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일들

by 정수TV

세상을 살다 보면 이상한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이상한 일이 자주 생기는 편이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일들이 있어 적어본다. 초임 시절 자주 회식을 했는데 회식을 하면 직장과 집은 시외버스로 1시간 거리라 직장 근처에서 차라리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 먹고 근무하러 가곤 했다. 초임 때니 지갑이 얇았기에 3만 원 정도 하는 항상 저렴한 숙소를 찾아다녔다. 그날도 선생님들과 식사를 하고 늦어져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들어갈 때부터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당시에 2000년 대인데 마치 1970년 대로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카운터에 들려 긴 손잡이에 호수가 적힌 키를 받고 방으로 향했는데 방문을 열어보니 왜 그렇게 넓은지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에 맞은편에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은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듯 알록달록하며 천으로 감싸있는 제품이었다. 숙소와 어울리지 않고 참 생뚱맞은 옷장이었다. 나는 짐이라 할 것도 없고 가방을 벗어 놓고 대충 씻고 피곤한 몸을 이불속에 넣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이라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깜빡깜빡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옷장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뭐지 저거 알록달록한 게 참 기분 나쁘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저게 나에게 넘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별 생각을 다한다며 다시 잠을 청해보는데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눈앞에 옷장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옷장을 손으로 잡았다. 정말 옷장이 나에게 넘어지며 내가 반사적으로 옷장을 잡은 것이다. 누가 들으면 세상에 그럴 일이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진짜 내가 겪은 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나빠 그 옷장을 처음으로 열어봤다. 자크로 잠겨 있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기분이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옷장을 다시 세워두고 잠을 잤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소름 돋는 장면인데 그 당시는 무슨 배짱인지 그 방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잠을 잔 거 같다. 지금 다시 그곳에서 자라고 하면 무서워서 절대 못 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너무 가슴 아프다. 내가 체육지도를 맡아 열심히 지도하고 있었는데 바로 여자 양궁부였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아이들이 코치 선생님과 함께 훈련을 하면 할수록 실력이 나날이 발전되고 끝내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이란 것도 따보고 정말 내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기쁜 나날들이었다. 하루는 양궁장비를 차 트렁크에 넣고 아이들과 울산에 있는 양궁장으로 간 날이 있다. 울산도 아주 유명한 양궁선수를 기르기 위해 큰 규모의 양궁장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었고 전국대회를 열었기에 우리 학교도 참가하였다. 나는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그곳으로 신나게 운전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 도착해 보니 웬일일까? 트렁크가 안 열리는 것이었다. 곧 양궁 시합이 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말썽이 없었던 차 트렁크가 잠겨 도대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코치 선생님을 만나 잠깐 시합장에 있으라 하고 급히 근처 카센터로 향했는데 카센터 아저씨도 이런 경우가 정말 드물다며 자기가 오랫동안 정비 생활하는데 딱 두 번째라고 하였다. 그렇게 뒷자리 시트를 모두 뜯어내고 거꾸로 트렁크에 모든 짐을 빼내고 트렁크 문을 수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 트렁크가 고장 나긴 처음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양궁장으로 향했고 무사히 시합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시합이 모두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코치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잠시 고개를 돌리는 사이 코치 선생님께서 정신을 잃으셨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나는 놀라 선생님을 흔들었는데 잠시 후 정신을 돌아오셨는지 괜찮다고 하셨다. 이상하게 이번 대회에서 무척 피곤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선생님을 모시고 돌아왔고 며칠 뒤 선생님께서 병원에 진료를 가셨는데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을 것을 권유받으셨고 그곳에서 급성 백혈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연락받고 병원으로 급히 문병을 갔다. 한참을 웃으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요즘 약이 좋아졌으니 백혈병도 계속 관리만 잘하면 괜찮을 거라며 퇴원하면 다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나누고 병원을 나서는데 선생님께서 친히 엘리베이터까지 나와 건강한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2주가 흘렀을까? 선생님께서 상태가 안 좋아져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분명 얼마 전에 웃으며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셨던 분이었는데. 그렇게 선생님 장례가 치러졌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참석하였다. 같이 오랫동안 아이들을 지도했는데 가슴이 먹먹하다란 표현이 맞는 듯싶다. 좋은 일도 참 많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떠나시니 뭔가 준비 안된 이별이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얼마 전 대회에서 트렁크가 안 열린 이유가 혹시 대회에 나가지 말 것을 누군가 미리 알려준 게 아닌가 싶다.

