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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식 키우기? (1. 전반전)

이스라엘 자식은 한국 식으로 키울 수 없다!

by Kevin Haim Lee
Shabat 저녁 Kidush

내겐 2002년 출생한 아들 한 명과 2007년 출생한 딸 한 명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아들은 34살 때, 딸은 38살에 낳았다.


아들은 거꾸로 자리를 잡아 제왕절개로 출산을 결정하고 있었는데, 예정된 날짜가 오기 전에 양수가 터졌다.


바로 제왕절개로 아들을 낳았고, 그래서 진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나는 20대부터 여성의 결혼과 출산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에 나의 결혼, 임신, 출산은 나에게조차 기가 막힐 인생행로 반전이었다.


임신을 하고서는 영어로 된 "what to expect when you are expecting"이란 책을 읽으면서 책에 써진 그대로 임신 9개월을 넘겼다. 인터넷이 없던 세상이었다. 모든 정보는 책에 있었다.


아들을 낳고, 마취가 풀려서 병실에 들어왔을 때, 난 이제 임신에서 벗어나 다시 혼자만의 자유의 삶이 내게 주어질 거라고 기대했다.


그 당시에는 출산하고 나면, 이제 애를 24시간 full로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출산 후에 육아를 몰랐었다니...


아! 얼마나 미련한 생각이었는지...


일반 병실로 옮기자마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수유 지옥이 시작되었고, 수술 자국은 감염이 일어났다.

아들은 황달수취가 너무 높다며, 내가 퇴원한 후에도 병원에 남겨졌고, 그 원인을 찾다가, 동양 아이는 황달 수취가 출생 후에 높을 수 있다며, 일단 퇴원하고 병원 내원을 1주일에 한 번씩 하기로 하였다.


나의 친정 엄마가 옆에 없었다면,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출산과 수유, 병원 내원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멍청하게 임신과 출산까지만 책을 죽어라 반복해서 읽었고, 책에 쓰인 대로 완벽하게 모든 검사를 하였지만, 출산 후에 벌어질 육아에 대한 책은 있는 지도 몰랐다.


아이를 낳으면 임신 지옥이 끝나고 모든 고생이 끝나는 줄 알았으니...


그럼 난 아이를 어떻게 양육했을까?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내가 알고 있던 한국식으로 아들을 키웠다.


한국에서 한글 교재를 공수받아 매일 기역, 니은, 디귿을 가르쳤고, 더불어 영어 알파벳, 수학 덧셈, 곱셈까지 아이를 책상에 앉혀 놓고 곰젤리로 아이를 꼬시며 가르쳤다.


아들은 스티커 붙이기, Fresh Card, 그리고 곰젤리에 유혹되어 제법 수업을 꾸준하게 따라왔다.


1년마다 이스라엘에 여름 방학이 되면,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한국에 나가 한국 유치원과 학원에 조카들과 함께 두 달을 꼬박 보냈다.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이스라엘에서 축구를 시작하였고, 여름이면 축구캠프가 일 순위로 변경되었다. 아이는 더 이상 한국 학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가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워 하자, 아들은 내게 진지하게 부탁까지 했다.


"엄마, 이스라엘에서는 히브리어로 살래. 엄마도 나한테 길에서 한국말로 이제 더 이상 얘기 하지 마! 영어나 히브리어로 얘기해 줘!"


"그렇지만, 내가 한국에 가게 되면 그땐 나도 한국말로 얘기할게!"


난감했지만, 억지로 아들에게 한국어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너는 반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하는 게 불편하다는 게 말이 되니?'


확! 소리를 질러 아들을 강제로 진압하여, 한국어로 계속 대화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이스라엘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 이스라엘에 있으면 이스라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곳은 아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네가 원하는 게 모니?" 먼저 묻고,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해 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가정 교육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찾아서, 될 때까지 끝까지 해 보라고 한다. 이스라엘 아이들은 울고 불고 떼를 쓰기 보다는 그냥 자기가 하기 싫은 상황이 생기면 하지 않는다.


"난,이거 안할래. 하기 싫어!"


열명의 타인이 이 아이를 기다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아이에게 하기 싫은 것을 빨리 하라고 강제로 시킬 수가 없다.


이스라엘 부모는 아이를 압박하지 않고, 아이와 대화를 하며 그 상황을 해결한다.


옆으로 빠지던, 설득하여 그것을 시키든,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그 상황을 이해하며, 짜증내지 않고 한동안은 기다려 주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한 번은 친한 이스라엘 친구가 조심스럽게 내게 충고를 한 적도 있다.


"케븐아,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네 아들을 너무 통제하는 것 같아... 한국에는 자녀 교육이 엄격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아이가 생각하고 결정해서 살게 해주는 게... 나중에 성인이 돼서 자존감도 높아지고, 독립심도 훨씬 높을 거 같다..."


난 고민 끝에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좋아! 네 말 대로 할게. 하지만 집에서 너와 나만 있으면 한국말로 하겠어. 이건 네가 양보해야 해.


아들은 수긍을 했고, 이때부터 집에서 아들과 나와했던 한글 공부, 수학 공부는 스톱이 되었고, 토요일에는 한국말 비디오와 영어로 된 비디오만 보는 것으로 협상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난 아들에게 한국 'Tiger Mom'에서 '털 빠진 Cat Mom'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 되었을 때부터, 나의 육아 방식은 이스라엘 방식으로 바뀌었다.


