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에피두랄 좀 주세요!!!
이스라엘 전쟁 시작 후 472일째
어제는 드디어 남아 있는 98명의 인질 중에서 3명의 여자 인질이 석방되었습니다.
각자의 엄마와 재회한 세 명의 인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마음이 울컥해져서 혼자 텔레비전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결국 텔레비전을 끄고 딸아이의 애플뮤직 플레이 리스트를 한동안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 딸 샤니가 인질로 잡혔다면 난 어땠을까' - 온몸에 쭈욱 힘이 빠집니다.
'난 471일을 살아서 기다릴 수 있었을까?'
- 끔찍한 숫자입니다. 어떻게 먹고 자고 숨 쉬고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엄마들은 누구보다 강합니다. 그녀들은 딸들의 생존을 100% 확신하며, 딸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1년 3개월을 꼿꼿하게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딸들은 살아서 돌아왔고, 엄마들은 가슴 깊숙이 딸들을 포옹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둘째, 샤니는 순전히 저의 고집과 결정으로 태어났습니다. 지금 17살 반으로 고3입니다. 올해 10월에 군대를 가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2002년 1월, 둘째 딸은 2007년 6월, 둘은 5년 6개월의 터울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만 3살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임신을 계획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하이테크 회사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오는 샐러리맨의 스트레스로 인해 거의 매일 두통약을 먹고 있었고 계절 우울증으로 정신과 약도 먹고 있었을 때라, 저는 태아가 정상일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낳자는 남편의 설득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낙태 위원회의 재판 승인을 받아가며 결국 낙태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정상적으로 낙태를 하려면 그냥 개인 병원에 가서 낙태 수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법입니다.
국가 낙태 위원회의 낙태 승인 재판을 받고 나서야 법적으로 산부인과에서 낙태 수술을 집행해 줄 수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낙태 승인 결정을 받으려면 대부분 다음과 같이 낙태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이의 이버지가 현재 혼인 관계의 배우자가 아니다'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했다'
'아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더 이상 양육할 수가 없다'
저도 이 중의 한 가지로 이유를 거짓말해서 낙태 승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몇 번이나 이왕 우리에게 온 아기이니 낳아 보자고 저를 설득했지만, 전 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만 3살의 날으는 스파이더맨 아들을 제대로 키우고, 풀타임 직장을 지키려면 둘째 육아는 생각하기도 부담스러운 현실이었습니다.
주변의 친한 이스라엘 친구들은 2명에서 3명의 형제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첫째 아들이 공립 정부기관 유치원에 다니게 되자, 아이를 위해서라도 형제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친구들이 좋아도 하루 24시간 7일 동안 이 친구들과 같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형제들과 함께 가족 시간을 보낼 때 나의 첫째 아들은 저와 레고를 하거나 한글 학습 비디오 "바나나 킥" 아니면 "뽀로로"로 남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 아이를 위해 형제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 올라왔습니다. 남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저의 나이 39살이고 남편의 나이 55살이었습니다.
너무 늦었고, 지금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어떻게 둘째를 키울 거냐며 자신은 갓난아이를 키울 기운이 없다며 흥분하는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둘째는 내가 알아서 키울게! 당신은 첫째만 계속 육아를 도와주고 둘째는 신경 쓰지 마! 내가 회사에 출산 휴가를 1년 신청해서 당신 도움 없이 잘 키울게"
하나님은 항상 저의 편이십니다. 전 바로 임신이 되었고, 둘째 임신 소식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친정어머니는 너무 놀라셔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니 나이가 몇인데 둘째를 낳으려고 하니?"
아들만 둘을 가지고 있는 언니는 모라고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한숨만 아휴 하고 내뱉어냇습니다.
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는 동안 어찌나 기분이 좋고 몸도 날아갈 듯 이 가벼운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겪었던 임신의 고통을 전부 보상받았습니다.
둘째 임신이라 저의 배는 남산 타워 보다 월씬 높게 올라가 있었고, 본인인 저보다 보는 사람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노산 임신이라 2007년 1월 양수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XX, 딸이었고, 기형아 테스트는 모두 음성이었습니다.
남편은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 중이었는데, 제가 둘째는 딸이라고 하자 정색을 하면서 말도 안 된다며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첫째 아들에게 엄마 배 속에 네 여동생이 있다고 매일매일 주입을 시키고, 얼마나 많이 네 도움이 필요한 지 모른다며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결국 출산 예정일 2주 전에 한국에서 친정 엄마는 대한항공 직항 비행기를 타시고 저를 도와주시러 오셨습니다.
회사도 엄마가 오시는 날짜에 맞추어 출산 휴가 휴직을 7개월 신청하고 엄마와 황금 같은 휴가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6월 12일, 출산 예정일 일주일 전에 아래에서 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산부인과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습니다.
둘째의 산부인과 담당 교수는 첫째를 제왕절개 한지 5년이 지났으니까 다시 제왕절개를 하지 말고 자연 분만으로 출산하라고 제게 권유를 하였습니다.
전 첫째 아이를 제왕절개를 하고 낳고 난 후에, 수술자리에 염증이 생겨서 큰 고생을 한 기억을 또 올리며 자연 분만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 자연 분만은 제왕절개와는 다른 천지차별의 또 다른 지옥의 맛이었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