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덧 서른이 되기까지 3일을 앞두고 있다.
이제 막 29살이 되었을 때 서른을 넘긴 선임들이 내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서른 되기 전인 너 나이일 때, 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른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오고, 서른이 되기 전에는 내가 해놓은 것이 많이 없어 내가 과연 잘 살아왔는지 계속해서 과거를 되뇌며 후회하고 반성했어. 하지만 막상 서른이 되면 그 전과 다를 바가 없고, 이전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저 이전의 연장선일 뿐, 계속해서 지내다 보면 서른 일 때 많은 것을 해 놓았어야 하는 압박감을 내려놓게 되더라고.”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20대를 보낼 준비가 된 나는 그 말이 어떤 것인 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는 20대 초중반까지는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이제껏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처음 주민등록증을 들고 금기의 구역(?)인 술집에 갔던 때가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내가 이런 곳에 가도 되는 건가? 엄청난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데?’
그저 평범한 술집이었으나 미성년자를 이제 막 벗어나 새내기 성인이 되었을 때는 모든 행동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처음이 어렵다고, 머쓱하게 아르바이트생에게 나의 민증을 보여주고 이후로는 친구들과 정말 다양한,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많이 남겼다.
대학교 2학년 때에는 간호학과는 나랑 정말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자퇴를 하거나 편입 준비를 하려 했을 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나는 꼬리를 나리고 억지로 학교를 꾸역꾸역 다녔다. 그만큼 내 자신에게 확신도 없었기에 금방 나의 생각을 접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학교를 다니던 때, 나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국가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것이기에 학교에서 오직 한 명만이 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하지 않는 학교, 맞지도 않는 과에서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터였기에, 내가 될 거란 자신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영어 면접을 보았다. 엄청나게 유창하지 않지만,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일부로 기억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어려운 단어들을 어지러이 내뱉었다. 그게 운 좋게도 통했던 것 같다. 나는 합격 전화를 받았고, 학교 기숙사에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
그렇게 3학년 1학기를 뉴저지, 뉴욕을 왔다 갔다 하며 수업도 듣고, 병원 실습도 다니기도 하고 몇 번 실습을 째고 몰래 나가 메이저리그 뉴욕양키즈 경기장도 보고 오고, 세상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동물원도 다녀오는 등 정말 소중한 경험도 많이 하고 왔다. 그 당시 주변으로 여행도 많이 다니고, 박물관, 미술관, 뮤지컬 공연 관람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얼레벌레 졸업을 하고서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탓에 무작정 서울로 대학병원 취직을 시도했다. 몇 번의 탈락 끝에 합격한 병원에 들어가 이제 나의 삶은 평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새롭게 취직한 병원은 ‘태움’이 존재했다. “이곳이 제일 좋은 병동이야”라며 나를 타이르던 선임은 뒤에서 나를 몰래 욕하기 바빴고, 기본적으로 병동 분위기는 싸늘했으며 인사를 가지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기 바빴으며, 같은 동기들도 바쁘다며 나에게 인계해주어야 할 막내 잡을 대충대충 알려주며 넘기기 바빴다. 하루하루 가시방석 같았으며, 3개월 동안 나는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자존감이 바닥을 찍으며, 나 자신은 한심한 인간이라며 단정 짓고 첫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나는 간호학과 학생 시절 선배들이 장난스럽게 “도망가!”라고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다시는 대학병원에 가지 않으리, 하며 나는 이곳저곳을 돌며 일을 하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대학병원에 들어갔고, 그곳은 전에 다니던 병원보다 조금 더 큰 병원이었기에 중증도가 조금 더 높았다. 3개월만 하고 퇴사를 했던 내가 너무나도 싫었기에 그때보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라는 생각으로 다녔다. 하지만 역시나 대학병원에서의 경직된 분위기, 화장실도 마음 놓고 가지 못해 하루 한두 번 갈까 말까였고, 식사도 한 달에 2~3회 할까 말까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말라갔다. 새벽에 툭하면 자취방에서 나가 산책을 하며 한숨을 쉬고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반복하다 결국에는 ‘나는 지금 잘 살고 있어. 이렇게 직장도 가지고 있고, 다들 힘들다. 나만 힘든 거 아니다.‘라며 나를 억눌렀다. 하지만 8개월이 넘어가던 차에 나는 매일 죽어가는 환자, 출근할 때마다 내 근무시간에 응급이 터질까, 내가 실수하는 일이 생길까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렇게 살기 싫다!’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시 사직서를 내밀었다.
