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가 오고 2000년 신세기가 오면 앞자리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니까 컴퓨터에 대란이 올 것이라고 야단법석을 떨던 1999년 9월 추석 때 홀로 계실 할머니와 엄마를 남겨두고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갔더랬다.
"언니, 떠나고 싶어, 더 이상 못하겠어!"
서른 살이 되자 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안쓰러운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결혼을 기대하는 집안 분위기, 남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 같은 건 한국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26살이 되었을 때, 10월 27일 아버지는 토요일에 1박 2일로 회사 야유회를 떠나시다가 비 오는 새벽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59살, 아홉수에 사고가 난 것이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운 오리 새끼였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보험회사 보험금 합의 협상, 아빠 회사와 퇴직금 협상 할 때 나가서 어른들과 당당하게 맞서야 했다. 많이 받아야 우리 엄마의 남은 생이 덜 고단해질 거였다.
하루아침에 두 시부모님을 모시며 남편에게만 의지하시던 연약한 어머니는 아빠의 사망에 작은 참새처럼 쪼그라드셨다.
밤새 잠을 못 주무시니까 정신과에 상담을 가서 수면제를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어요. 일단 수면제 드시고 주무시고, 시간이 지나야 해요. 한 달 있다가 다시 오세요"
난 밖으로 나가야 하는 협상 일에 전적으로 붙어있고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가 있던 언니는 엄마와 하루아침에 청천 날벼락으로 큰아들을 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돌보는데집중했다.
협상 만남을 하고 밖에서 돌아올 때면 온통 슬픔과 괴로움으로 온몸이 부서져 버린 듯한 어른 3명이 마루에 쪼그리고 앉으셔서 내가 입을 열어 어떻게 협상이 되고 있는지 들으시려고 두 귀만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내 친구가 소개해준 보험회사 과장에게 부탁을 하여 회사에서 제시한 퇴직금과 보험회사에서 제시한 합의금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조언을 듣고 그냥 합의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네가 잘 알아보고 해, 늙은이들이 뭘 알겠니? 너만 믿으니까... 작은 아버지한테도 상의를 하고..."
우리 집에서 이제 제일 어른 이신 여든 살의 할아버지가 다시 눈물을 닦으시면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탄식 비슷하게 말씀하셨다.
두 번의 협상을 할 때 작은아버지를 동석시켰고 두 번의 합의 끝에 그냥 합의를 하겠다고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소송 들어가 봤자 더 받을 금액이 배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빨리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든 가족에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내가 결정한 대로 자신도 사고로 다리를 잃고 두 명의 사망 사건 연루자가 돼버린 이름 모를 젊은 스물둘의 운전자와 합의를 하였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을 운전했던 그는 초보운전자였고 빗속 새벽길에 급커브를 돌다 운전 미숙으로 마주 보며 올라오던 아버지가 타신 승용차와 정면충돌을 한 거였다.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이미 망가져 있는 그 젊은이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더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구하면 어떠냐고 말했지만 내가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고 내가 나서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10월 27일에 사고가 나고 12월 아버지의 49제일 전에 합의 과정을 다 끝냈다.
남동생은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대학생이고 언니는 우리 집 근처에서 결혼 후 살고 있었다.
3층짜리 아빠 단독주택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방, 엄마 방, 남동생 방, 내방은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옥탑방에서 아버지만 사라진 채로 있던 그대로 다시 살게 되었다.매일 같이 살았던 게 아니고 주말에만 오셔서 그런지 아버지의 부재가 나는 퍽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아버지가 이제 당신의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살고, 엄마는 길고 긴 시댁생활을 이제 끝내야 하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침묵했다. 집에는 항상 정적과 슬픔이 감돌았다.
여전히 날 선 시어머니로 이제는 신세 한탄까지 늘어서 간헐적으로 통곡을 하시는 할머니와 시끄럽다는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이르면 결국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주먹을 날리셨다.
" 죽여, 죽여, 이놈의 영감탱이야, 죽여. 나 우리 아들 따라 죽으면 소원이 없으니까 죽여, 죽여!"
할머니는 악이 들어가는 발악과 절규로 항상 싸움의 마지막 10분을 완성하시고 싸움을 말리던 엄마와 남동생이 다시 못 싸우게 한방에서 감시를 하고 할아버지가 이부자리에 팩 하고 누우셔야 그날 부부싸움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밑에서 이런 난리 부르스가 일어나는 동안 옥탑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두 노인을 내가 죽이고 나도 그 옆에서 죽으면 어떨지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면서 뽀드득뽀드득 이를 갈았다.
아버지 소원이었던 3층주택. 아버지는 과묵하고 성실하게 양평에 있던 중소기업 회사 공장의 공장장으로 주말에만 집에 오시면서 꿈에 그리던 3층 집에서 당신의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거에 큰 자부심을 가지며 행복해하셨었다.
