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사람이 넷플릭스에 '승부'라는 영화를 보라고 추천했다. 바둑을 주제로 한 영화로 실제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에이 무슨 바둑영화?'라고 생각하고 그냥 심심하던 차에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조훈현 9단이 세계대회를 제패하고 환영행사를 하며 귀국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역시 내가 알던 멋진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집에서 바둑의 신동이라 불리던 이창호라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조훈현의 제자로 같이 살게 되며 일어나는 일들이 펼쳐졌다.
그런데 세계를 제패한 조훈현이가 환영행사 후 이어진 국내대회에서 자신의 제자인 이창호에게 한집도 아닌 반집으로 지는 모습이 나왔다. 나도 바둑을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 알려주셔서 조금 알고 있었더니 이해가 쏙쏙 되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제자에게 진 스승인 조훈현이가 그 충격으로 그때부터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빗속을 걸으며 괴로워하는 모습, 이후 대국에서 계속해서 제자에게 지자 낙담하고 코피까지 쏟는 모습, 그 후 아예 시합장에 나오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도 제자에게. 나도 물론 조훈현처럼 바둑으로 열패감에 사로잡혀본 적은 없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때의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도 한 번쯤은 아주 강하게 겪어본 일들이 아닐까 생각 든다. 그 후 조훈현이는 어느 날 또 대회에 나가지 않고 배회하다 집으로 들어갔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조훈현 아내가 "시합에서 지는 사람보다 피하는 사람이 더 실망스럽다."는 말을 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사실 나도 승진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인터넷으로 결과를 클릭하면 낙방했고 그때마다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정말 하루하루 너무 힘들고 '차라리 시험을 보러 가지 말까?'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의 충격에서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아예 시험을 보지 않으면 이런 곤욕스러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승부에서 지는 사람이 아니라 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는 다시 조훈현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그 후 조훈현이는 자신이 어렸을 때 일본인 바둑 스승에게 배울 때를 상기하여 창고에 넣어 두었던 바둑책을 꺼내 보며 심기일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후 그 좋아하던 담배까지 끊고 등산도 하며 체력을 키워 다시 바둑을 익혔고 다음 대국에서 피할 수 없는 제자 이창호와의 싸움에서 끝내 이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나에 대한 큰 가르침이었다.
사람은 어려운 일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요즘 가르치는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나 스스로 어떻게 하면 수업을 안 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하게 되고 차라지 애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그만둘까도 생각 들었다. 그런데 조훈현이가 나의 이런 상황을 답변이라도 하는 듯 보여주었다. 어차피 인생은 내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고 내 문제는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대신 찾아주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이것을 외면해 왔다. 오직 누군가 잘 차려진 밥상만 바라봤고 그것에 안주했고 따라갔다. 그 외의 것은 몰랐으며 알았더라도 외면했을 것이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 9단이 말하고자 하는 묵직한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나 스스로 해답을 찾으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