우선, 아들에게 모든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 결정을 하게 하였다.


다음, 아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아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잘못된 결정으로 보이더라도 그냥 하게 놔두었다. 본인이 경험을 해 봐야, 나중에 결정을 바르게 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쯤에 핸드폰을 사 주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나서는 아이의 허락 없이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들은 비밀 번호로 rock을 걸어 놓았고, 난 비밀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남자는 만 13살이 되면 성년식을 크게 준비한다. 내 식으로 파티를 준비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성년식 장소와 식당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들은 "엄마, 내 성년식은 이스라엘 회당에서 다른 친구들처럼 하고 싶어!" 이 한마디에 내가 한 달을 고심하여 예약해 놓은 모든 성년식 준비가 물거품이 되었다.


내 잘못이다.

또 이스라엘 식을 무시하고 한국식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다. 내 방식대로 해도 아들이 따라올 줄 오해를 했다.


결국 다시 아들에게 장소, 초대해야 할 친구들, 라이브 밴드 초청 등 모든 일정을 승인을 받고, 그것대로 재 예약을 하여 성년식을 하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내가 아들에게 건넸던 대화가 이때부터 달라졌다.


"아들, 그거 다 했으면, 다음에 이거 해!"

"오늘은 이거 먹자!"

"숙제 검사 하자!"

"이거 하지 말고 다른 거 해"

"조용히 앉아서 TV 봐"


주로 명령조였던 나의 육아는 의문 선택형으로 바뀌었다.


"그거 할 거야? 그럼 그거 하고서 또 뭐 할 거야?"

"저녁은 모 먹을래?"

"로이 생일 파티에 갈 거니? 선물은 무엇으로 할 거야?"

"오늘은 몇 시에 잘 거야?"

"오늘 게임은 언제까지 할 거야?"


심지어, 가족여행으로 태국 여행을 내 마음대로 날짜를 결정했다가, 자기는 여름 축구 캠프를 포기하면서까지 태국을 갈 수 없다고 성질을 내서, 결국 아들의 비행기 표를 취소하였다.


아들은 2주 동안 혼자 집에서 지냈다. 물론 동네 친구들이 아들의 끼니를 가끔 챙겨 주었다. 아들은 14살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혼자서 살아냈다. 괜한 근심으로 2주간 동안 태국에서 끙끙대던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지금은 군대를 제대한 지 2년이 지났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아들과 사소한 일로 가끔 의견 충돌이 있을 때가 있었다.


주로 게임시간, 외출 시간, 귀가 시간, 성적에 대한 충돌이었다.


군대가기 전까지는 나의 rule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군대를 가면 그 때는 네 방식대로 맘대로 하라고 했다.


군대를 입대하고 나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너무 어리게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군대에서 수염 기르기를 신청하여서 허가를 받았다.


내 얼굴이 아니다. 산적처럼 보여야 이스라엘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데, 아들에게 수염이 지저분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팔뚝에 문신을 하고 돌아왔다. 아주 작은, 라이온 킹에 나오는 심바 문신이다.


'나 때는 말이지, 문신은 조직에 복종하는 용문신이었어... 한국에선 문신 있으면 목욕탕도 못 간다!"


마음을 진정하고 꾹 참았다.


아들은 그 후에 2개의 문신을 더 했다.

작은 초승달 문신, 그리고 캐리비안 해적에 나오는 잭 스페로우를 따라 참새 문신을 하고 왔다.


속으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문신 바람이 불었나?' 추궁하고 싶었지만, '네 팔뚝에 네가 문신을 하겠다는데 내가 어쩌겠니!'싶었다.


남미 장기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에는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뚫고 왔다.


속으로 염불을 외우고, 숨호흡도 하였다.

"내 귀가 아니다!"


성년식이 지나고 나서부터, 아이의 결정에 따라 부모 노릇을 한 우리다.


군대까지 제대한 지금에 와서, 다시 아들의 선택에 왈가불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상식에 어긋난다.


그냥, 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내가 참을 수밖에 없다.


내 아들이 아니라, '남의 남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한국에 가면, 한국말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작년부터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집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8개월 간의 긴 여행을 하면서 아이는 한층 더 어른스러워졌다.


이제 고작 23살이다.


요리를 시작했고, 방 정리를 하고, 다림이질까지도 혼자 했다.


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자기의 진로 계획을 우리에게 얘기했다.


본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본인의 생활을 꾸려나가고, 우리 부부가 미리 말해 놓았던, 교육에 관한 비용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칼같이 슈퍼에서 자신의 요리를 위하여 사용된 비용은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내게 당당히 요구했다.


이제 아들의 24시간은 완전히 그의 통제에 의하여 채워진다. 나는 그저 옆에서 바라볼 뿐이다.


아들이 내게 의견을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 묻지도 않는다.


아들을 믿을 수밖에 없고, 그 결정을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내가 살아온 나의 인생 모드를 그에게 강요할 수 없다.


한국이었다면 결혼할 때까지는 그래도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이스라엘은 13살에 성년식을 하고, 18살에 군대를 가게 되면, 아이는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난 독립 인격체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항상 배우고 또 배운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수직 관계가 아니라 평행 관계이다.


내가 낳았다고 내 방식대로 강요할 수도 없고, 통제도 간섭도 할 수 없다.


P.S. 다음화에는 이스라엘 딸을 키웠던 경험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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