이후 나는 엄청난 우울증에 시달렸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부턴 우울증과 무기력함이 감기처럼 나를 따라붙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내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정신과 간호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한 정신병원에 들어가 정신과 간호사를 하며 정신전문요원 수련도 받았고 정신없지만 전보다는 만족을 하며 3년을 다녔다. 이후 병원의 체계가 점점 엉망이 되었고, 선임들의 줄지은 퇴사로 인해 업무 과다로 이어졌다. 하루 16시간 이상을 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같이 정신전문요원을 수련했던 동기들도 하나둘씩 퇴사를 하자 나도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 자격증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한 끝에 궁금했던 정신건강센터로 이직을 했다.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정신병원과 달리 동을 배정받아 해당 동에 등록되어 있는 중증정신질환자의 집에 매주~매 달 정기적으로 찾아가 약물관리, 정신증상체크, 연계 등의 일을 해주었다. 정신병원에서는 정신과 증상이 있거나 부작용이 있을 때 주치의에게 노티 하여 처방받은 후 이 처방에 따라 처치를 즉각적으로 해줄 수 있는 반면,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와는 달리 호전된 상태로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해 줄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었다.
주로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울감이 있는 대상자들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집을 방문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정말 한정적이었다. 또한 센터 내에서는 내가 맡은 사업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초발 정신질환(발병 초기~만 35세 이하 정신질환 대상자)을 대상으로 프로그램과 자조모임을 진행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정신 유관기관에 병원에서 퇴원 후 센터로 유입될 수 있도록 홍보 등을 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인계 없이 바로 뛰어들어 정신이 없었고, 다들 다른 사업을 맡았기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궁금한 사항이 생겨도 물어볼 수 없어 얼레 벌레 일을 마쳤다. 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나한테 맞는 걸까?’라는 고민이 계속 들었고 이런 의문점이 계속 생겼지만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나는 고민 끝에 또다시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서른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나는 사직을 할 때마다 항상 스스로에게 버릇처럼 되뇌던 말이 있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착하자 ‘
하지만 결국 나 스스로와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나는 이상하게 평온했다. 이제는 앞으로 무작정 좋은 직장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압박감도 사라졌고, 어차피 합격하는 그날만 행복하고 그 이후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직을 하면 할수록 지쳐갔다. 꾸준히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 친구들과 달리 나는 왜 이렇게 계속 사직을 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일까. 스스로 꾸준함이 없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다 누군가에게 대체되기 쉬운 직업을 가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른 나는 이제는 내가 좋아하던 정신과를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신과는 무경력에도 쉽게 사람을 뽑았고, 대학원을 나온다 한들 크게 메리트를 가지지 못한 다는 것을 정신과에 깊이 일을 하면서부터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른을 앞두고 나는 이십 대 초중반과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게 되었다. 마냥 어리바리한 내가 아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할 줄 알았고, 남들에게 내가 뭘 하며 사냐고 물을 때 부끄럽지 않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꾸준히 행복하게 다니는 직장이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결혼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당연히 서른에는 결혼을 할 줄 알았던 나는 최근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고, 결혼할 나이에 쫓기지 않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 졌고, 스스로를 옥죄이지 않기로 했다.
주변 가족, 친척, 친구들이 나를 만류한 적이 있었으며, 비난한 적도 있었다.
‘꾸준함이 없다.’
‘다들 하기 싫은 일 하며 산다. 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
‘남들은 취업을 못해서 난리인데, 너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니? 미련하다.’
‘넌 뭐가 문제니? 어떻게 살아가려고?‘
‘또 그만뒀어? 왜? 대단하다.‘
앞으로 살아왔던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나는, 남들이 정해놓은 나이대에 해야 할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달팽이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나의 삶을 가꿔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불안정함 끝에서 서른을 맞이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전보다 견고하고 단단할 것을 알기에 나 자신을 믿고 이 혼돈의 망망대해 속에서 조금 더 헤엄쳐나가기로 했다.
Welcome 3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