이 집에서 아버지의 골칫덩어리는 나 하나였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떡하니 들어간 뒤 10개월 만에 회사를 상의도 없이 때려치우고 대학교를 간다고 입시 학원을 다녔다. 재수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무실 알바를 하면서 원하는 대학교를 들어가야 한다며 낮에는 회사, 밤에는 입시 종합 학원을 다니며 삼수까지 하더니 결국 서울에 있는 야간 대학교 국문학과에 딸랑 입학하고,
졸업하고 나서도 교사 임용 고시는 보지도 않고 교사는 적성이 안 맞는다며 여의도에 있던 무역회사를 다니다 회사가 망해서 지금 당신 집 옥탑방에서 백수 생활을 하는 26살의 둘째 딸. 내가 유일한 세상에서 제일 독한 골칫덩어리였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싫어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얼굴에 보이는 나에 대한 실망과 경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중 이틀만 집에 계시는 게 내가 집에서 가출을 하지 않고 이 집에서 이렇게 사는 이유였다.
유별난 시부모님 밑에서 아무 목소리도 없이 남편 없이 남편의 부모를 찍 소리도 내지 않고 30년을 모시고 사는 엄마를 나만이 보호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냉랭하게 엄마에게 시비를 걸면 내가 엄마 대신 패악을 부르며 할머니에게 덤볐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여자 어머니를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년을 남은 가족과 같이 살았다. 여자 친구가 있던 남동생은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먼저 장가를 보냈다.
"할머니, 쟤 먼저 장가보내! 난 시집 안 갈 거니까 괜히 때 놓치지 마시고 하겠다는 여자 있을 때 빨리 보내세요"
몇 번을 할머니와 실랑이 끝에 남동생은 결혼을 했고 결혼 안 한 손위 누나는 결혼식에 가면 안 된다고 할머니가 엄포를 놓으셔서 결혼식날 나만 덩그러니 아빠의 3층 단독 주택 옥탑방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후 3년을 후두암으로 집에서 골골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집에서 5일장을 아버지의 3층 집에서 호상이라며 시끌벅적하게 지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이어 할아버지의 장례식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 피해 있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시집을 안 간 나를 놓고 수군거리는 일가친척들을 조용하라고 단단히 단속하였다. 난 옥탑방에서 숨소리도 안 내고 첫째 조카를 돌보며 투명인간처럼 숨어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 묘지를 위해 아버지 합의금의 일부로 용인에 선산을 샀다. 시골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유품도 파내어 할아버지 밑에 다시 묻어드렸다.
그다음에는 30년을 살았던 서울에서 벗어나 경기도 광명시에 3층짜리 주택을 엄마 이름으로 새로 사서 이사를 하였다.
1층과 3층에는 전셋집을 네 군데 정도 내어주고 나, 엄마, 할머니가 방 3개 있던 2층에서 살게 되었다. 엄마에게는 1층에서 원룸 월세가 나오게 되어 생활비까지 해결되었다. 엄마는 큰 집에 생활비까지 나와서 앞으로 노년 걱정이 줄어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작은 아들 집으로 가시지 않고 엄마랑 같이 살겠다고 하시는 늙은 홀시어머니가 유일한 걱정이다.
난 아침에는 자고 오후 3시 이후에 학생 집을 찾아가며 하는 과외를 직업으로 새로 정착을 했다.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에 세 군데 정도 매일 영어와 수학, 국어 과외를 하며 돌아다녔다.
안양, 잠실, 개봉동을 전철과 버스로 오가며 중간중간 초밥을 사서 먹으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받는 과외비는 밤새 보는 영화 비디오를 대여하는 데 드는 돈 빼고는 쓸 곳이 별로 없었다. 주말에도 집에서 영화만 보고 잠만 잤다. 남은 돈은 엄마에게 맡겼다. 그래야 엄마가 힘이 나서 자신 있게 할머니와 싸워서 이길 것 같았다.
그리고 1999년 서른 살이 되었고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없다고 결론을 혼자 내고 일을 저질렀다. 1999년 4월에 맞선 보고 결혼 얘기까지 오가는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별 통고를 했다.
"난 안 되겠어, 오빠, 난 결혼을 할 수가 없어, 너무 미안해, 지금까지 말없이 따라다니다 갑자기 이래서... 너무 미안해"
"할머니, 난 결혼 안 할래, 죽어도 결혼하기 싫어. 차라리 그 돈으로 유학 가서 공부하고 싶어"
"언니. 엄마랑 할머니랑 4년 살았어. 난 효녀인척 더 이상 못하겠어. 숨이 막혀서 더 이상 못 살겠어"
다행스럽게도 이제 아들이 둘이된 언니가 내편이 되어 주었다. 미국 대학교를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지만 미혼에 재산 없는 나는 미국 비자가 거절되었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벗어나고 싶어서 영국 런던에 비즈니스 영어 학원에 등록을 하고 유학을 가능한 한 제일 빠르게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영어학원 개강일이9월이던 곳에 다급하게 등록을 했다. 더 이상 한국 명절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서한국 추석 전에 나가게 날짜를 잡았다.
올해 여든다섯이 넘으신 엄마는 지금도 내게 묻고 묻고 또 물으신다.
"너 자금 사는 데가 어디지?"
"이스라엘, 텔아비브. 엄마! 왜"
"거긴 런던에서 가까운가! 왜 지금 넌 이스라엘에 살아? 런던은 어쩌고?"
'엄마, 운명은 따로 있나 봐요. 나도 모르겠어요. 런던에서 뼈를 묻으려고 했는데 운명이 여기로 날 데려 왔어요'
지금부터 천천히 런던으로 도망 유학을 갔던 내가 어쩌다 2001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고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25년을 살면서 겪은 재미있는 이스라엘살이 얘기들을 펼쳐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