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검사

by 정수TV

지금으로부터 벌써 40년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누구나 개구쟁이로 학교를 다니는데 선생님께서 항상 일기를 쓰라고 하셨다. 매주 수요일마다 일기장을 제출해야 하는데 나는 항상 내지 못했다. 이유는 당연히 쓰기 싫어 못 쓴 것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죽을 맛이다’

하여튼 그렇게 일기장 검사받는 날이면 나는 운동장을 일곱 바퀴나 돌아야 했다. 하루에 한 바퀴씩이었다. 나와 같이 친구들은 열심히 땀을 흘려가며 운동장을 돌았다.

“야! 집에 가는 거야?”

친구들은 항상 귀가하는 나를 불러 같이 야구를 하자는 것이다. 나는 나중에 가방 속에 야구글러브와 86 아시안게임에서 유남규 선수가 탁구로 아시아권을 제패했을 때의 감동이 있어서인지 탁구채를 항상 휴대하고 있었다. 공부? 공부는 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겐 오직 유남규 선수처럼 탁구만 있을 뿐이다.

학교 야외학습장에는 세멘(시멘트)으로 만든 길고 흰색 페이트를 칠이 벗겨진 책상이 여러 개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항상 탁구를 연마했다. 이건 정말 최고의 재미였다. 나는 야구도 즐거웠지만 얕은 산을 깎아 만든 그 야외학습장이 청소구역이라 청소도 하며 즐기는 탁구 게임은 아시안게임보다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주말에 투망을 던지다 죽을뻔한 얘기를 하셨다.

“내가 주말에 죽을 뻔했지?”

“왜요?”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 말씀에 주목했다.

“투망을 던지는데 너무 물살이 깊고 빠른 곳에 던지다 보니 오른팔에 감고 있던 투망 끝에 내가 빨려 들어간 것이야”

“아! 그런데요? 어떻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물속에서 눈을 떠서 몸에 감긴 투망을 잘 풀고 나왔지”

“휴~~ 다행이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주말에 있었던 투망 이야기에 모두들 숨죽이고 듣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반장인 금자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마디 했다. 금자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마저 예쁜 그런 아이였다.

“선생님, 조심하세요!”

“응, 그래”

웃으며 대답하시고 수업을 이어나가셨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모두 집에 초대하셨다. 우리는 ‘앗싸, 신난다’ 모두들 선생님 댁에 몰려가 수박을 먹으며 선생님 사모님과도 인사를 했다. 얼마나 수박이 맛있었던지 그 맛은 꿀맛 같았다.

“이번 주말에 선생님과 낙화암에 가자”

“낙화암요?”

낙화암은 백제의 의자왕이 3,000명의 궁녀와 떨어졌다고 하여 낙화암이라 불리게 되었고 백제의 비극적인 역사가 있는 장소였다. 의자왕, 젊은 시절 그렇게 총명하던 사람이 왕이 되고부터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더니 결국 그렇게 죽었구나! 우리들은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10명 이상 여름방학 때 낙화암에 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걷다 보니 정말 절벽이 보였고 낙화암이라고 쓰여있었다. 그곳에서 밑으로 내려가보니 깊은 강과 함께 나룻배가 운행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모두들 그 배에 타라고 하셨고 우리는 그 배를 타고 낙화암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엄청 높은 절벽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떨어져야 할 3,000 궁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배 아래를 보니 깊은 흙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구나!

그렇게 선생님과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운동회 날 어떤 여자 아이가 나를 놀렸다. 나는 뭐라고 했더니 그 아이 아빠가 와서 나를 찾더니 꿀밤을 때렸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교실밖 본관 뒤 공터에서 분을 삭이고 있는데 친구가 나에게 참으라고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여 못 참겠다고 했고 그 길로 나가 그 여자아이가 운동장에 있어 발로 여자아이를 때렸다.

“악!” 그렇게 세게 때린 거 같지 아닌데 여자 아이는 바닥에 엎드려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너무 심했나?’

“미안해, 일어나 봐~”

이미 아이들은 모두들 우리 둘 주변에 모여들었고 나는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생각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렸고 급히 일을 하시다 오신 선생님은 괭이를 놓지도 못한 채 오셨다.

“어떻게 된 거야?”

“얘가 저를 놀렸는데 제가 뭐라고 하니 애 아빠가 저를 때려 저도 때렸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의 화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손에 들고 있던 괭이 손잡는 부분으로 나의 머리를 밀치시며 말씀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를 때리냐!”

지금도 선생님의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그 후 나는 그 여학생에게 사과했고 그 여학생도 더 이상 나를 놀리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졸업을 했고 졸업식날 선생님은 아무 상을 못 받은 나를 따로 부르셨다.

