할 거야'라는 강렬한 눈빛으로 불러 내 파리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오리고기 콩피와 어니언 수프를 시켰다. 낮이지만 1일 3회 와인을 마시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로 낮술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당당하게 와인 한 잔도 추천받아 시켰다.
처음에 나온 어니언 수프. 나는 사실 양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조금 뒤적거리다가 보인 양파에 조금 망설였지만 국물을 한 입 떠 마셔보았다. 뜨끈하고 감칠맛 나는 진한 양파 국물이 입안에 퍼졌다. 양파 수프 위에는 치즈로 덮혀져 있고, 아래에는 국물에 잠식해 조용히 숨죽이며 자신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바게트 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씩 맛을 보니 이런 천국이 없었다. 계속해서 손이 갔고, 온몸이 양파수프의 온기를 받은 듯 따뜻해졌다. 이후 나온 오리고기 콩피는 샐러드와 토마토, 그리고 조그마한 손가락 모양 감자들과 함께 나왔다. 나는 밥과 국물, 반찬을 주로 먹는 한국인으로 사실 만족스러운 한 상이 아닐지 몰라도 통으로 크게 하나 나온 오리고기 다리를 포크와 나이프로 쑤셔 잘라먹어보니 꽤나 짭조름하고 오리고기를 이렇게 먹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와인과 함께 음식을 먹으니 어느새 파리지앵이 된 마냥 혼자 뿌듯했고, 어깨가 으쓱해졌으나 이내 점점 주변에 사람들이 차면서부터 다시 소심모드인 나로 돌아와 온몸을 쭈그리며 음식을 먹고 후다닥 계산하고 밖으로 나와 다음 계획지로 이동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사실 이곳은 인스타로 처음 알게 되었다. '파리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곳 5' 이런 식의 타이틀로 눈길이 가서 눌러보았을 때, 가장 먼저 나온 곳이었다. 파리에 갈 계획이 있기 전엔 그냥 '와, 되게 화려하네.' 정도였고 별 감흥 없이 넘겨버린 곳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 들어가기 앞서 건물 앞에 서니 공연장이라는 느낌보다는 엄청 화려한 박물관 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황금색 장식물에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바로크 양식의 견고한 대리석 건물이었다. 별생각 없이 건물 내부로 들어갔는데, '헉' 했다. 그곳은 화려 그 자체였다. 내가 마치 중세시대 귀족이 되어 부유한 가문의 집에 초대받아 파티장에 있는 느낌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우아하게 부채를 팔락 거리며 꽉 끼는 코르셋을 한 화려한 드레스를 다른 한 손으로 부여잡고 가녀리게 숨을 내쉬며 고양이처럼 사뿐 거리며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에는 내가 너무 평범하게 편한 바지에 편한 니트를 입은 것에 후회했다. 이곳에 어울리게 예쁘게 입을걸.
가르니에로 들어서면 그랜드 계단과 대리석 홀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니 사방으로 천사와 신의 모습으로 보이는 온갖 누드의 사람들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화려함에 압도되어 나는 휴대폰 사진 셔터를 안 누를 수 없었다. 밝은 촛대, 샹들리에, 견고하게 조각되어 있는 대리석 조각들. 이걸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눈에 담고 싶어도 담아지지 않았다. 나는 몇 바퀴를 반복하여 돌며 눈에,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 꽉꽉 담으려 노력했다. 은은한 주황빛, 그리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이 모든 방. 황금 장식들. 한 걸음 한 걸음을 조금씩 떼며 황홀하게 이 모든 것들을 세세히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더 실내로 들어서니 전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함이 나를 압도했다. 화려함 속에 더 화려할 수가 있었다니. 사방이 황금빛을 띠었으며, 천장은 온통 그림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여러 개의 샹들리에들이 이곳의 화려함과 우아함을 더욱 극대화시켜줬다. 베르사유 궁전의 미니 버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솔직히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파리의 그 어떠한 곳도 이보다 더 화려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이곳은 단순히 귀족이 아니라 왕족만이 들어올 수 있어야만 할 만큼 입이 떡 벌어지고, '감히 평민인 내가 이곳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몸이 찌릿했다. 이곳에서는 온갖 공연을 하는데, 데이트로 이곳을 오게 되어 공연을 보게 된다면 나는 두 번 사랑에 빠질 수 있을 만큼 황홀한 곳이었다. 내심 이곳에서 공연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내가 예전에 대학생 때 뉴욕에서 교환학생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마음속 넘버 원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을 모티브가 된 공연장이라고 한다. '그럴 만도'라는 생각이 들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곳이었다.
가르니에에 어떤 도서관같이 생긴 곳이 보였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공연하며 사용했던 악보, 공연복, 공연을 했던 사람을 그린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890년에 그려진 그림. 그 당시에도 이렇게 화려하게 입고 공연을 한 모습을 보고 절로 감탄하였다.
그렇게 홀린 듯이 돌아다니며 오페라 가르니에를 보고 나왔더니 벌써 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을 나오니 더 공기가 쌀쌀해졌고 나는 멍하니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남색 지붕에 옛날 건물들. 그리고 그림처럼 우뚝하게 서 있는 길거리 전등. 사람과 자동차만 바뀌었을 뿐,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건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옛날 사진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리저리 바쁘게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빵빵 거리는 차들을 바라보다 갑작스레 평온함이 찾아왔다. 나는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 밖 계단에 앉아 조용히 사람들을 구경했다.
"shake me up~"
나의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어떤 흑인 남성이 큰 소리로 열창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추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동작, 삑사리 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세계 유명한 스타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조용히 팔을 괴고 그 사람을 멀리서 구경했다. 부끄럼이 많은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그 만의 넘쳐나는 자신감이었다. 처음에는 마냥 웃겼으나 계속 보다 보니 조용히 마음속으로 응원했고, 그렇게 그 사람을 끝으로 나는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갤러리 라파예트. 주변에 있는 백화점이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백화점 가면 쇼핑은 잘 안 하지만 뭔가를 구경하는 것이 좋아 가끔 돌아다니곤 한다. 백화점은 매우 컸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진한 오렌지색의 빛들이 번쩍 거리며 나를 반겼다. 지하에는 다이소처럼 잡화점 같은 곳이 있어 무심하게 구석구석 돌아보았고, 조금씩 올라가니 특별히 구입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우리나라와는 다른 여러 종류의 잼, 다양한 와인, 온갖 그릇들, 낯선 프랑스 글씨들을 구경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생과일주스 체인점이 있어 주문을 하고 기다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이 백화점이 130년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지 '130 Noel'이라 적혀 있는 독특한 모양의 트리가 백화점 가운데에 크게 설치되어 있었고, 온갖 조명의 색들로 인해 꾸며졌다. 예전에는 산타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 건 안 하나 보다. 조용히 파란빛에서 주황빛, 청록빛, 분홍빛으로 점점 변하는 트리를 보다가 음료가 나왔고, 시간이 아까워 다른 층으로 후다닥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