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나는 어느 시골 분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름도 참 예쁜 매현분교. 전교생이 20명 정도였고 내가 맡은 학급은 3, 4학년 복식학급이었다. 두 개 학년을 한 번에 가르치다 보니 한 번은 4학년 수학시간이었는데 조용히 수업 듣고 있던 3학년 여학생이 4학년 남학생 보다 우수한 학습 수준을 보여주는 기현상도 발생했다. 그렇게 생활하다 여름방학이 되어 학교 내 바닥 공사를 한다고 하였다. 이상하게 내가 가는 학교는 방학 때 큰 공사를 한다. 그래서 집기류를 옮기고 청소하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그 분교 내에 있는 도서관 관리였다. 역시나 학교 도서관은 책을 버리지 못해 오래된 책이 엄청 많았다. 이번에 바닥공사를 하는 김에 모두 폐기처분하고 공사 후 새로운 책을 구입할 계획을 세워 오래된 책을 학교와 연결된 재활용 업체에 연락하여 가져가 달라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업자는 책을 보더니 후하게 쳐서 현금으로 준다고 하니 이게 무슨 횡제란 말인가! 어차피 오래되어 색이 바랜 책들이라 그냥 가져가도 되는데 굳이 현금을 준다니 돈과 관련된 문제라서 여러 선생님들과 상의했다. 아이들에게 삼겹살을 사주자는 의견이 많았다. 시골학교에서는 학교행사 때 아이들에게 삼겹살을 가끔 꾸어 주었는데 시골이라 아이들이 가정에서 보살핌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챙겨주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삼겹살 파티, 학교에 설치된 비닐하우스에서 나는 고기 굽는 드럼통 위에 책을 판 돈으로 삼겹살을 얼마나 많이 구입했던지 정말 열심히 구어댔다. 아이들도 오늘 만은 정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지 모두들 행복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 인생이 이런 맛도 있구나' 가족들과 캠핑 가서 구워 먹는 바베큐 파티는 그냥 소소한 가족행사였고 이곳은 공교육의 최전선인 분교에서 삼겹살 파티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 그 자체였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싶다.
그렇게 도서관 오래된 책을 모두 삼겹살로 맛있게 먹고 공사가 모두 끝났다. 다시 짐을 정리하는 고된 일들의 연속이었는데 교무실 내 책상 아래쪽에 종이서류가 뭔가 끼어있는 걸 발견하였다. '이게 뭐지?' 분명 짐을 쌀 때는 몰랐는데 다시 짐을 정리하면서 중요한 서류로 보이는걸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곽봉투로 되어 있었는데 꺼내 읽어 보았다. '대법원 판결문'이란 제목으로 우리 학교가 갖고 있는 어느 산에 관련된 권리에 대한 판결문이었다.
하긴 예전부터 들리는 소문에 이 학교 학생들을 위해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학교에 본인이 갖고 계신 산을 기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산을 학교에서 관리 못하고 지역주민들께서 관리하시며 학교에 사용료를 지불해서 학교에서 요긴하게 아이들을 위해 쓰고 있다는 얘기까지는 알고 있었다. 가끔 선생님들께서 그곳에 가보자고 했지만 나와 무슨 상관인지 몰라 난 안 가봤다. 그냥 마음씨 좋은 어른께서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 하신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법원 판례를 읽어 보니 그 후의 일들이 펼쳐졌다.
산을 기부하신 어르신의 높은 뜻을 이어받았으면 좋으련만 후손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산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되었는데 그 산의 기부를 무효화하는 소송을 했던 모양이었다. 끝내 법적 다툼이 생겼고 대법원까지 올라와 적법하게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고귀한 어른의 뜻에 의해 학교에서 관리하는 게 맞다는 당연한 법적 해석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의 학교라 함은 그 동네의 가장 중요한 마을 기관이었다. 운동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동네잔치였다. 나도 처음에 이 학교로 오게 되어보니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많이 참여하는 운동회가 이상했는데 행사가 끝나도 그곳에서 밤새 떠들고 음식 먹으며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그곳의 주민이 된듯한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과 텃밭에서 옥수수도 심고 고추도 심었다. 여름방학 때 일직 근무를 섰는데 그때 학교에 찾아온 아이들과 라면도 끓여 먹고 같이 컴퓨터 게임도 하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 아이들과 학부모들과 너무 친하게 되어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 지금은 걱정도 된다.
다시 그 산 문제로 돌아와 학교에서는 이제 그 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게 개인적으로 맞다는 생각이 든다. 공교육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것인데 굳이 사유재산까지 귀속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학교에서 쓸 수 있도록 기부해 주신 이름 모를 할아버지의 뜻은 숭고하지만, 그동안 학교에서는 이득을 보았으니 이제는 그분의 자손들에게는 필요이상의 고통을 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