“이거 받아”

“이게 뭐예요”

“음, 앨범이야”

선생님께서는 우등상을 타는 아이들만 받는 상품을 나를 위해 선생님께서 사비로 구입해 주셨다. 나는 그 앨범을 손에 들고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그 사진을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앨범 첫 장에 끼웠다. 그렇게 졸업을 했고 선생님은 다음 해 2학년 담임을 맡는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중학교 1학년으로 학교는 적응도 안되고 공부는 완전히 딴 사람 이야기고 여름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여름방학이 되었고 청소년 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버스 타고 여러 곳을 놀러 갔다 와서 엄청 피곤하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작년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양손에 왠 어린 학생들과 길을 건너고 계셨다.

“선생님!”

내가 선생님을 불렀다.

“응”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응, 아이들과 갈 곳이 있어”

그러면서 더 이상 얘기할 틈도 없이 서너 명의 아이들과 손을 잡고 길을 건넜고 나는 잠에서 깼다. 너무도 선명한 꿈에 마치 선생님과 마주 보고 대화를 한 것 같았다.

“따르릉”

그때 집으로 한통의 전화가 왔다. 나는 어제의 활동이 피곤하여 늦잠을 자고 있었기에 어머니께서 받으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나의 방으로 오셨다.

“정수야”

“왜요?” 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어젯밤에 돌아가셨다는구나!”

“예엣?”

나는 한동안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의 얼굴을 지켜봐야 했다. 그럴 리 없다는 나와 어머니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올해가 정확하게 마흔이라고 하셨고 작년까지 그렇게 건강하신 선생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 친구들과 연락하여 그날 저녁 10명 정도 모일 수 있었다.

“야, 반갑다!”

중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사실이야?”

“응”

반장 금자가 얘기하며 눈이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사실이래, 조금 있으면 작년 동학년이셨던 선생님 한 분이 이곳으로 오시기로 했어”

잠시 후 6학년 때 옆반 선생님 한분이 눈이 충혈되어 오셨다.

“너희들 왔구나” 선생님께서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주무신 것처럼 얼굴이 벌겋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며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계셨다.

그때부터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 보며 즐거워했던 우리들은 지금의 사태가 사실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일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작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 댁에 가봤기에 옆반 선생님과 함께 담임 선생님 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도착해 보니 이미 대문 앞에 낯선 노란색 등이 달려있었다. 한자로 뭐라고 쓰여있었는데 무슨 글씨인지 알 수는 없었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은 모두 그 익숙한 집안으로 들어갔다. 옆 반 선생님은 울먹이시며

“선생님, 제자들이 찾아왔어요”

작년 이 방에서 우리는 수박을 먹으며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빨간색 병풍이 쳐져있었고 큰 술이 있었고 짙은 향이 타오르고 병풍뒤에 선생님 시신을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반장 금자를 비롯하여 우리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지금의 이 상황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기도했다. 그리고 너무 하얗게 변해버린 선생님 사모님의 얼굴은 아예 창백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맞이해 주셨다.

“사모님, 어떡해요”

걱정해 주시는 어른들 말씀에

“괜찮아요, 괜찮아요”만을 반복하실 뿐이었다. 우리는 건넌방으로 모두가라고 하였다. 건넌방으로 가는 곳에 우리 또래의 선생님 자재분들이 두 명 보였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놓고 표정을 잃은 채 보고 있었다.

사모님의 괜찮아요란 말에 자재분들도 괜찮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서 옆반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선생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어젯밤 개울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물고기를 더 잡아 온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 가보니 투망과 함께 물속에 엉켜계셨다. 급하게 꺼냈지만 이미 돌아가셨구나. 동료선생님들께 물고기를 잡아 드리기 위해 선생님은 목숨을 잃으셨구나!”하시며 같이 그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 중 한 사람으로서 엄청난 죄책감에 우리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말씀하셨다.

우리도 울면서 옆반 선생님의 눈물범벅의 말씀을 듣는데 정말 작년 수업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거 같았다. 그때 금자가 놀라서 “선생님,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던 모습이 나는 생생하게 생각났다.

그렇게 선생님은 우리 곁은 떠나셨다.

벌써 40년 이상 지난 일인데 나는 왜 그렇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지 모르겠다. 나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6학년 담임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우리 반 6학년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장 검사를 하며 일기 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선생님, 요즘 어느 시대인데 일기장 검사를 하세요” 아이들의 볼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사실 나도 안다. 요즘은 일기 검사가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그런데 아직도 예전의 교육방법을 고수하는 나는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을 통해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실행하며 살고 있었다. 그 후 한 번도 내 꿈에 나오신 적은 없지만 선생님의 그 뜻 잘 알고 실천하며 살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선생님, 우리 곁은 그렇게 갑자기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비통.png 그때의 슬픈 마음을 아직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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