세 번째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찢어지는 이야기이다. 결혼하고 집과 가까운 매일 같은 환경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원래 초임지였던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사람과 상의해서 내가 처음에 발령받은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중소도시였는데 사람들도 좋고 아이들도 가르치기 좋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어느 작은 학교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발령받고 며칠이 흘렀을까? 자꾸 꿈속에서 내가 흰색으로 칠해진 장례식장을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꿈을 깨서 내 주위에 무슨 일이 있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일이 없었다. 당시에 주위에 아프신 어른도 없었고 아이들도 건강했다. 문제 될 게 없었다. 내가 새로운 학교로 옮겨 아직 적응을 못해 피곤한가 보다 생각이 들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나 또 똑같은 모습을 꿈을 꾸게 되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지만 역시 또 아직도 새 학교에 적응을 못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게 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우리 반에 키가 큰 남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전혀 안 했다. 우연히 필기한 책을 보고서 나는 화가 났다. "너, 안 되겠어 앞으로 내 주위에 있어라"라며 뒤에 앉은 아이를 내 옆에 두고 내가 항상 지도를 했다. 글씨를 잘 쓰고 있는지 딴짓은 안 하는지. 그날도 역시 수업이 끝나며 그 아이에게 "너 앞으로 잘하면 제 자리로 돌려보낼 테니, 잘해!" 그렇게 얘기했고 잘 알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1주일쯤 흘러 주말을 맞이하여 처갓집에 방문하여 일을 도와주고 잠을 잤는데 또 그 꿈을 꾸게 되었다. 이건 뭐 재방송도 세 번째니 세부적인 상황을 모두 알 것 같았다. 또 흰색의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끝나고 다시 월요일 아침이 되어 등교를 하는데 친하게 지내던 후배 교사의 전화가 왔다. 나는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저 지금 출근하는데요." 수화기 너머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반에 OOO 있죠, 그 아이 동생이 저희 반인데 동생이 오빠와 같이 등교했는데 갑자기 사라졌대요". 나는 차를 길가에 멈추고 뭔가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반 아이는 그 여학생의 오빠로 동생과 같이 등교를 했는데 하필 학교 오는 길에 기찻길이 있었다. 때마침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알리는 차단기가 내려와서 오빠와 같이 서있었는데 맞은편에 학교 가는 시내버스가 진입한 것을 본 오빠가 차단기 사이로 들어간 것이다. 그때 기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버스를 보고 뛰었기에 옆을 볼 여유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빠는 기차와 부딪쳤고 그 상황을 모르는 동생은 오빠가 먼저 학교에 간 줄 알고 학교에 와서 오빠를 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학교에 도착해서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작은 학교는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이미 우리 반 아이는 학교가 아닌 장례식장에 옮겨졌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선생님들과 장례식장에 갔다. 어머니로 보이시는 분께서 고운 모습으로 앉아 계셨고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평소에는 할아버지께서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에 등교시키셨는데 그날은 일이 생겨 못 갔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두 본인 잘못 같다며 스스로와 평소 손자를 못 챙긴 아이의 아빠를 책망하셨다. 그렇게 아이 장례식장을 오고 가며 늦게까지 선생님들과 그곳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이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그날 아이가 죽음으로 아이 엄마가 와있었기에 처음에 그렇게 서먹한 상황이었다. 다음날 또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한숨도 못 잔 아이의 엄마는 초주검이 되어 슬퍼했으며 나 또한 아이의 상황을 못 막은 죄인이었다. 장례식이 있는 가운데 같이 근무하는 선배 선생님 한분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며 나와 같이 사고 난 곳에 가보자고 하였다. 나는 아직 기차가 다니는 곳이라 위험하다며 걱정스러워하였지만 선배는 나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사실 가서는 안되었다. 아이가 사고당한 건널목에서 안쪽으로 아무리 걸어가 봐도 사고 지점이 나오지 않았는데 얼마나 걸었을까 바닥에 아직도 빨간 피자국과 119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아이의 장기의 일부가 눈에 보였다. 너무도 끔찍했고 충격을 받았다. 그 선배는 괜히 본인이 궁금하여 이곳에 온 것을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나 또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평소 아이들에게 차조심만 하라고 가르쳤지 학교 주변에 열차가 지나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주위를 기울였어도 아이들에게 차뿐만 아니라 기차도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란 생각이 들자 장례식장은 그야 말고 슬픔의 바다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온통 흰색으로 칠한 장례식장을 오가며 생활했다. 마치 내가 그동안 세 번이나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의기소침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좀 더 소상히 알려줬으면 내가 막았을까 수도 없이 생각이 들었다. 흰색 장례식장에 들어가서 누구의 장례식이었는지 조금만 보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세상 어느 누가 가르치는 아이가 유명을 달리했는데 기운차게 생활할 수 있을까? 몇 주가 흘렀을까 어느 날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행정실장이 나에게 저녁때 만나자고 했다. 자리에 나가보니 행정실 분들이 계셨고 실장이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조 선생님, 아이 일은 매우 슬프지만, 선생님께서 처음에 우리 학교 오신 날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이번 일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니 우리도 말도 못 하겠고 학교 구성원 모두 슬퍼졌어요. 예전 모습으로 살면 안 될까요?" 그러면서 술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집에 돌아오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내가 지금 와서 슬퍼한다고 결과가 바뀔 것이 아니지, 다시 예전처럼 즐거운 모습으로 살아야겠다.' 그 후 그 위험한 건널목은 내가 건의를 열심히 여러 곳에 하여 건널목 간수가 설치되어 항상 아이들의 안전한 등하교 및 지역주민들의 통행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쯤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나았을 텐데 안타깝고 아깝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게 살면서 배운 나의 경험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 든다. 항상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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