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5년에 들어섰다. 교직에 들어와 여러 일들을 겪고 보니 나도 이제 승진을 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동기, 후배들 모두 승진을 하고 있다 보니 나의 마음도 바빠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전문직을 하라는 추천을 받아 벌써 7년째 도전하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떨어진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1년 정도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1년 전부터 정말 하루 빠짐없이 책을 읽고 나름 정리도 하고 시험문제에 맞춰 정성 들여 답안을 작성했다. 나는 당연히 잘될 줄 알았고 주위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아 올해에는 꼭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떨어지고 말았다. 나도 충격이 크지만 주위 분들도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게 더욱 힘들었다. 차라리 내가 시험 본다는 것을 몰랐을면 좋으련만 주위에 소문이 나고 게다가 떨어졌을 때의 그 비참함이란!
며칠 정도 마음이 아팠다. 쓰린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언뜻 생각나는 게 없다. 이걸 잘못했구나! 생각이라도 들면 고치면 되는데 그걸 모르니 참 난감하다. 유튜브에서 "공부의 배신"이라는 타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니 우연히가 아니라 지금 딱 나의 심정을 유튜브 검색창에 써봤다. 그랬더니 EBS 교육방송에서 타큐멘터리로 총 3부에 걸쳐 방영이 되었고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처음 타큐멘터리의 시작은 검은 창에 흰색 글씨로 시작되었다. "공부는 노력하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모두 보고 마음속이 더욱 어지러웠다. 영상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실제 시험에서 떨어지고 방황하는 모습이 각계각층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영상을 통해 나는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저토록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도 떨어지는구나!
나는 그날 저녁 마음을 먹었다. 이제 공부는 손을 놓기로. 그런데 다음 날 바로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를 놓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라 생각 든다. 때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키가 무척 큰 영어 선생님을 만났다. 눈에 띄었는지 나를 지목해서 지문을 읽게 했다. 나는 당연히 못 읽었다. 평소처럼 혼나고 말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쭈욱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으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다음 시간에도 나를 시켰고 그다음 시간에도 나를 시키셨다. 정말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선생님이셨는데 이상하게 영어시간만 되면 나를 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정말 혹독한 영어 훈련을 받게되었고 나는 당황했다. 어쩔 수 없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이거 어떻게 읽는 거냐며 물었더니 그 당시 친구들은 정말 나를 도와줬다. 그 후 영어시간을 위해 그렇게 영어 공부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직장생활을 하다 우연하게 그 당시 영어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한참을 얘기하다 나는 궁금해서 그때 나를 왜 그렇게 영어공부를 시키셨는지 물어봤다. 엄청나게 철학적인 말씀을 기대했는데 "이유는 없다."라는 짧은 대답이었다. 하긴 나도 아이들 가르치면서 큰 이유 없이 다그칠 때가 있다. 바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친구들에게 꼭 이렇게 한다. 그렇게 혹독한 영어 공부가 지금의 나의 교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당시 친구들이 만나면 항상 이런 말을 한다. "나도 같이 공부해서 교사될 걸"
올해 시험에서 떨어졌고 이번에도 실패의 맛을 봤기에 사실 더 이상 공부와 손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 나를 보고 영어를 시키셨던 선생님의 뜻을 나는 도저히 배신할 수 없다. 비록 공부가 나를 배신할지라도 수년째 시험에 떨어져 그동안 공부한 게 일순간 물거품이 되더라도 주위에서 호구 짓 그만하라고 말할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